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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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치는 마라맛 전개에 나는 그저 휩쓸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 너무 재밌게 읽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처지에 몰입하여 극강의 답답함과 빡침(?)을 겪으면서도 책장을 넘기는 걸 멈출 수 없었고, 그렇게 이 작품은 내게 하루만에 다 읽은 책이 되었다. 원래 막장 드라마도 욕하면서 보게 되는 매력이 있지 않은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도 딱 그런 느낌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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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티타’는 세 자매 중 막내로, 가문의 전통에 따라 ‘막내딸’로서 평생 결혼도 못하고 어머니를 돌봐야하는 의무를 떠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티타는 ‘페드로’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어머니 ‘마마 엘레나’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결혼이 성사되진 못하였다. 페드로는 그럼에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곁에 평생 있고 싶은 마음 하나로 티타의 언니인 ‘로사우라’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티타는 큰 상처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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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집안에 같이 살다 보면 저절로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나 눈이 맞게 되는 법, 마마 엘레나는 티타와 페드로의 사이가 깊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탓에 페드로와 로사우라를 멀리 미국으로 이주시켜버린다. 이로 인해 티타는 또 한 번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어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데, 이를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 ‘존 브라운’ 박사와 눈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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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에게 있어서 페드로와의 사랑은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성질의 것이었다면 브라운과의 사랑은 정신적인 안정을 얻게 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랑이었다.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란 둘 중 어떤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진 도중 ‘마마 엘레나’가 죽게 되어 티타는 그 말도 안되는 전통의 억압에서 벗어나 결혼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소식을 들은 페드로와 로사우라 부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며 본격적인 파국의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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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리뷰를 적을 때 작품의 줄거리를 줄이거나 아예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이 작품은 (결말을 포함하지 않은) 내용 요약에 세 문단을 할애할 정도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큰 재미를 주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색다른 재미를 내게 선사했다.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점은 소설 속 인물이 겪는 심리를 음식에 빗대어 표현한 부분들이 되게 생생하게 느껴졌던 부분이다.

🗣 냄비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김과 티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한데 뒤섞였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는 빵 반죽의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랐다. 마치 조그만 그릇에 담긴 이스트가 그릇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처럼, (후략)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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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바로마술적 사실주의적인 표현 방식이 사용된 것이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어렵게 하는 점이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의 서술이라 하는데,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엄청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정도로) 곳곳에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들이 현실성과는 거리가 , 환상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나 작품 내용과 어우러져 오히려 극에 대한 독자의 몰입을 한층 끌어올렸던 같다. 분량 부분을 따로 적지는 못하겠으나 어찌되었든 너무 재밌게 읽었다는 말만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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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 개정판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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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은 주인공 ‘안진진’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을 ‘안진진’의 시점으로 바라보듯 전개되는 작품으로, 이 작품 안에는 안진진의 사랑 이야기도 담겨있고,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비롯한 서사도 쓰여있다. 많은 이야기들이 한 작품 안에 공존하고 있으나 전혀 난잡하거나 산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삶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리고 그들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하여 읽을 수 있었고, 그러므로 읽는 내내 황홀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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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이라는 단어는 어찌 보면 아주 추상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추상성을 한 편의 서사로 구체화시켜 독자들에게 달콤씁쓸한 공감과 여운을 선사한다. 사실 인간은 그야말로 ‘모순’적인 동물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사고만을 좇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행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양극단의 사고와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인간이고, 또 그런 모순성이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을 읽으면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에서 그런 모순적인 부분들을 자주 엿볼 수 있는데,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기에 오히려 공감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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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줄평으로 ‘결혼하면 다시 읽고 싶은 책’이라고 한 것은, <모순>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를 읽으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던 물음표였는데, <모순>을 읽으면서 그 답을 조금은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그 물음표가 더 커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때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고 한 것이다. 지금은 아직 이십대 중반이라는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 결혼할 때쯤 되면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져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자에게는 스스럼없이 누추한 현실을 보일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는 그 일이 쉽지 않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2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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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가장 주된 서사 중 하나가 ‘안진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앞선 문단에서 사랑에 관한 감상을 적은 것이고, 이 작품에는 사랑 말고도 가슴에 크게 와닿는 문장들이 정말 많았다. 이런 감각을 느낀 것은 조해진 작가님의 <단순한 진심>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그 문장들을 조금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너무도 훌륭한 수작에 나의 감상이 오히려 누가 될까 겁이 난다. 그냥 아묻따(?) 모두가 이 책을 꼭 읽기를 바란다.) 

