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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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다시피 사람들은 늘 사느라 바쁜데, 당신은 당신 때문에 바쁘단 말이지. 대충 그렇소, 설명을 잘 못하겠어."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의 의미는 똑같지 않다. 그리고 지속시간도 제각각이다. 사랑이 정점에서 내려왔을때, '패배의 신호'가 가까워졌을 때 이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새로운 사랑을 찾아갈 수도 있고, 그냥 체념하고 살수도 있으며,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모른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 다시 적응하는거다.


이름과 같은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여섯번째 작품인 <패배의 신호>는 운명같은 만남을 통해 기존의 사랑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만 결국 현실에 부딪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두 남여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고독을 그린 작품이다.


"사강"은 이 책을 출판하기 전에 두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그리고 수많은 연애를 거쳤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에는 그녀의 자전적인 그리고 그녀가 평소에 생각하던 사랑에 대한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르는 것은 쓸 수가 없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쓸 수가 업다. 체험하지 않은 일은 쓸 쑤가 없다."는 그녀의 말이 결코 거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여성 "루실"과 남성 "앙투안"은 사랑에 빠지기 이전까지 다소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루실"은 스무살 연상의 돈 많은 재벌인 "샤를"과 동거하고 있었고, 편집자인 "앙투안" 역시 열살 연상의 사교계의 권력자인 "다인"과 동거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하 사교계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비슷한 젊음을 간직하고 있던 두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난 이제 얼굴을 붉히지 않고는 널 볼 수 없어, 마음이 아프지 않고는 네가 떠나는 걸 볼 수 없고,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다른 사람 앞에서 너한테 얘기할 수 없을 거야."]  P.71



하지만 "루실"을 너무 사랑하는 "샤를"은 두사람의 감정을 눈치채면서도 모른채 하거나 오히려 도와준다. "샤를"에게는 그녀가 자기를 떠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마음만 잠시 떠나는게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앙투안"은 "루실"에게 자신과 "샤를" 중 한 사람만을 택하라고 말하고, 그녀는 결국 "앙투안"을 선택한다.

[언젠간 일어날 일이었다. 이런 날이 오고야 말 줄 알았다. 남자들이란 끔찍스럽게 피곤한 존재들이었다. 오후까지는 결정을 해야 하리라. '결정'은 그녀에겐 가장 끔찍한 프랑스어 단어 중 하나였다.]  P.133



그렇게 그녀는 그동안 자신에게 안락과 무한정한 애정을 준 "샤를"을 뒤로하고, 오직 사랑의 정열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된다. 과연 그녀의 행복은 오래 갈수 있을까? 이렇게 자신을 떠난 "루실"에게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샤를"의 마음은 진심일까? 그의 마음은 어떤 기분일까? 패배감? 순애보?

["루실, 언젠가 나한테 돌아와요. 난 당신을 당신 자체로 사랑해, 앙투안은 자기 짝으로서 당신을 사랑하지. 당신과 함께 행복하고 싶은 걸 거고, 그 나이엔 그게 맞아. 하지만 난 당신이 나와 무관하게 행복하기를 바라오. 기다리겠소,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니까."]  P.179



그동안 정부에게서 받은 경제적 지원으로 삶을 살았던 둘의 앞에는 이제부터 고난이 조금씩 등장한다. 가난하더라도 둘만 행복하다면 살아갈 수 있겠지만 "루실"에게는 이를 견딜 힘이 크지 않았다. 그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앙투안"은 어떻게든 그녀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지만, "루실"은 그럴 의지가 부족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현재만을 위한, 자신의 욕구만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둘의 뜨거웠던 여름은 지나가고, 이제 가을이 다가온다.

[그들 사이엔, 심지어 가장 감미롭고 다정한 순간에도, 불안하고 난폭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그들은 더러 이 불안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혹여 그들 중 누군가의 가슴에서 이 불안감이 사라진다면 그건 동시에 사랑도 사라졌다는 의미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인식했다.]  P.186



그러던 어느날 "루실"은 임신을 하게 되고, 그녀는 자식을 원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지우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없었던 두 사람, 그렇다고 뒷골목에서 아이를 지우기는 싫었던 "루실"은 "샤를"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돈을 빌린다. 여전히 "루실"을 사랑하는 "샤를"은 자신이 잘 아는 스위스 의사를 소개시켜 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앙투안"은 분노를 느끼며 질투를 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제 둘의 관계는 겨울에 접어 들었다고, 결국 해어지게 될 거라고.

