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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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이 전체성을 향한 트인 소통 양식임을 알아차리고 좀 더 실제적인 접근을 하려고 이 책 주해 리뷰를 시작했다. 저자가 지닌 목적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이 작업이 어떤 직접적인 선물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저자 의도와 무관한 지점에서 나는 근본적 회심을 일으켰고 저자와 다른 방식으로 동시성에 접근해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내용 자체가 아니라, 나를 칼날 위에서 각성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

 

저자에게 미친 영향을 따지면, 적어도 이 책에서는 폴 브런튼이란 인물이 단연 압도적이다. 순수 내용으로 400쪽이 좀 안 되는 책에서 결론을 향해 가는 막바지 300쪽 이후에서만 17회나 그를 인용한다. 책의 맨 마지막도 그를 인용한 글로 장식할 정도다. 그 인용문 맨 마지막은 이렇다.

 

상상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 스스로 불멸할 것이라고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불멸을 얻는다.(402)

 

유심론 지도자에게서 나온 결론이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주의를 기울인 지점은 이 말이 통속한 자기 계발 선동 문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본의 첨병 노릇을 하는 허다한 영적 지도자들과 폴 브런튼이, 그리고 그를 인용하는 빅터 맨스필드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르겠다. 심지어 불멸이라니. 브런튼과 브라만이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임이 틀림없다.

 

유심론이니 그렇다 친다. 폴 브런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깥 세계를 경험한다고 믿을 때, 실제로는 내면을 경험하는 것이다.(325) 물론 이 또한 유심론이니 그렇다 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한번 따져보자.

 

문맥 전체를 보지 못해 오해 소지가 없지 않으나 적어도 이 문장만 보면 폴 브런튼은 내면을 통속한 의미에서 쓰고 있다. 바깥 세계와 분리되는 고유한 내면 말이다. 과연 그런 내면이 있을까?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없다. 본디 저들 유심론은 바깥 세계(물질)와 내면(마음)을 대비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자가 전자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혹 대비시킨다 하더라도 대비시키는 한, 바깥 세계 없는 내면은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때 바깥 세계와 이루는 경계가 바로 내면이다. 결국 바깥 세계를 경험한다고 믿을 때, 실제로는 내면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말은 고매하고 심오한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말한다: 네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그렇다. 나는 그 경지 이르렀다고 하는 거인이 이 지경 된 난쟁이들 바꾸는 꼴을 본 적이 없다. 그 경지로 홀로 나아가지 않고 이 지경으로 더불어 배어드는 난쟁이들이 정녕 신이다. 이 난쟁이들이 꾸는 개꿈, 떠는 수다, 실룩이는 몸짓이 어우러져 동시성을 일으킨다.

 

동시성 공동체, 그 네트워킹은 실로 다양한 난쟁이들로 왁자하다. 유색인종, 여성, 아동, 성 소수자, 장애인, 빈자, 난민, 수드라·바이샤·언터처블, 조센징, 연변족, 절라디언, 빨갱이, 독립운동가 후손, 4·16 아이들, 제주도 원주민, ‘개돼지’, 반려동물, 식용동물, 북극곰, 아마존 숲, ‘얼굴 없는식용식물, 잡초, 돌꽃(지의류), 곰팡이, (조류),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빅터 맨스필드가 말하는 진정한 Soul-making은 바로 이 난쟁이들 냄새 가득한 낮고 후미진 몸-맘에서 일어나는 시시한사건이다.

 

나는 이 시시한 사건을 내 영적 삶 처음 꽃으로 피워내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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