재미는 있는데 유쾌하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그녀에게서 쾌락을 얻고, 그 쾌락이 어김없기에 그녀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 그는 얼마간 이것이 상호적이라고 믿는다. 애정은 사랑 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의 사촌쯤은 된다. 별 가망 없이 시작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은 운이 좋은 셈이다. 그는 그녀를 만나게 되어, 그녀는 그를 만나게 되어. - P8

그는 그녀의 근무시간을 피해 만나면 어떨지 물어볼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저녁시간을, 아니 밤새도록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까지는 아니다. 그는 그녀를 다음날 아침까지 데리고 있기에는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안다. 냉랭하고 무뚝뚝해지며 혼자 있고 싶어 안달할 것이 뻔하다. - P9

그러고 싶지는 있지만 그의 생각이 다른 아버지, 아니 진짜 아버지 를 향한다. 그는 자기 아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까? 아니면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생각할까? - P15

그는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본 적 없는 남편에 대한 질투의 그림자가 그를 훑고 지나간다. - P19

"왜냐고? 여자의 이름다음은 자기만의 것이 아니니까. 그건 여자가 세상에 가지고 오는 선물의 일부야. 여자는 그걸 나눌 의무가 있지" - P27

일주일 전만 해도 그녀는 그저 수업을 듣는 예쁜 학생이었다.그런데 이제 그녀는 그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 숨을 불어넣는 존재가 되었다. - P36

나는 사과 속에 든 벌레 같은 인간입니다. 당신에게 고통을 가한 당사자인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 P57

"우리가 당신들 손에 아이들을 맏기는 건 당신들을 믿을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대학을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딸을 독사의 소굴로 보낸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어요. 루리 교수님. 당신이 고매하고 권력있고 온갓 학위를 다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당신이라면, 하느님 맙소사, 나는 나 자신이 이주 부끄러울 거에요. 민약 내가 상황을 잘못 짚었다면, 이제 당신이 얘기할 차레입니다. 하지만 당신 얼굴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군요." - P58

그렇게 시험의 날이 다기왔다. 그것은 경고도 없이, 나팔소리도 없이 왔다. 그는 그것의 한가운데에 있다.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는 것을 보면 멍청한 방식이지만 심장도 그것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와 그의 심장은 이 시험을 어떻게 견더낼까? - P134

그는 생각한다. 이것은 매일, 매시간, 매분, 이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살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이 순간,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 안에 포로로 잡혀 있거나 머리에 총알이 박혀 협곡 밑에 있지 않음을 다행으로 생각해라. 루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라. - P139

"아버지. 사람들이 물으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 지만 애기하시겠어요?"
그는 무슨 말인지 이헤하지 못한다.
그녀는 반복한다. "아비지힌테 일이 있었는지 애기하세요. 저는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애기할 테니까요" - P141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여긴 시골이에요.여긴 이프리카에요." - P175

소년은 놀라는 것 같지도 않다. 반대로, 이 순간을 대비하고 기다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하다. 그가 말한다. "넌 누구나?" 그러나 그 말은 다른 의미다. 넌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와 있냐? 그의 몸 전체가 폭력 적인 분위기를 발산한다. - P185

"루시. 너는 정말 날 놀라게 만드는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너도 그걸 알고 있다. 페트루스에 관해서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데, 만약 네가 이번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이번에 실패한다면, 넌 제대로 살 수 없을 거야. 네게는 네 자신과 네 미래와 네 자존심에 대한 의무가 있어. 내가 경찰에 전화하겠다. 아니면 네가 하든지." - P188

"그건 너무 개인적이있어요.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했어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저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어요. 나머지는.. 에상되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중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 P219

"어쩌면 가끔씩 쓰러지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죠.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 P235

"이제는 말씀드려야겠군요, 이게 처음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페트루스는 꽤 오랫동안 그런 암시를 해왔어요. 그의 가정의 일부가 되는 게 더 안전하다는 거죠. 농담도 아니고 위험도 아니에요. 어떤 점에서 보면 그는 진지해요."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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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독서를 거의 못했다. 독서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인건지 모르겠다. 대신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좋아하는 두가지를 병행 하는건 참 힘든것 같다. 그래도 책을 조금은 읽었다. 기왕 이렇게 된거 리뷰는 포기하고 그동안 소량으로 읽은 책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N25064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 최진영

내가 전작하는 국내작가 3명은 한강, 김연수 최진영 작가님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안 살 수 없었다. 소설은 아니고 제주도에서 살면서 경험한 내용을 담은 일기 형식의 노트다. 팬심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작가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작품이어서 추천하고 싶은데, 그냥 최진영 작가님의 작품을 찾는 분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단 한사람>, <오로라>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들이 보인다. 한화팬인 최진영작가님 올해 매우 행복하실거 같다. 이렇게 최진영 작가님 전작 완료~!



