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31

˝다시 일어설 자신만 있다면, 한 번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하지만 돈이야 문제될 게 없다고 쳐도, 그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오.˝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열한번째 작품인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그의 총서 중 유일한 해피엔딩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해피엔딩이었을까?


주인공인 ˝드니즈˝는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아무 재산도 없이 남동생 둘을 데리고 무작정 파리로 상경한다. 그리고 일년전에 자신들을 챙겨주겠다는 큰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아무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간다.


하지만 장사꾼인 큰아버지의 집은 ˝드니즈˝ 가족을 받아줄 정도의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큰아버지의 집은 바로 옆에 생긴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으로 인해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네의 모든 가게의 이익을 흡수하는 백화점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진다.


하지만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드니즈˝는 큰아버지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 취직한다. 하지만 시골에서 올라온데다 돈도 없었던 ˝드니즈˝는 낡은 신발 한켤레만 있었고, 꾸미지 못한 그녀의 외모 때문에 다른 직원들의 멸시를 받는다. 하지만 강직하고 의지가 강했던 그녀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버틴다.

[내 말 잘 들어라, 얘야. 난 이 물병과 같아. 여기서 절대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그들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파멸을 자초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난 끝까지 버틸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1권 P.356



이런 그녀를 남다른 눈길로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백화점 사장인 ˝무레˝였다. 처음에는 연민이었는지도 모른다. 촌스럽고 가진것도 없었던 그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낀 그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한다. 그리고 점점 그녀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무레는 그녀를 어린아이처럼 다루고 있었다. 불쌍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한 여자아이에게서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여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면서도 호감보다는 동정심에 더 가까운 감정으로 그녀를 대했다.]  1권 P.207



그동안 자신의 부와 지위를 바탕으로 많은 여자들과 놀아났던 그는, ˝드니즈˝ 역시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 자신하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그를 밀어낸다. 마음속으로는 그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있긴 했지만, 방탕하고 돈으로 매수하려는 그에게 반감을 갖는다.

[이제 무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은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그는 몸을 숙여 여자를 줍기만 하면 되었다.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순종적인 하녀처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변덕스러운 말 한마디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그럴 듯한 핑계조차 대지 않으면서 단번에 그를 거절했다. 오랫동안 억눌렸던 그의 욕망은 그녀의 저항에 더욱더 자극받아 이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었다.]  2권 P.112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무레˝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태도에 당황한다. 아무것도 가진것 없어 보이는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다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게 신기한게 그렇게 별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자신을 거부하니 오히려 더 관심이 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심으로 그녀에게 빠지게 된다. 그동안의 방탕했고 오만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그는 변하게 된다. 과연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게 될까?

[그녀는 무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지닌 강력한 힘은 그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2권 P.209




여기까지만 보면 분명 해피엔딩 분위기이다. 하지만 ˝드니즈˝와 ˝무레˝를 제외한 백화점 주위의 소상공인들 삶은 그렇지 않게 그려진다. 그들은 백화점이란 자본 앞에서 파산하고,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심지어 자살시도까지 하게 된다. 에밀 졸라는 ˝드니즈˝의 성공하는 삶과 대비되는 비참한 소상공인들의 삶을 함께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삶의 명암을 암시하고 있다.

[그랬다, 저 백화점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아비에게서는 재산을, 어미에게서는 자식을, 그리고 딸한테서는 10년 전부터 기다렸던 남편감을 앗아 갔던 것이다.]  1권 P.389




사실 개인적으로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2권 부터는 그렇게 흥미롭게 읽히지는 않았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는 ˝드니즈˝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이름처럼 무례한 ˝무레˝의 갑작스러운 사랑꾼으로의 변화는 쉽게 납득이 안되었다.


그럼에도 에밀 졸라가 그리는 여인들의 돈과 욕망을 잡아먹는 ‘백화점‘의 실체에 대한 묘사는 감탄할만 했고, 소상공인들이 어떻게 자본 앞에서 무너지게 되는지에 대한 과정 묘사는 너무 사실적이었다. 주인공들의 사랑이야기 보다는 주변인들의 비극에 더 흥미를 가져서인지 결말이 다소 아쉬웠다. 역시 난 해피엔딩 보다는 새드엔딩이 맞나보다.


그리고 선입견이 무서운게 그래도 난 ˝에밀 졸라˝니까 결말 부분에 당연히 뭔가 큰 폭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게 안나와서 약간 당황했다. 역시 선입견은 좋은게 아니다. ˝에밀 졸라˝의 색다른 작품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께는 이 책을 추천한다.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었다.


Ps 1. 루공 마카르 총서 열번째 작품인 <집구석들>과 열한번째 작품인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이야기가 연결된다고 하니, <집구석들>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다음달에는 <집구석들>을 읽어야 겠다.


