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근길 숲으로 들어가는 어귀에 탱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새잎 나는 초봄부터 모든 변화가 스러지는 늦가을까지 매일 아침 그 앞에 서서 숨을 멈추고 들여다보는 나무다. 지난 주말을 보낸 다음 화요일 새벽, 나는 그만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무참하게 줄기·가지들이 잘려 나갔고, 열매는 남김없이 제거되었으며, 끈에 묶여 뒤로 잡아당겨져 있었다!
근린공원 관리자가 탱자나무 가시에 주민이 다칠까, 염려한 나머지 이와 같은 선행을 저질렀을 테다. 대충 모양 잡아 전정 가위로 기탄없이 줄기·가지를 잘라내고, 잘린 것들 길섶에 던져버리고, 큰 줄기 끈으로 묶어 길 뒤로 젖혀 동여매고, 서둘러 나아가는 조경(造景)인 모습을 상상한다: 한껏 부산떨며 돈을 향해 내달리는(조경(躁競)) 후미진 변방 살풍경 한 폭.

말단 직원 어느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풍조가 그렇고, 인류 문명 기조가 그렇다. 물론 제국 지배층 상위 0.1%가 본진이고, 석기시대 삶을 지켜내고 있는 부족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식민주의 세례를 받는 위치에 따라 각각 깜냥대로 부역하고 있다. 비인간 생명, 특히 식물을 함부로 약탈하고, 살육하는 주체인 한 누구도 이 죄를 진다.
약탈·살육당하는 나무를 마주하고 눈물 흘리는 일이 다른 인간 관지에서 보면 해괴하거나 과장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랴. 내게는, 그러나, 생각에 따라 한 행동이 아니다. 즉각 일어나는 감응이다. 이 감응이 나무가 하는 말을 알아듣는 내 방식이다. 감응하는 이 힘은 내게만 있지 않다. 인간 모두에게 있는데, 내동댕이쳤을 뿐이다. 한시바삐 되찾아야 한다.

떨궈버린 탱자 미숙과 몇을 가시덤불 속에서 찾아 거둔다. 그 슬픔과 아픔을 길이 기억하고자 김선우 시집 곁에 걸어둔다. 모름지기 내가 슬프고 아플 때마다 이 앞에 서리라; 참회와 합일이 동시성으로 다가와서 고갈된 내 영성을 채우리라. 오늘 아침 다시 그 앞에 선다. 제 어둠 투사해 탱자나무 테러한 인간 죄를 대신 짊어진 환영이 떠오른다. 끌어안고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