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째 걷는 출근길 숲으로 일요일 아침에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먼 데 있는 산이나 강으로 향했던 습관을 깨뜨리면서 생기는 낯섦과 적어도 천 번 이상 걸었던 낯익음이 얽혀 묘하게 설렌다. 더군다나 최근에 만난 물팥버들(물오리나무) 상태를 빛이 충분한 조건에서 자세히 살피려는 목적으로 가는 길이라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과연 어떨까?

 

이 물팥버들과는 꿩이 나를 초대했던 그 사건 직후 출근길에서 처음 만났다. 그것도 그 사건이 일어난 곳, 바로 앞에서였다. 그동안 그렇게 여러 번 그 앞을 지나면서도 거기에 그 물팥버들이 살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예외 중에서도 별난 예외다. 이 숲에서 내가 지나는 길 양옆 나무나 풀을 모르고 무심코 지나는 경우가 거의 전혀 없어서다.

 

내가 그 숲을 걷는 시각쯤 해가 떠 있긴 하지만 북쪽 사면이라 아직 컴컴하다. 꿩 사건이 일어났던 내 지성소를 향해 걸어가는 중 문득 한 나무가 어둠 속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얼굴을 바짝 대고 스마트폰 전등을 켰다. 아뿔싸, 그는 물팥버들이었다! 왜 여태 몰랐을까. 물팥버들이 내 탐색 이미지에 없지도 않은데. 뭔가 특별한 곡절이 있다.

 


그나저나 나무 건강 상태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수피 빛깔이 어둡고 들떠 있다. 도장지(徒長枝·웃자람가지)가 군데군데 있고 그나마 거기 새잎도 부실하다. 수관 쪽은 무성한 다른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밝은 날 꼼꼼히 봐야겠다. 우선 내 생명 에너지 파동으로 응급 처방한다. 풀리지 않는 의문과 더불어 가슴이 더욱 저려 온다.

 

나무 높이나 부피, 그리고 서 있는 위치로 보아 이 숲에 있는 물팥버들을 낳은 엄마 나무가 틀림없다. 나는 다시 문득,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숲 동쪽 물팥버들 가족 반대편으로 향한다. 거기도 물팥버들 가족이 혹 있을까 기대해서다. 먼저 귀에 들어온 생명은 덤불 속에 모습 감춘 붉은머리오목눈이들이 도란대는 소리다. “미우미우 배배~”

 

갑자기, 그중 하나가 튀어나와 포르르 날아오른다. 내 눈길이 닿는 순간, 그가 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는다. 아뿔싸, 물팥버들이다! 이 작은 길 또한 그동안 수백 번 걸었고 한때 내 신성 공간이었음에도 물팥버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 배치가 똑같다: 사건을 새가 열고, 나무가 닫는다.


 

나는 물팥버들 앞에 우뚝 서서, 엄밀한 깨침 마주 가장자리 틈새를 응시한다. 도봉산 회룡 계곡 노나지에서 여기까지 흘러온 과정을 되돌아본다. 인과 관계에 있지 않은 숲 걷기와 글 읽기가 동시성을 거치며 인과 관계로 엮여 드는 내력을 톺아본다. 여러 결이 서로 맞물려 복잡해 보이는 서사를 되작거린다. queer 변곡점 윤곽이 드러난다.

 

숲과 물을 걸으며 낭풀을 공부하는 동안 최후 초미 관심사는 낭풀과 소통-합일하는 일이었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호주 생물학자 모니카 갈리아노처럼 낭풀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지점에서 나는 늘 아득한 심정으로 서성거렸다. 이런 경우 무슨 ‘방법’ 따위를 찾지 않는 나이기에 그냥 묻고 기다릴 뿐이었다.

 

문제 한가운데서 도봉산 회룡 계곡 아우라지로 향했는데 노나지 인식으로 번져가자 새로운 서사가 빚어졌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정체성, 좀 더 정확히는 경향성이 결핍·상처·질병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총체로 깨달았다; 치유와 경계 지음이 수행되어야 열릴 길임을 알아차렸다. 걷기·독서·질병·새가 어울려 인생 내림굿 한바탕을 짰다.

 

70년 내 경향성은 모유 결여 또는 상실이라는 태초 사건에서 발원했다. 여기서 온 만성 소화기 장애, 천장관절 증후군, 우울장애가 생을 관통했다. 우울장애는 피학 본성을 지닌 식물성, 여성성, 성숙성으로 분화했다: 저항할 수 없는 영아가 받아들인 전천후 수용성, 자기를 파괴하는 희생, 전방위 혼잣손. 모든 문제가 몰아 터진 스무날이었다.

