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침 치과 치료를 두 주 쉬는 터라 일요일 오전 시간이 비어 있었지만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면서 오늘은 그냥 둘레길 걷지 말고 북한산을 넘어가 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가장 익숙하게 여기는 정릉 청수장 계곡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넘어가서 구파발이나 진관사 쪽에 닿으면 되겠다 막연히 그려보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산을 정복할 마음이 당최 없다. 백운대(836m)로 향하지 않고 문수봉(727m)을 향해 나아갔다. 문수라는 말은 붓다 열 제자 가운데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 이름이다. 오대산 월정사가 문수 성지라 내게는 아주 친근하다. 게다가 할머니께서 월정사 기도를 통해 나를 얻었다 믿으셨으므로 어렸을 때 똑똑깨나 했던 나를 은근히 문수사리와 겹쳐 보시곤 했다. 이 비인과적 인과 의념이 얼마 뒤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요인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북한산성 대성문을 지나 조금 오르자 드디어 문수봉이 나타났다. 문수봉은 저 귀여운 문수동자가 아니었다. 오금 저리게 하는 바위 봉우리였다. 둘레길 걸을 때와 똑같은 평상복과 운동화 차림인 내게는 그야말로 난코스였다. 한 발짝만 헛디디거나 중심을 잃으면 그대로 떨어져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미끄러운 화강암이 울멍줄멍 가파르게 하늘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올라갈수록 더 위협적이었지만 엉겁결에 이미 절반 이상 올라왔기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기다시피 더듬어 올라가 한숨 돌리는데 가슴은 더 세차게 콩닥거렸다.

 

사실 나는 중등도 이상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학령기 이전 어느 날 집 근처 거의 수직에 가까운 10m 가량 높이 언덕 위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몸 기억은 참 끈질기다. 더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서둘러 문수봉에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려가는 길마저 조금도 쉽지 않았다. 비록 쇠 난간이 설치돼 있긴 했지만 더 어질거리게 만드는 각도였다. 긴장하면서 힘을 준 탓인지 다리 근육에 심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게다가 점심을 굶은 터라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 와중에 사위를 더듬으며 버섯, 돌꽃, 이끼를 찾아 살피고 사진 찍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일을 위해 바위산에 일부러 오기라도 한 듯하니 제의가 맞다.

 

제의는 아직 클라이맥스에 이르지 않았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이라 쉬우려니 하고 가볍게 승가봉을 지나 비봉(560m) 앞에 다다랐다. 한눈에 봐도 문수봉 이상으로 위험한 바위덩어리들이 서로 엉겨 붙어 버티고 서 있었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꼭대기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얼마나 옹근 욕망이었기에 천 오백 년 전 이 바위 봉우리 끝에 비를 세워 놓았을까. 엉금거리며 기어 올라가 그 풍경을 보았다. 아연 초현실이었다. 초현실은 또 있었다. 내려가는 길이 달리 없고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야 한단다. 이런!

 

불현듯 아득함이 들이닥쳤다. 거의 같은 발걸음으로 각성 하나가 달려들었다. 문수사리가 날 불렀구나. 비록 낮은 바위 봉우리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포 앞에 나를 세웠구나. 옆 사람이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기로 나는 말했다. “됐다.” , 팔꿈치, 무릎이 바위에 긁혀서 난 상처를 문지르며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난치 기억을 쟁여 놓았던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자가 상담으로 치료하던 그 새벽,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됐다.”

 

이제는 정말 내려갈 일만 남았다. 진관사 쪽으로 난 능선에 이어 계곡을 따라갔다. 계곡이 봄 가뭄 참상을 전해주었다. 물이 거의 말랐다. 그나마 물 고인 곳에서는 사람들 모여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정치도 언론도 입을 닫으니 대중도 태평한 모양새다. 걷기와 넘기가 얼마나 다른지 모른 채 헤맨 나처럼 도로 매판 판이 된 우리 사회도 마구 헤매는 중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젊었을 때는 불교도가 아님에도 절에 가는 일을 제법 좋아했다. 필경 오대산 월정사 입구 간평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인연 덕이었으리라. 마흔 갓 넘어 용인에 있는 작은 절에서 한의대 가려고 공부하던 시절부터 절에 대한 인식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저지르는 한심한 짓거리가 절집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실 눈으로 보니 절집이 인간 탐욕을 덕지덕지 붙인 너절한 공간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뜨르르한 고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근에 자주 가본 조계종 총본산 서울 조계사는 그야말로 너절함의 끝판왕이었다. 숲 여정에서 거의 반드시 만나게 될 절을 내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원인이 됐다.

 

잠시 숨을 고를 양으로 지난 일요일에는 옹근 숲 걸음을 멈추고 예술의 전당 뒷산, 그러니까 우면산 일부를 가볍게 걸었다. 그래도 7~8km는 걸었으니 숲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취되는 모양이다. 대략 시간을 가늠하고 전에 없이 절로 향했다. 대성사. 절집을 둘러보니 예상한 대로였다. 용성 스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더욱 참담했다. 왜 절집을 이토록 함부로 날림으로 시멘트로 살풍경하게 짓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시를 조망하는 절집, 그 절집이 세워놓은 불상을 조망하는 나를 선형으로 배치하자 아연 허망해진다. 허망해진 눈으로 보니 올망졸망 모여 있는 미니 불상들조차 인간 탐욕의 도구처럼 느껴진다.