🗣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27p)

🗣 “낯설어 죽겠단 말야. 왜 그렇지? 장우씨는 알아? 갑자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무서워.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구요. 사랑하면 이렇게 세상이 낯선거냐고…….” (202p)

🗣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217p)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건은 언제나 돌발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일이 현실로 드러날 줄은 알았지만, 그 일이 ‘오늘이나 내일’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예감 속에 오늘이나 내일은 없다. 오직 ‘언젠가’만 있을 뿐이다. 매일매일이 오늘이거나 혹은 내일인데. (2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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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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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 때가 되면 연례적으로 알라딘 중고서점을 방문하곤 하는데(명절 연휴 때마다 할인 행사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올해 설 연휴의 방문 때 발견했다. 책을 펼쳐보니 ‘녹색 갈증’이라는 제목이 특정 단편소설의 제목이 아니라 이 책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제목이라는 걸 확인하고선 궁금증이 일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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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음과모음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트리플’ 시리즈 중에서는 아마도 유일하게 세 편이 아닌 네 편의 소설이 수록된 소설집, 더불어 독립적인 단편들의 모음집이 아닌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연작 소설집이 바로 이번에 읽은 <녹색 갈증>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여타 단편집과는 달리 호흡이 조금 긴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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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호흡이 긴 편이라는 것은 꼭 좋다고만, 혹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호흡이 짧아서 장면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호흡이 긴 작품들을 선호하는 편이다. 짧은 호흡으로 전개되는 소설들은 뭐랄까, 조금은 정신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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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녹색 갈증>에 대해선 호흡이 길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조금 산만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나의 명확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전개여서 그런 듯하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이 얘기 했다가 저 얘기 했다가…’ 하는 듯한 느낌… 개인적으로 그다지 선호하는 소설의 전개방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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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집이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아쉬운 점은 앞서 말한산만한 전개말고도공감되지 않는 인물들의 심리등등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없진 않다. 하지만 책의 여운이 짙게 남는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은 부분이다. 이유가 무엇인지는모르겠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명쾌하게 답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작품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인물들의 답답한 상황에 몰입이 되었기 때문일까, 어딘가 무의식 한켠의 내밀한 감정을 건드리는 작가님의 문체 때문일까. 이에 대한 답은 <녹색 갈증> 읽은 다른 사람들과 감상을 공유하면서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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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교육 민음의 시 260
송승언 지음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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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대체적으로 ‘데모’와 관련한 시들이 많은 것 같다. 직접적으로 ‘데모’를 언급하는 시들도 있었고, 간접적으로 그 상황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시들도 있었다. 물론 전혀 관련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들 또한 데모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또 색다르게 해석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데모’라는 주제는 뭐랄까… 사람 마음을 참 무겁게 만든다. 데모에 직접 뛰어든 당사자의 처절한 마음도, 그런 당사자들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착잡한 마음도, 모두 다 이해되고 공감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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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하러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에서는 잠깐 졸았다. 덜 깬 채 버스 밖으로 쏟아지듯이 나와 사람들을 따라다녔다. 너무 앞으로 가면 뒤로 가고 너무 뒤로 가면 앞으로 갔다.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치면 나도 뭐라고 중얼거렸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듯이 죽어도 죽은 것 같지가 않다. 그건 아직 살아있을 때 느꼈던 감각. 누군가 내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고 나는 그것을 흔들고 다녔다. 나는 광장 너머 언덕 너머 교회 첨탑들을 보며 묘지같이 다정하다고 말했던 사람을 생각한다. 10년 전 데모하려 모인 자리에서 처음 본 사람. 다시는 못 본 사람. 이제 나는 공원으로 가거나 공장으로 가겠지. 그리고 가겠지. 화도 눈물도 안 나는 상황 속에서 하늘에 흩날리는 풍선들이나 보고 있겠지. 방독면 쓰겠지. 버스 타러 가겠지. 잠깐 졸겠지. 꿈도 꾸겠지. 돌아올 수 없는.


 - <커대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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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과 연의 구분이 일절 없는 ‘산문시’가 좋았던 적인 이 시가 처음인 듯하다. 산문시는 읽을 때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커대버>라는 시는 그렇지 않았다. 이 시의 제목인 ‘커대버’는 ‘시체’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커대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읽을 때에는 그저 데모하러 가는 사람의 흔들리면서도 결연한 다짐을 쓴 시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커대버의 뜻을 찾고 난 뒤 다시 이 시를 읽으니, 마지막 구절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돌아올 수 없’다는 말이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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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파괴된 동상

모두 사랑했던 동상


사랑하던 사람들 다 가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 다 가고 그 후손들 다 가는 이후에도


반쯤 파괴된 채 남은 동상

아주 파괴되지는 못한 동상

동상에게 동상의 외로움 있겠지

동상에게 동상의 슬픔 있겠지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동상

그러나 핏자국 눈물 자국은 있는 동상


이전을 아는 사람들이 만든 이전은 모르는 동상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이전을 가르쳐주는 동상