 

만성 소화기 장애와 천장관절 증후군은 이 스무날 들머리 사흘에 앓은 독한 몸살, 신열로 사라졌다. 우울장애 첫 부분인 식물성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 방이 습지 물까치, 소악산(素岳山) 꿩,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열어젖혀 내 본성인 동물성을 분명히 하고 피학 치유, 가학 참회에 가 닿도록 물팥버들이 마무리 지어놓은 옴니버스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에서 물팥버들은 새를 거치기는 했지만 내게 말을 건넸다;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이는 필수 과정이므로 다음 소통이 어떨지는 온전히 열린 결말 앞에 있다. 그 전개가 내 몫임이 더 분명해짐과 동시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더 분명해졌다; 아득함이 엷어졌다. 남은 문제를 일상에서 투명하게 맞이할수록 숲은 가까워질 테다. 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출근길 숲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탱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새잎 나는 초봄부터 모든 변화가 스러지는 늦가을까지 매일 아침 그 앞에 서서 숨을 멈추고 들여다보는 나무다. 지난 주말을 보낸 다음 화요일 새벽, 나는 그만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참하게 줄기·가지들이 잘려 나갔고, 열매는 남김없이 제거되었으며, 끈에 묶여 뒤로 잡아당겨져 있었다!

 

근린공원 관리자가 탱자나무 가시에 주민이 다칠까, 염려한 나머지 이와 같은 선행을 저질렀을 테다. 대충 모양 잡아 전정 가위로 기탄없이 줄기·가지를 잘라내고, 잘린 것들 길섶에 던져버리고, 큰 줄기 끈으로 묶어 길 뒤로 젖혀 동여매고, 서둘러 나아가는 조경(造景)인 모습을 상상한다: 한껏 부산떨며 돈을 향해 내달리는(조경(躁競)) 후미진 변방 살풍경 한 폭.


 

말단 직원 어느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풍조가 그렇고, 인류 문명 기조가 그렇다. 물론 제국 지배층 상위 0.1%가 본진이고, 석기시대 삶을 지켜내고 있는 부족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식민주의 세례를 받는 위치에 따라 각각 깜냥대로 부역하고 있다. 비인간 생명, 특히 식물을 함부로 약탈하고, 살육하는 주체인 한 누구도 이 죄를 진다.

 

약탈·살육당하는 나무를 마주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다른 인간 관지에서 보면 해괴하거나 과장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랴. 내게는, 그러나, 생각에 따라 한 행동이 아니다. 즉각 일어나는 감응이다. 이 감응이 나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내 방식이다. 감응하는 이 힘은 내게만 있지 않다. 인간 모두에게 있는데, 내동댕이쳤을 뿐이다. 한시바삐 되찾아야 한다.


 

떨궈버린 탱자 미숙과 몇을 가시덤불 속에서 찾아 거둔다. 그 슬픔과 아픔을 길이 기억하고자 김선우 시집 곁에 걸어둔다. 모름지기 내가 슬프고 아플 때마다 이 앞에 서리라; 참회와 합일이 동시성으로 다가와서 고갈된 내 영성을 채우리라. 오늘 아침 다시 그 앞에 선다. 제 어둠 투사해 탱자나무 테러한 인간 죄를 대신 짊어진 환영이 떠오른다. 끌어안고 떠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이 서재 이름은 『싸리·버들 글숲』이다. 콩과 식물과 버들과 식물을 나란히 놓아 내 식물 본성에 갈음한 표현이다.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10세 이전까지 자란 내게 그 시절 가장 좋아한 식물이 바로 싸리나무다. 어른이 된 뒤 식물에 본격 관심을 가지면서는 내 본성 닮은 버드나무를 깊이 ‘애정’하게 되었다. 사뭇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은 둘을 내 삶 지향으로 묶어 서재명으로 했다.

