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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은총의 일격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1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평점 :
N23026
"책 속엔 삶이 들어 있지 않소. 책 속에 있는 것은 삶이 타고 남은 재, 흔히들 인간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거요."
퀴어문학이 보여주는 사랑의 극단을 좋아한다. 가끔 육체적으로 너무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은 좀 싫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심리에 대해 묘사하는 작품은 정말 좋아한다.
이번에 읽은 알렉시/은총의 일격(두편의 단편이다)은 내 취향과 완벽히 맞는 작품은 아니었다.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됨에도 주인공들은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10마디 단어중에 1마디 단에에만 속내를 숨겨놓는다. 마치 누군가가 훔쳐볼 것을 걱정하듯이, 마치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아직까지 내가 당신에게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너무도 힘들 게 써나갈 이 글을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읽어달라는 거요. 삶을 사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 삶을 설명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라오."] P.20
그래서일까? 드러낼 수 없었던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더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완벽하게 글로 써내려 갈 수 있을까? 머릿속에 있는 생각중 과연 몇 퍼센트가 글이라는 형태로 표출될까?
우리의 생각이 글로 표출될 때 그 생각은 정제되어 나올 수 밖에 없다. 때론 과장되고, 때론 생략되어지면서 말이다.
<알렉시>는 주인공인 알렉시가 부인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남긴 편지로 된 글이다. 그는 그녀를 떠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그녀에 대한 애정이 없었음을, 그동안 그가 품었던 어려움을 편지글로 전달한다.
[난 늘 죽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했소.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사랑을 상상하는 방식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오. 힘이 다 빠진 상태, 아마도 달콤할 패배이리라 생각했지. 그날 이후 사는 내내 그 두 가지 강박적 생각이 번갈아 나타났소 하나에 시달리면 다른 하나가 나타나서 낫게 해주면서 말이오. 하지만 그 어떤 추론도 두 가지 병에서 다 낫게 해주진 못했다오.] P.44
하지만 왜 그가 그녀를 떠나려는지에 대한 진짜 원인에 대해서는 쓰질 않는다. 다만 그의 성적 취향이 동성애임을 암시하는 몇마디 단어가 아주 잠깐 등장한다.
[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소, 금지된 성향의 첫번째 결과는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 갇히게 된다는 거요. 침묵하든지 아니면 공모자들에게만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오. 나 자신을 이겨내려고 애쓰 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건, 나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도 연민을 품어주는 사람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진정한 선의가 누릴 자격이 있는 아주 약간의 존중이라도 베풀어줄 사람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소.] P.55
그런데 알렉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아내를 떠나려는게 맞는걸까? 자신을 찾기 위해(동성애) 소중했던 것(아내)을 버리는 행위에 대해 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대여, 우리는 삶이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삶은 우리를 마멸시키고, 우리 안에서 마멸되는 것은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오 난 전혀 변하지 않았소. 단지 나와 나 자신의 타고난 기질 사이에 사건들이 끼어들었을 뿐이오. 나는 이전의 나 그대로였고, 어쩌면, 환상과 믿음이 하나둘 스러져갈 때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더 잘 알게 되니,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나 그대로였소. 수없이 노력하고 수없이 성의를 쏟았지만 결국 이전과 똑같은 나..] P.107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은총의 읽격>은 조금 더 재미있고 쉽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내전을 치루고 있는 발트해 연안을 배경으로, 에릭이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 책인데, 주요 등장인물은 딱 세명이다. 에릭(남), 소피(여), 콘라드(남) 인데...
소피와 콘라드는 남매지간이다. 그리고 소피는 주인공 에릭을 좋아한다. 그런데 에릭은 콘라드를 좋아한다. 소피는 이 사실을 모른다. 에릭은 자신에게 계속 다가오는 소피를 받아주지 않는다. 소피는 왜? 하며 괴로워한다. 미친 삼각관계의 끝은 과연 어떻게 될까?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게임을 이끌어간 것은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욱 치열했다. 게다가 주의를 쏟아야 할 다른 일이 많아 신경이 분산된 나와 달리, 그녀는 오로지 나에게 집중했다. 나에겐 콘라드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으며, 그 이후로 버렸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야심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내, 마치 주변 사람 모두가 비극의 단역이 되어버린 것처럼, 오직 나만 혼자 존재했다.] P.145
이 작품에서도 에릭의 동성애적인 말이나 행동은 드러나지 않는다. 읽다보면 에릭이랑 콘라드 사이에 뭐가 있긴 한건가? 라는 의문도 생긴다. 그러면서 아! 1인칭 주인공 시점이어서 그렇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걸까?
["무서워하지 않는 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녀는 첼로의 저음처럼 늘 나를 감동시키는 투박하면서 부드러운 원래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단 오분이라도 행복하다면 그건 신이 내려준 신호일 거예요 당신은 행복한가요? 에릭?"] P.174
그리고 결국 진실을 알게 된 소피는 두 사람을 떠난다. 그녀가 느꼈을 배신감은 어느정도 였을까?
해설을 읽어보니 이런 작품을 <말하려는 것을 남겨두고 그 주변의 것들을 기술함으로써 대상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인 '음각적 글쓰기'> 라 한다고 한다. 어쩐지 문장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핵심을 부각하는 글쓰기, 이게 정말 사람의 마음이랑 비슷한게 아닌가 싶다. 드러나는 고통보다도 숨겨져 있는 고통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