Ps 2. 에밀 졸라의 전작 읽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읽은 에밀 졸라의 Top3는 인간짐승, 목로주점, 테레즈 라켕 순이다. 아직 읽을 책이 많아서 순위는 바뀔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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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2-23 20: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름처럼 무례한 무레에서 빵 터졌습니다 ㅋㅋㅋ 아니 전작 읽기 하시는 작가가 대체 몇 명이예요? 무서운 분…

새파랑 2022-02-23 21:28   좋아요 5 | URL
작가가 가끔씩은 이름에 맞게 캐릭터를 잡더라구요~ 에밀 졸라 분명 한국어를 알고 있습니다~!!

저 전작 작가 7인으로 고정하고 있습니다 ㅋ 전 전혀 안무섭고 순둥이 입니다 😆

청아 2022-02-23 22: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순둥이 새파랑님 잘 읽었습니다. 😁저도 다음 읽고싶은 에밀졸라의 작품은 <집구석들>이예요!ㅎㅎ
드니즈가 행복한건 그야말로 신데렐라 이야기. 소상공인들의 비극 때문에 저도 왠지 좋아보이질 않더라구요. 그럼에도 졸라의 자연주의는 역시👍 저의 TOP 2는 <인간짐승>과<제르미날>입니다.ㅎ

새파랑 2022-02-23 22:38   좋아요 4 | URL
미미님 답글을 보고 찾아보니 저한테 <제르미날>이 있더라구요 ㅋ 관리가 안되고 있습니다 ㅎㅎ 그럼 전 <집구석들> 다음에 <제르미날> 읽어야 겠어요~! 급하게 리뷰써서 부실합니다 ㅎㅎ 두권짜리 책은 리뷰 쓰기가 어렵더라구요 ㅋ

페넬로페 2022-02-23 22: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주말연속극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의 향기가 나는데요~~대형 프랜차이즈때문에 동네 상권이 죽는 요즘 경우와 비슷합니다 ㅠㅠ
이 책에 마지막 한방이 없군요^^

새파랑 2022-02-23 22:39   좋아요 5 | URL
뭔가 주말 드라마랑도 비슷한 느낌이 있습니다 ㅋ 전 마지막에 비극이 있을거라 기대했는데 그건 아니더라구요 ㅎㅎ 근데 책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초란공 2022-02-23 22: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들이 ‘가장 패륜적인 프랑스 작가‘로 ‘에밀 졸라‘를 꼽더군요 ㅋㅋㅋㅋ 당시의 사회나 지금의 한국이 너무나 흡사한듯해서 흠칫 놀랍니다.

새파랑 2022-02-23 22:41   좋아요 2 | URL
와우 가장 패륜작가였군요 ㅋ 좀 그런 측면이 있는거 같아요 ㅎㅎ저때 당시의 백화점이나 지금이나 비슷해보여요. 그시대에 그런 큰 시스템이 돌아갔다는게 놀라웠습니다~!!

얄라알라 2022-02-23 23:40   좋아요 2 | URL
헉^^;;; 그나저나 초등학교 친구들도 ‘에밀 졸라‘를 안 단 말이죠?^^

새파랑 2022-02-24 06:38   좋아요 1 | URL
프랑스 국민작가 에밀졸라 인가 봅니다 ^^

얄라알라 2022-02-23 23: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Les Rougon-Macquart
에밀졸라 잘 모르는 제게 ˝루공˝이 꼭 한자어 같아서 스펠 한번 확인하고 갑니다
무려 20권, 새파랑님께서 시리즈 섭렵에 도전하시는 거죠? 리스펙, 진정 리스펙!!!^^

새파랑 2022-02-24 06:40   좋아요 1 | URL
20편이 다 번역된게 아니고 절반 정도? 번역된거 같더라구요. 다시 찾아보니 열두편이네요 ㅋ 올해안에는 다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2-02-24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공가 보다는 마카르가 이야기가 더 인기있었나봐요^^
루공가 이야기는 별로 번역이 안되었어요 ㅎㅎ
새파랑님 따라가려면 멀었군요 ㅋ

새파랑 2022-02-24 10:16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답글 보고 찾아보니까 마카르가가 더 많이 번역되고 재미있는거 같아요 ㅋ 그레이스님은 이미 소세키 완독하셔서 제가 따라가야 합니다 ^^

coolcat329 2022-02-24 09: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금 목로주점 읽고 있는데요...
인간들이 좀 심하네요. 인간이라는 ‘동물‘을 연구했다더니 딱입니다.
집구석들을 읽고 이 책을 읽어야겠군요.

새파랑 2022-02-24 10:16   좋아요 3 | URL
목로주점은 좀 심하게 심합니다 ㅋ 집구석들 먼저 읽으시고 알려주세요 ^^

희선 2022-02-25 0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데렐라 이야기도 보이면서 백화점 때문에 힘든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군요 지금 시대와 비슷하기도 하네요 그런 건 예전부터 그랬다니... 백화점은 더 비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때는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비싸도 백화점 물건을 사려고 했을지...


희선

새파랑 2022-02-25 06:30   좋아요 0 | URL
그때 백화점은 주변 소규모 가게보다 쌌나봐요. 무한 가격 경쟁 ㅋ 지금은 백화점이 더 비싸서 전 안가지만 ㅎㅎ 싼걸 미끼로 고객을 유인해서 이것저것 더 사게 하는건 비슷한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