이제 가르칠 사람이 없는 동상

친절한 동상 슬픈 동상


없는 시간을 사는 동상

아닌 시간을 사는 동상


있어 볼 만큼 있어 본 동상

슬슬 없어도 되겠지만 없어질 수 없는 동상


사라진 누군가를 모델로 한 누군가의 모델인 동상

누군가가 잊힌 뒤에도 잊힌 누군가의 모델인 동상


그런 동상이 나 본다

반쯤만 인간인


 - <반쯤 인간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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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데모’의 상황을 대입하기 전과 후의 감상이 달랐던 바로 그 시다. 시 자체로만 보았을 때는 그저 동상에 대한 색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만 생각했다. ‘피도 눈물도 없’지만 ‘핏자국 눈물 자국은 있’다는 표현과,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이전을 가르쳐주는 동상’이란 표현에 놀랐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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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보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된다. 시적 화자인 ‘나’도 실은 ‘반쯤만 인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제목까지 더하여 생각해보면 시적 화자도 ‘동상’이었던 것이다. 즉, 이 시는 한 동상이 다른 동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적은 듯한 시였고, 나는 그렇게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두 동상이 세워지게 된 계기가 어쩌면 ‘데모’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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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창비시선 446
안희연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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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수천의 심장을 따로 모아 기도를 올린 적도 있지요

다음 생엔 부디 너 자신으로 태어나지 말아라

내가 주는 것이 안식이라는 믿음

시간은 무자비하게 나를 단련시켰고


어쩌면 자비였을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영혼이라는 말은 믿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꿈속에선 심해를 헤엄치게 될까요

머리를 내려칠 때마다, 심박수가 파도를 만들어낸다는 목소리가

꼬리를 내려칠 때마다,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라는 목소리가

멈추질 않고


손에선 비린내가 가시지 않습니다

어떤 물을 마셔도 바닷물을 받아 마신 듯 입이 쓰고 갈증이 납니다


아침저녁으로 피를 씻어내는 일이 나의 묵상입니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씻기지 않는 것들이 끝내 나이겠지요


지금껏 나는 수없이 나를 죽이고

토막난 자신을 마주해왔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생선 장수의 노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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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과 회를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시였다. 그리고 무수한 생선을 죽여야 하는 생선 장수의 죄책감과, 시간이 쌓이면서 그 마음이 옅어지는 데에 다시금 느껴지는 생선 장수의 죄책감이 너무도 슬펐던 시이기도 했다. 특히 ‘시간은 무자비하게 나를 단련시켰고’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생선을 죽이는 그 무거운 마음이 점차 옅어지는 과정을 ‘시간’이 ‘나를 단련시’킨다고 표현함과 동시에, 그 마음이 옅어질지언정 행위 자체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기에 중간에 ‘무자비’하다는 표현을 넣은 것이 놀라웠다. 이게 시인의 표현이구나 싶게 만드는… 압도당하게 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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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은 녹기 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을 무심히 뱉었다

녹기 위해 태어났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녹고 있는 얼음 앞에서

또박또박 섬뜩함을 말했다는 것

굳기 위해 태어난 밀랍초와

구겨지기 위해 태어난 은박지에 대해서도


그러려고 태어난 영혼은 없다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밟혀 죽은

흰쥐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흰쥐, 한마리 흰쥐의 가여움

흰쥐, 열마리 흰쥐의 징그러움

흰쥐, 수백 마리 흰쥐의 당연함


질문도 없이 마땅해진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라고

어른이 된다는 건 폭격 속에서도

꿋꿋이 식탁을 차릴 줄 아는 거라고


무엇이 만든 흰쥐인 줄도 모르고

다짐하고 안도하는 뒤통수에게


넌 죽기 위해 태어났어

쓰러뜨리기 위해 태어난 공이 날아든다

당연한 말이니까 아파할 수 없어

불길해지기 위해 태어난 까마귀들이

전신주인 줄 알고 어깨 위에 줄지어 앉기 시작한다


 - <표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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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과학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영재 교육이랍시고 과학 실험들을 이것저것 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내가 뼛속까지 문과인 걸 보면 아무 의미 없는 듯하다.) 거기서 했던 여러 실험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뭐니뭐니 해도 ‘생쥐 해부 실험’이었다. 비위가 약한 편은 아니라 학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곧잘 해부하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서 뽈뽈 움직이던 쥐들을 투명한 상자에 가둬놓고 마취 약을 풀어서 실시간으로 잠재우던 그 모습은 아직도 생생히 (영상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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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이 시를 읽으면서 속으로 많이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해부했던 쥐도 시에서 나오는 ‘흰쥐’였는데, 걔네도 엄연한 한 생명이었고 해부실험에 쓰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었을텐데… 비단 흰쥐 뿐만이 아니라 ‘그러려고 태어난’ 존재는 없다고 말하는 이 시가, 특히 팩트 폭행 수준으로 직설적으로 내리꽂는 몇 구절들이 너무도 아프면서도 무겁게 느껴졌다. ‘흰쥐가 산처럼 쌓여 있는 방에서 / 밥도 먹고 잠도 잘 수 있게 된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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