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치과 치료를 두 주 쉬는 터라 일요일 오전 시간이 비어 있었지만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면서 오늘은 그냥 둘레길 걷지 말고 북한산을 넘어가 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가장 익숙하게 여기는 정릉 청수장 계곡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넘어가서 구파발이나 진관사 쪽에 닿으면 되겠다 막연히 그려보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산을 정복할 마음이 당최 없다. 백운대(836m)로 향하지 않고 문수봉(727m)을 향해 나아갔다. 문수라는 말은 붓다 열 제자 가운데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 이름이다. 오대산 월정사가 문수 성지라 내게는 아주 친근하다. 게다가 할머니께서 월정사 기도를 통해 나를 얻었다 믿으셨으므로 어렸을 때 똑똑깨나 했던 나를 은근히 문수사리와 겹쳐 보시곤 했다. 이 비인과적 인과 의념이 얼마 뒤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하는 요인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북한산성 대성문을 지나 조금 오르자 드디어 문수봉이 나타났다. 문수봉은 저 귀여운 문수동자가 아니었다. 오금 저리게 하는 바위 봉우리였다. 둘레길 걸을 때와 똑같은 평상복과 운동화 차림인 내게는 그야말로 난코스였다. 한 발짝만 헛디디거나 중심을 잃으면 그대로 떨어져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미끄러운 화강암이 울멍줄멍 가파르게 하늘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었다. 올라갈수록 더 위협적이었지만 엉겁결에 이미 절반 이상 올라왔기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기다시피 더듬어 올라가 한숨 돌리는데 가슴은 더 세차게 콩닥거렸다.

 

사실 나는 중등도 이상의 고소공포증이 있다. 학령기 이전 어느 날 집 근처 거의 수직에 가까운 10m 가량 높이 언덕 위에서 굴러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몸 기억은 참 끈질기다. 더 오래 머물 수가 없어 서둘러 문수봉에서 내려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려가는 길마저 조금도 쉽지 않았다. 비록 쇠 난간이 설치돼 있긴 했지만 더 어질거리게 만드는 각도였다. 긴장하면서 힘을 준 탓인지 다리 근육에 심한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게다가 점심을 굶은 터라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 와중에 사위를 더듬으며 버섯, 돌꽃, 이끼를 찾아 살피고 사진 찍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일을 위해 바위산에 일부러 오기라도 한 듯하니 제의가 맞다.

 

제의는 아직 클라이맥스에 이르지 않았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이라 쉬우려니 하고 가볍게 승가봉을 지나 비봉(560m) 앞에 다다랐다. 한눈에 봐도 문수봉 이상으로 위험한 바위덩어리들이 서로 엉겨 붙어 버티고 서 있었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꼭대기에 진흥왕 순수비가 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얼마나 옹근 욕망이었기에 천 오백 년 전 이 바위 봉우리 끝에 비를 세워 놓았을까. 엉금거리며 기어 올라가 그 풍경을 보았다. 아연 초현실이었다. 초현실은 또 있었다. 내려가는 길이 달리 없고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야 한단다. 이런!

 

불현듯 아득함이 들이닥쳤다. 거의 같은 발걸음으로 각성 하나가 달려들었다. 문수사리가 날 불렀구나. 비록 낮은 바위 봉우리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공포 앞에 나를 세웠구나. 옆 사람이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기로 나는 말했다. “됐다.” , 팔꿈치, 무릎이 바위에 긁혀서 난 상처를 문지르며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난치 기억을 쟁여 놓았던 혈관운동신경성비염을 자가 상담으로 치료하던 그 새벽,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됐다.”

 

이제는 정말 내려갈 일만 남았다. 진관사 쪽으로 난 능선에 이어 계곡을 따라갔다. 계곡이 봄 가뭄 참상을 전해주었다. 물이 거의 말랐다. 그나마 물 고인 곳에서는 사람들 모여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정치도 언론도 입을 닫으니 대중도 태평한 모양새다. 걷기와 넘기가 얼마나 다른지 모른 채 헤맨 나처럼 도로 매판 판이 된 우리 사회도 마구 헤매는 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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