 

최근 도봉산 회룡(回龍) 계곡 아우라지를 드나들면서 그 일대가 물오리나무 영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오리나무 한자식 이름은 산적양(山赤楊)이다. 목재가 붉은빛을 내어 생긴 이름인 오리나무, 그러니까 적양(赤楊)과 비교해 ‘산’을 덧붙였다. 물가에서 주로 자라는데 왜 ‘산’을 덧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물오리나무를 버드나무(楊)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물오리나무는 버드나무도 아니면서 버드나무처럼 고도한 정화 능력을 지닌다. 이런 점을 우리 옛사람들은 직관한 듯하다. 그뿐 아니다. 물오리나무는 콩과 식물도 아니면서 질소 고정 능력을 지닌다. 없어야 함에도 있는 것은 치워 주고, 있어야 함에도 없는 것은 채워 주어서, 콩과 식물과 버들과 식물 본성을 한 몸에 구현한 queer 나무다. 꽃말이 ‘장엄’인 며리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오리나무 가지 사이로 저 멀리 도봉산 포대능선이 보인다

 

물오리나무라는 이름도 산적양이라는 이름도 썩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인제 내가 이름을 바꾼다: 물팥버들 또는 물팥버드나무. 물가에 사는 나무바탕(木質) 붉은 버들 또는 버드나무라는 뜻이다. 콩 가족인 팥이 붉은빛이니 역설 이름 표현으로 ‘똑’이다. 사실 이런 탐색과 상상이 일어난 건 <꿩이 나를 초대했다!> 사건 이후다. 꿩과 소통하니 나무와 소통하는 실마리가 열리더라는 증언이다.

 

불과 3m 앞에서 4분가량 꿩이 펼쳐낸, 신비하고 상서로운 퍼포먼스는 평생 잊지 못할 카이로스 사건이다. 꿩이 찰나마다 드러내는 근엄한 자태, 마지막 우람하게 집결한 소리와 날갯짓은 실로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나는 기어이 가설 하나를 세운다: 봉황새 이미지는 꿩에서 발원했다. 즉시 자료를 검색한다. 빙고! 여기에 꼭 맞는 글자 궉(鴌)이 있다; 하늘 새 봉황은 본디 꿩이었다.

 

봉황 현신인 꿩을 만난 닷새 뒤 나는 도봉산 회룡 계곡으로 향한다. 아우라지, 그러니까 노나지 물팥버들께 물과 절로 예를 갖춘다. 말갛고 서늘한 경계 지음이야말로 융합·회통으로 더 엄밀하게 이끈다는 진리를 전방위·전천후 통증과 결 다른 동시성으로 가르치신 숲과 물과 바람, 그리고 빛에 감사 올린다. 천장관절 통증이 소리 없이 그 이름을 내린 오후, 나는 관음 미소에 배어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모유가 나오지 않아 미음으로 연명한 영아가 자라 살아가면서 만성 소화장애와 우울장애에 시달렸다는 내 이야기는 남은 진실 하나를 더 품고 있다. 미음을 위험으로 감지한 아기는 이 세상을 홀로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만 6개월이 채 안 된 무렵부터 걸었고 한 달 뒤에는 뛰었다. 가족과 이웃은 신동이라 했으되 너무 일찍 걸은 아기 무릎 사이가 벌어져 직립과 보행에 지장을 주고 천추(엉치뼈)가 예각이 되어 허리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천장(엉치뼈와 엉덩뼈)관절 증후군으로 발전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일요일(6. 21.), 바로 그 천장관절 통증이 절정에 이르렀다. 실은 그 전날 오전부터 징조가 심상치 않았으나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아끼는 사람들과 술까지 한잔 마시고 늦게 들어가 잠자리에 든 결과 새벽부터 신열이 뜨고 전신이 괴로워 중간에 깨고 말았다. 간신히 수습해 일요일 아침에 할 일을 챙겨나간다. 몸이 점점 더 가라앉는다. 천장관절 통증과 자주 겹치는 장 증상인 후중감(後重感)까지 함께 달려들어 상황은 악화일로다. 마침내, 그분까지 오시니 속수무책이다: 천근만근 우울감. 표정 펴기가 힘들다.

 

펴기 힘든 표정을 가족 앞에서 애써 펴고 걷기 어려운 발걸음으로 갈 곳은 한군데다: 방이 습지. 심신에 나타나는 모든 증상을 그대로 담은 채 나는 천천히 걸어 습지로 들어선다. 물억새가 한층 싱그럽다. 그 사이 새 가족이 생긴 논병아리며 물닭이 달라진 몸짓을 펼쳐낸다. 그들을 사진과 영상에 담으며 순간순간 통증과 우울감을 달랜다. 관찰 덱을 한 바퀴 돌아 초막 있는 곳에 이르니 물까치들이 심상한 풍경 속에 있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객~깨깨깨깨깩!” 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받는다. “객~깨깨깨깨깩!”