울퉁불퉁한 회색 하늘 같은 내 심사를 다독이며 절에서 내려온다. 대체 종교란 무엇일까? 왜 종교는 이런 살풍경을 그려낼까? 이런 종교는 미래에 어찌 될까? 불교뿐만 아니다. 개신교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다만 제삼자가 아니다. 내 사상의 기축은 원효고, 내 실천의 본진은 예수다. 내가 이 두 하등한 고등종교에 유난히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소이다. 나는 종교 굴레를 벗어던졌지만 여전히 내 벗들, 제자들, 이웃들은 여러 결로 거기 엮여 있다. 종교는 역동하는 부동 실재다. 우스워서 무서운 권력이다. 숲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아무쪼록 현실 혐오가 아니라 치유일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2-06-16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6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시성이 전체성을 향한 트인 소통 양식임을 알아차리고 좀 더 실제적인 접근을 하려고 이 책 주해 리뷰를 시작했다. 저자가 지닌 목적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이 작업이 어떤 직접적인 선물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저자 의도와 무관한 지점에서 나는 근본적 회심을 일으켰고 저자와 다른 방식으로 동시성에 접근해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나를 칼날 위에서 각성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

 

저자에게 미친 영향을 따지면, 적어도 이 책에서는 폴 브런튼이란 인물이 단연 압도적이다. 순수 내용으로 400쪽이 좀 안 되는 책에서 결론을 향해 가는 막바지 300쪽 이후에서만 17회나 그를 인용한다. 책의 맨 마지막도 그를 인용한 글로 장식할 정도다. 그 인용문 맨 마지막은 이렇다.

 

상상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스스로 불멸할 것이라고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불멸을 얻는다.(402)

 

유심론 지도자에게서 나온 결론이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주의를 기울인 지점은 이 말이 통속한 자기 계발 선동 문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본의 첨병 노릇을 하는 허다한 영적 지도자들과 폴 브런튼이, 그리고 그를 인용하는 빅터 맨스필드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르겠다. 심지어 불멸이라니. 브런튼과 브라만이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임이 틀림없다.

 

유심론이니 그렇다 친다. 폴 브런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깥 세계를 경험한다고 믿을 때, 실제로는 내면을 경험하는 것이다.(325) 물론 이 또한 유심론이니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따져보자.

 

문맥 전체를 보지 못해 오해 소지가 없지 않으나 적어도 이 문장만 보면 폴 브런튼은 내면을 통속한 의미에서 쓰고 있다. 바깥 세계와 분리되는 고유한 내면 말이다. 과연 그런 내면이 있을까?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없다. 본디 저들 유심론은 바깥 세계(물질)와 내면(마음)을 대비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자가 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혹 대비시킨다 하더라도 대비시키는 한, 바깥 세계 없는 내면은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때 바깥 세계와 이루는 경계가 바로 내면이다. 결국 바깥 세계를 경험한다고 믿을 때, 실제로는 내면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은 고매하고 심오한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말한다: 네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그렇다. 나는 그 경지 이르렀다고 하는 거인이 이 지경 된 난쟁이들 바꾸는 꼴을 본 적이 없다. 그 경지로 홀로 나아가지 않고 이 지경으로 더불어 배어드는 난쟁이들이 정녕 신이다. 이 난쟁이들이 꾸는 개꿈, 떠는 수다, 실룩이는 몸짓이 어우러져 동시성을 일으킨다.

 

동시성 공동체, 그 네트워킹은 실로 다양한 난쟁이들로 왁자하다. 유색인종, 여성, 아동, 성 소수자, 장애인, 빈자, 난민, 수드라·바이샤·언터처블, 조센징, 연변족, 절라디언, 빨갱이, 독립운동가 후손, 4·16 아이들, 제주도 원주민, ‘개돼지’, 반려동물, 식용동물, 북극곰, 아마존 숲, ‘얼굴 없는식용식물, 잡초, 돌꽃(지의류), 곰팡이, (조류),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빅터 맨스필드가 말하는 진정한 Soul-making은 바로 이 난쟁이들 냄새 가득한 낮고 후미진 몸-맘에서 일어나는 시시한사건이다.

 

나는 이 시시한 사건을 내 영적 삶 처음 꽃으로 피워내련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단지 지적 이해만으로는 심오한 영적 진리를 구현하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 우리 본성이 완전히 변화하는 데는 평생에 걸친 철학적 연구와 명상, 수행이 필요하다. 나는 해방, 성불, 또는 견성이라는 말을 서로 바꿔 쓰거니와, 이 상태는 영적 거인들이 다다른 흔치 않은 성취다. 고맙게도 그들은 고군분투하는 난쟁이인 우리에게 사다리를 내려준다.(396)


강력한 동시성 경험조차 과장될 수 있다. 작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세계가 내 유익과 교육을 위해 의미 있게 자기 배열한다면, 나는 선택받은 매우 앞선 사람이 틀림없다.......