N25065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예전에 열린책들 버젼으로 읽고, 이번에 문학동네 버젼으로 다시 읽었다. 역시나 좋았다.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아쉽다. 버지니아 울프 top 2 작품은 <등대로>와 <댈러웨이 부인>이라고 보는데, 그중 <댈러웨이 부인>이 더 재미있는 것 같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 다음번에는 <파도>를 읽어봐야 겠다.



N25066 <7번 국도> 김연수

김연수 작가님의 초창기 작품이어서 그런지 청춘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스무살> 보다는 별로였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팬심을 빼고 보자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아니다. 로드무비를 보는 기분이었는데, 여름에 7번국도 한번 가야할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김연수 작가님(소설) 전작 완료~!  빨리 신작 내주십시요~!



N25067 <검은 사슴> 한강

정말 대단한 작품이었다. 한강작가님의 첫 장편소설인데, 분량이 상당해서 읽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리뷰를 꼭 쓰고 싶었는데 아쉽다. 초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도 높고 대단히 재미있었다. 결말부분(기차사고)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한강작가님 특유의 무거움과 우울함은 초기작에도 여전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상처와 어둠, 그리고 위로를 잘 그린 작품. 다음번에는 <노랑 무늬 영원>을 읽어야 겠다.



N25068  <궤도> 서맨사 하비

SF를 자주 읽지는 않지만 우주를 다루는 작품을 좋아한다. <궤도>는 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본 단 하루, 열여섯번의 일출과 일몰 동안 여섯명의 우주비행사의 눈을 통해 바라본 아름다운 지구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린 작품인데, 책을 읽는동안 마치 내가 우주정거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구가 아름다운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읽는 작품들은 꼭 리뷰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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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작품이다. 역시 한강작가님은 최고다.

그를 가장 자극했던 것은 호기심이었다. 그 여자가 왜 그랬을까. 왜 미쳤을까. 미친 게 아니라면 왜 옷을 벗었을까. - P50

그러나 그보다 더욱 명윤을 괴롭혔던 호기심은 그녀의 불가해한 침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침묵. 무수한 말과 형상들로 가득찬 듯한 침묵 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인영의 말대로 아무 기억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일까. - P50

그는 어느 때보다 직접적인 죽음의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약을 먹거나 기스를 늘어놓는 식의 방법을 택할 마음은 없었다. 만일 한 다면 깨끗하게 뛰어내린 생각이었다. 가장 확실하게. 준비과정도. 구조될 염려도 없이 몇 초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몇 초면 끝난다는 바로 그 생각으로 그는 하루하루를 버텨같 수 있었는지 모른다. - P55

그리고 화요일 아침 그 버려진 개 대신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은 의선이었다. 의선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은그 늙은 개만큼이나 더러웠다. 그녀는 알몸 위로 나은 남자용 트렌치코트만을 허술하게 여며 입고 있있다. - P79

어디까지 가시죠? 나는 여기서 내리는데요. 선반에 울려놓았년 가방을 내리며 내가 물었을 때 의선은 대답 했다...사실은 저는 갈 곳이 없어요...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의선은 다시 한번 예의 어럼풋한 웃음을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때 니는 두고두고 스스로 도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을 했다. 그럼 나하고 같이 갈레요? 라고 나도 모르게 물은 것이다. - P88

그때 갑작스럽게 아내가 미치도록 그리위진 것은 무슨 까닭이었까. 단 한 장의 필름도 인화지도 남지 않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장이 깨달은 것은 아내를 완전히 잃있디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잃었으므로 아내 역시 잃었다는 것을 뒤늦게 시인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무치는 일인가를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아내를 다시 불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던 것일까. - P123