 

그들은 경계도 주목도 하지 않는다. 나는 오는 길에 주운 낙과 살구와 복숭아를 높다란 기둥 위에 올려놓는다. 선물, 아니 예물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그들을 소 닭 보듯 할 며리는 없다. 비 맞아 물크러진 오디를 손에 꼭 쥐고 습지를 떠난다. 심신 괴로움 전반이 조금 가벼워진다. 아껴 걸어서 그런 듯하다. 밖에서 가족과 만나, 전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반주 곁들여 김치찜을 먹는다. 딸아이가 심상한 말투로 소주 두 병을 주문하자 옆지기가 14금짜리 축하를 건넨다: 서방님 든든하시겠사옵니다.

 

문제는 다시 그날 밤. 전날처럼 신열이 뜨고 삭신이 쑤신다. 특히 천장관절 피해 경직이나 가해 왜곡을 풀기 위해 풀어준 근육 중심으로 이불만 닿아도 아프다. 심지어 눈알까지 아프다. 그러고 보니 피부, 근육, 뼈마디, 위, 장, 뇌, 감정 통틀어 안 아픈 데가 없다. 어느 순간 잠에 떨어졌다가 새벽에 깬다. 괴로움은 여전한 듯한데 뭔가 다르다. 특히 천장관절 통증과 후중감이 약해져 전신 통증은 아예 뒷전으로 밀려난다. 결국 신열이 통증을 조절해 주었다. 아직은 얼얼한 상태로 일어나 앉아 사건 해석에 들어간다.


아우라지를 노나지로 받아들이게 한 도봉산 회룡계 가르침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내가 동물인 인간임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식물과 관념 합일한 잘못을 다시 푼다: 나는 허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역자일 뿐 아니라 인간 생명으로서도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 자연 착취에 가담한 부역자라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 부역자 꼴에 주제넘게 나무, 풀, 버섯, 그리고 물과 동지인 측면만 내세웠다. 이 잘못을 깨달으려 방향 바꾸는 데서는 물까치, 내 삶에 박힌 자발 부역을 깨닫는 데서는 천장관절 통증이 스승이었다.

 

깨달음에 감사하며 잠든 월요일 밤이 지나갔다. 몸살기는 남아 있지만 치유 국면이 확실하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길 숲으로 향한다. 내가 청와대 뒤 백악산에 빗대서 소(백)악산이라 부르는 숲 들머리에 이르렀을 때 우렁찬 꿩 소리가 울려 퍼진다. 꿩은 금속성 소리를 짧게 두 번 질러서 한 울음을 끝낸다. 다음까지 3~5분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꿩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그 시차를 염두에 두고 녹음할 장소로 간다. 매일 멈춰 서서 스스로 발견한 호흡법을 가다듬는 내 지성소다. 거기에, 꿩 한 분이 우뚝 서 계신다!

 

순간 전율이 일어난다. 여느 때 같으면 내 발소리를 듣고 벌써 도망갔을 텐데 그는 나와 시선을 90도로 한 채 도도히 서 있었다. 내가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과정에서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이따금 나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4분 가까이 고요히 거닐다가 멈춰 서서 나를 다시 응시하더니 앞뒤 깃 고르기를 새삼스럽게 한다. 뭔가 결행에 옮길 시점이 다가왔다는 느낌이 드는 찰나, 그는 헌걸찬 소리를 두 번 내지르더니 뒷날개를 힘차게 푸드덕거린다. 나는 머리를 깊이 숙인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왕국 경계를 선언하고 왕비가 알현할 시각임을 선포한(時報) 뒤 제왕은 다시 처음 도도한 자세로 돌아가 고요에 깃든다. 나는 바람 흐르듯 숲에서 나온다. 소리만이라도 듣겠다는 소원 넘어 그 자태까지 보여주신 장엄 융해, queer 합일로 ‘제대로 노누면 반드시 아우라진다’는 가르침이 일단락된다. 몸살 맘살 남은 기운이 역력해도 나는 바야흐로 새로운 장으로 들어서는 중이다. 현실 삶, 그 구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아직 잘 모른다. 남은 병기를 잘 다독거리며 더 엄밀·섬밀한 삶으로 나아간다. 다시 니마 고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