  거의 동일한 문제가 영적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기망상 대가이기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는 늘 철학적 규율과 유능한 안내자가 필요하다.(399)

 

왜 인간은 평생에 걸친 철학적 연구와 명상, 수행으로 그것도 거인이 내려주는 사다리에 힘입어 심오한 영적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가? 왜 진리는 그토록 멀리 있는가? 왜 인간은 절대다수가 고군분투하는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가? 난쟁이 주제에 재수 좋게 동시성 경험을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지 왜 과장하는가? 영성을 추구하면서 왜 자기망상 대가인가?

 

이 의문과 관련해 저자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영적 진리 과잉 숭배 문제인지 인간 능력 과잉 폄하 문제인지, 독자가 나서서 따져볼 일이다. 전에 함께 읽었던 책 가운데 귀중한 참조 지점을 제공해주는 둘이 있다: 스티브 테일러 자아폭발-타락-(2019.01.05.~03.30.), 그리고 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2018.06.09.~09.06.)

 

<13. 고매와 심오를 거절함>에서 우리는 이미 이른바 영적 진리 담론이, 있지도 않은 세계 바깥으로 나가버린 정신 기획임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주장하는 영적 진리는 공생 네트워킹으로서 고매와 심오를 단호히 거절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 뒤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생 네트워킹 내용 이야기가 필수다. 대체 그 네트워킹은 뭐란 말인가?

 

네트워킹, 이제 여기부터 혁명이다. 혁명은 관념 인간이 말하는 비범한 초월이 아니라, 평범한 네트워킹이 창발하는 일이다. 문제는 창발의 기원이나 중심에 인간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인간이, 특히 잘나가는 인간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가령 유심론을 전개할 때, 다른 존재에게는 심이 없다고 전제하는 실패가 대표적이며 핵심적인 실패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고문당하는 생쥐처럼 고통당한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고통당한다. 왜냐하면 쥐와 달리 육체적 고통에 심리적 고뇌를 더하기 때문이다.(391아무리 천체물리학 전공이라 하더라도 생물학에 이렇게 무지를 드러내는 일은 인간중심주의 철학과 영성에 함몰돼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피할 길이 없다. 어떻게 쥐가 다만 물질이란 말인가.

 

물질인 쥐로 하는 인간 정신질환 생체 실험이 가능한 이유가 그 물질에게 인간이 정신을 창조해주기 때문이 아닌 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울증에 빠진 쥐의 장에 Mycobacterium vaccae를 넣어 세로토닌 생성을 유도한다. 쥐가 물질이면 Mycobacterium vaccae는 더욱 다만 물질이다. 그 다만 물질은 어떻게 건강한 인간 정신을 만드는가.

 

그보다 더 궁금한 일은 그 다만 물질이 어떻게 인간 장 속에서 세로토닌을 생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바이러스는 또 얼마나 더 다만 물질인가. 오늘날 바이러스는 생명 세계 헌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물질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말인데, 그럼 이 유물론이 말이 되지 않아 유심론으로 갔단 말인가, 인간 뺀 모든 마음 빛 띠를 깡그리 없애고?

 

좋다. 인간에게만 마음이 있다 치자. 그 마음이 과연 인간, 그러니까 humanbiont의 마음인가? 무슨. 인간 마음 자체가 공생 네트워킹 창발 과정이자 그 결과가 순환하는 운동이다. 물론 공생의 또 다른 주체는 인간이 물질이라 거침없이 말하는 미소 생명이다. 그 미소 생명이 무의식의 본진이며, 그 본진이 네트워킹을 지휘한다: 신의 나라, 영의 정치다.

 

신의 나라, 영의 정치가 서서히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일은 인간 뇌, 문명, 진보가 음성 되먹임 구조를 이탈하면서부터다.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자아 폭발),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라고 규정한다. 발달론 유비든 진화적 윤리학이든 신성한 경제학이든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는지, 성숙한 복귀에 얼마나 큰 대가가 따르는지 통렬히 지적한다.

 

이 논의를 누락시킨 맨스필드 유심론 초월은 역사, 공동체, 평범이라는 중대한 축을 놓쳤다. 영적 진리가 개인 수행에 볼모 잡힘으로써 영적 거인의 사다리 근처에조차 가지 못하는 난쟁이들은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잔같은 존재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동시성 사건이 비인과로 다가오더라도 의미로 연결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만다.

 

분명히 해야 한다. 진정한 초월은 명상이나 요가를 통해 관념적 대극 합일에 이르는 유심론적 환각이 아니다; 평범한 생명이 작디작은 생명에 깃들어 공생함으로써 더불어 번져가는 네트워킹이다. 마음은 몸으로 발현하고, 몸은 마음으로 녹아 흐른다. 둘이 답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가 답이라는 생각은 아이 생각이다. 영의 역사는 어른이 되어가는 제의 과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