만일 명윤이 조금이라도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남자였다면 의선과 같은 여자에게 빠질 수 없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윤에게는 앞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있다. 현재의 일 분 일 초가 영원과도 같이 끝나지 않는다고 느껴졌을 때 그는 의선을 만났다. - P174

의선의 행방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잡았다든가, 이 눈 내리는 낯선 도시에서 곧 의선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들지 않았다. 현실은 영화 따위외는 다르다. 그렇듯 쉽게, 극적으로 의선을 찾아내는 일 따위는 일어날 성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냉정한 판단인지, 아니면 마음 한켠에 숨어 있는 은밀한 희망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명윤의 말대로 나는 지독히 차가운 인간인지도 몰랐다. 어져면 내가 원하는 것은 의선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 P237

깊은 땅속, 암반들이 뒤틀리거나 쪼개어져서 생긴 좁다란 틈을 따라기어다니며 사는 짐승이랍니다. 흩어져 있는 놈들을 헤아려 보자면 수천 마리나 되지만 사방이 두꺼운 바위에 막혀있는 탓에 한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톨돌이로 여긴다지요. - P243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을 멈출 때 비로소 평화를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 P321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면 이사람은 튜브를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쉽게 사람을 환멸하게 만드는 생각이었다, 결코 타인에게 튜브를 던지지 못할 사람도 있었고, 던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경계에서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도 있었으며, 아무런 생각 없이 던져주고 말 사람도 있었다. 튜브를 거머쥔 꿈속의 내 모습이 스스로를 환멸하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 P423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바에야, 내 배반을 진작부터 명징하게 점치고 있는 바에야. 누구도 회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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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님은 그저 좋을 뿐이다.

책과 노트와 펜만 있으면 나는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사람에게는 절반만 의지하고 책과 글에 절반을 의탁하면서, 의젓하고 담대한 존재를 꿈꾸며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 - P9

언젠가는 죽은 새를 두 손으로 안아 들고 흙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묻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장래 희망은 죽은 새를 묻는사람. 그 많은 새들은 어디에서 죽을까.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무엇도 죽은 자신을 훼손할 수 없는 곳을 찾아가 죽을까. 새는 그럴 수 있다. 멀리멀리 날아가 죽을 수 있을 것이다. - P26

사랑을 모르고도 나는 분명히 사랑한다고 느낀다. - P43

오늘 같은 강풍에는 새도 낮은 곳으로 피신했을 것이다. 낮은 나뭇가지에 않아 나무와 함께 흔들리며 나무를 부추길지도 모르지. 걸어, 걸어라, 나무야. 수천만 년 숨겨온 너의 비밀을 이젠 공개해버려! - P49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면 모두 떠날 거라고 믿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들면 더 멀리 달아났다. 작아지도록, 한없이 작아져서 보이지 않도록. 나에게는 나뭇가지와 돌멩이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 걸을 수 있는 수많은 길. - P149

무언가를 집요하게 강박적으로 좋아하던 나는 흐르고 흘러 머나먼 바다로 가버렸다. 이제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 두려워하는 사람. 당신은 모르겠지만 좋아하고 있어요. 잔잔하고 고용하게 홀로 좋아합니다. 이 마음에는 아쉬움이 없고, 이 마음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테니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P167

소설이니까, 소설이어서 쓸 수 있는 이야기이고, 소설의 그런 점이 좋아서 나는 소설을 쓴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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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7-11 0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인용문에서 코끝이 찡. 소설 쓰는 이유가 입안에서 뱅뱅 돌기만 했는데, 그것을 말할 언어를 찾을 것 같아서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5-07-11 09:47   좋아요 0 | URL
영화나 현실과는 다른 소설만의 매력이 있죠~!! 최진영작가님 작품은 다 좋습니다~!!
 
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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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5063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언제나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새소리를 들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작가의 초기작을 읽는다는 건 정말 흥미롭다. 지금과는 다른 초기작품만의 참신함, 풋풋함, 생동감, 미숙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음악은 또 다르다. 음악의 경우는 초기작이 명반인 경우가 종종 있지만, 문학은 초기작이 명작인 경우는 별로 못본것 같다. 아마 문학은 참신성 보다는 깊이를 더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갑자기 쓸데없는 이야기를 적은것 같다...