[그들은 무엇이 되었는가?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객선이었던 이 침대가 표류 중인 뗏목으로 변했고, 그토록 친근하던 이 방은 추상적이 되었다. 그가 루실의 머릿속에 미래의 개념을 주입했고, 그럼으로써 그들 사이의 미래를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P.225



둘의 관계는 초반의 애욕마저 사라지게 되고, 결국 "루실"은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는 "샤를"에게 돌아간다. 모든 걸 내팽겨치고 선택했던 사랑은 결국 일년도 안되어 끝난다.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무작정 "루실"의 잘못이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루실"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다고 자신을 바꿀 수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열정에 끌려서 둘 중 한사람을 선택하라고 강요한건 "앙투안"이었다.

[루실은 걸어서 돌아왔다. 집으로, 샤를에게로, 고독에게로, 그녀는 자신이 삶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삶으로부터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았고, 박탈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P.255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두 사람은 한 파티장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기억할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루실"의 감정 변화도 좋았지만, "샤를"의 순애보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자기 여자친구가 바람이 났는데도 이해해주는 태도를 대인배적이라 해야할지 바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과연 저런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아마 "사강" 자신이 그리던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언제나 나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누구나 꿈꾸니까.


"사강"의 소설을 읽으면 배경은 호화롭고 재벌이 등장하며 잘생긴 젊은 남자가 나온다. 어떻게 보면 <패배의 신호>도 그녀가 꿈꾸던, 아니면 그녀가 경험했던 로멘틱 (판타지)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뭔가 위화감이 들고, 상황이 이해가 안가지만 그래도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공감이 가는건 "사강"이 그만큼 글을 잘 쓰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인과 함께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아마 이 책이 답을 줄 것이다. 인간은 대부분 아니 모두 고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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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8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9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아 2021-12-28 21:3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 샤를이 앙트완과 다투면서 난처해진 루실에게 다가와 ˝그걸 엉거주춤한 왈츠라고 부르는 거요˝라는 대목에서 엄청 울었어요. 와~새파랑님 리뷰읽고 구매율이 껑충 뛸듯 합니다!🤭

새파랑 2021-12-29 00:17   좋아요 5 | URL
구매율은 미미님 리뷰 때문에 오르겠죠? 😆 잘쓰고 싶었는데 시간의 압박 때문에 잘 못썼어요 ㅋ 사강은 글을 너무 잘 쓰는것 같아요 ^^

페넬로페 2021-12-28 22:2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관계와 사랑의 감정이라는게 복잡미묘하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 그런건데~~
미미님의 눈물샘도 자극한 책이고 오랜만에 감정의 자극도 받고 싶어 이 책 읽어야겠어요~~
내년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새파랑 2021-12-29 00:20   좋아요 5 | URL
아직 올해가 조금 남았는데 😆 읽는 재미가 확실히 있는 작품이었어요. 뒷목을 잡을 수도 있지만~! 사강 특유의 섬세한 감정 표현이 너무 좋았어요 ^^

희선 2021-12-29 01: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이 쓰신 글을 보고 사강 소설이 어떤지 알게 되기도 하네요 어쩐지 거의 삼각관계가 나오는 것 같은...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혼자여도 괜찮아야 둘이 있어도 괜찮을 텐데 싶습니다


희선

새파랑 2021-12-29 08:31   좋아요 4 | URL
사강 소설 보면 거의 삼각에 사각(?)관계가 나오긴 하죠ㅋ 사실 그런 관계가 아니라면 사랑 이야기를 쓰긴 어렵기 때문에 당연한것 같기도 하고 🤔

mini74 2021-12-29 08: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감정도 계절처럼 저물어 가는군요. 봄엔 또 다른 사랑이 오는건가요. 떠나간 사랑이 돌아오는걸까요 ~ 새파랑님 글 마음에 팍! 하고 들어오네요. ㅠㅠ

새파랑 2021-12-29 08:32   좋아요 5 | URL
사랑이 언제나 여름처럼 뜨겁기만 하다면 힘들어 죽지 않을까요? ^^ 그래서 계절이란게 있나 봅니다~!!

mini74 2021-12-29 08:43   좋아요 4 | URL
ㅎㅎㅎ 타죽어도 좋으니 다음 생애엔 저도 ㅠㅠ

새파랑 2021-12-29 08:56   좋아요 4 | URL
제가 봤을때는 미니님 언제나 열정(?)이 가득하신거 같던데요 ^^

그레이스 2021-12-29 14: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강을 읽어가시는 새파랑님의 사랑이 궁금합니다.^^

새파랑 2021-12-29 15:05   좋아요 4 | URL
제 사랑(?) 이야기는 좀 너무 다양(?)해서 어떻게 설명할수가 없네요 😅 전 사랑 이야기를 선호하는거 같아요 ^^

페넬로페 2021-12-29 16:54   좋아요 4 | URL
새파랑님!
다양한 사랑 얘기 듣고 싶어요^^
얘기해 주세요~~

새파랑 2021-12-29 17:18   좋아요 3 | URL
😅 제가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번 써보겠습니다 ^^ 페넬로페님의 이야기가 더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