최근에 어려운 책(아우스터리츠...)을 읽어서 오늘은 좀 잘읽히고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었기에 선택한 책이 바로 김연수 작가님의 초기 단편집인 <스무살>이다. 나의 선택은 훌륭했다. 대만족 이었다.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건가 싶었다. 김연수 작가님의 다른 명작들에 비해 완성도라든지 깊이가 떨어지는건 분명 있었지만 정말 참신했다. 그리고 책 제목처럼 작품마다에서 젊음이 느껴졌다. 나는 스무살 때 뭘 하고 있었을까?

[열심히 무슨 일을 하든, 아무 일도 하지 않든 스무 살은 곧 지나간다. 스무 살의 하늘과 스무 살의 바람과 스무 살의 눈빛은 우리를 세월 속으로 밀어넣고 저희끼리만 저만치 등뒤에 남는 것이다. 남몰래 흘리는 눈물보다도 더 빨리 우리 기억 속에서 마르는 스무살이 지나가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 P.9



<스무살>에는 총 9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스무살>은 자전적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인데, 읽다보면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햇갈리기도 했다. 김연수 작가님의 스무살 에피소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스무살에 그저 별뜻없이 들어간 대학 영문과, 그리고 그 시대에 일상이었던 데모, 사랑, 아르바이트까지 스무살의 추억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그들은 지금 뭘 하고 살고 있을까?

[세상에서 단 한 번 가까위졌다가 멀어지는 별들처럼 스무 살, 제일 가까워졌을 때로부터 다들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따금 먼 곳에 있는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말 역시 우스운 말이지만, 부디 잘 살기를 바란다. 모두들.] P.44



<죽지 않는 인간>도 비슷한 느낌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뭔가 특별한 이야기는 없다. 다만 나를 스쳐지나간 소중한 사람들이 등장할 뿐이었다. 동료 작가이자 요절한 J, 레고드가게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이별할 수 밖에 없었던 서연, 만나본적은 없지만 나의 음성사서함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던 승미,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작가님은 그들이 현실에서 사라졌다 하더라도, 다시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글을 통해 그들을 추억한다면, 소설속에서 되살린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간 나는 이 세계가 너무나 두려웠어요. 언제나 혼자라는 느낌뿐이었는데, 일단 나 자신을 구할 능력이 없다는 건 분명했지요. 당신 역시 나를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나 외엔, 그 무엇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는 아이였으니까. 고립. 뭐, 그런 단어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이죠.] P.225



특이한 소재의 작품들도 상당히 좋았다. 죽을정도로 완벽한 롤러코스터에 대한 이야기인 <마지막 롤러코스터>, 선풍기 수집가와 희귀본 수집가라는 특이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공야장 도서관 음모사건>, 한편의 느와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작품인 <사랑이여, 영원하라!>, 인화한 사진에 자신의 모습이 찍힌 걸 본 승민, 그리고 그런 승민의 도플갱어인 '나',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사람의 공허한 청춘을 흥미롭게 연결시킨 <뒈져버린 도플갱어>까지, 완벽함 보다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예컨대 선생 역시 불후의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후에는 소설가로서 존재의의가 사라집니다. 불후의 소설을 이미 썼으니까요. 저라면 만약 불후의 소설을 쓰게 된다고 해도 그 소설을 발표하진 않을 겁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없애버리는 우를 저지르고 싶진 않으니까요.] P.116



이제 김연수 작가님의 <7번국도>만 읽으면 소설은 다 읽게 된다. 시원섭섭하다. <7번국도>는 7월에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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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6-30 1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스무 살> 좋아해요. 뭔가 딱 몽글몽글한 그 젊을 때만 쓸 수 있는 감성이 살아 있지 않나요? 자전적 이야기라 해서 더더욱요. 드디어 대망의 김연수 작가 전작을 마치게 되시는군요. 축하드립니다. <7번국도>도 진짜 좋았어요.김연수 작가가 새파랑님 서재에 오셔서 보시면 흡족해하실 것 같아요. ^^ 박상영 작가 에세이집에 등장한 김연수 작가 실제 모습도 딱 기대한 그 모습 그대로더라고요.

새파랑 2025-06-30 20:35   좋아요 0 | URL
작품에서 젊음이 막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얼마전에 동네책방에서 ‘디 에센셜 김연수‘를 구매햏는데 사장님께서 저랑 김연수작가님이랑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하시더라구요 ㅋ영광이었습니다~ 7번국도도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