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불교도가 아님에도 절에 가는 일을 제법 좋아했다. 필경 오대산 월정사 입구 간평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인연 덕이었으리라. 마흔 갓 넘어 용인에 있는 작은 절에서 한의대 가려고 공부하던 시절부터 절에 대한 인식이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승려들이 저지르는 한심한 짓거리가 절집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현실 눈으로 보니 절집이 인간 탐욕을 덕지덕지 붙인 너절한 공간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뜨르르한 고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근에 자주 가본 조계종 총본산 서울 조계사는 그야말로 너절함의 끝판왕이었다. 숲 여정에서 거의 반드시 만나게 될 절을 내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키는 원인이 됐다.

 

잠시 숨을 고를 양으로 지난 일요일에는 옹근 숲 걸음을 멈추고 예술의 전당 뒷산, 그러니까 우면산 일부를 가볍게 걸었다. 그래도 7~8km는 걸었으니 숲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심취되는 모양이다. 대략 시간을 가늠하고 전에 없이 절로 향했다. 대성사. 절집을 둘러보니 예상한 대로였다. 용성 스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더욱 참담했다. 왜 절집을 이토록 함부로 날림으로 시멘트로 살풍경하게 짓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시를 조망하는 절집, 그 절집이 세워놓은 불상을 조망하는 나를 선형으로 배치하자 아연 허망해진다. 허망해진 눈으로 보니 올망졸망 모여 있는 미니 불상들조차 인간 탐욕의 도구처럼 느껴진다.


울퉁불퉁한 회색 하늘 같은 내 심사를 다독이며 절에서 내려온다. 대체 종교란 무엇일까? 왜 종교는 이런 살풍경을 그려낼까? 이런 종교는 미래에 어찌 될까? 불교뿐만 아니다. 개신교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다만 제삼자가 아니다. 내 사상의 기축은 원효고, 내 실천의 본진은 예수다. 내가 이 두 하등한 고등종교에 유난히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소이다. 나는 종교 굴레를 벗어던졌지만 여전히 내 벗들, 제자들, 이웃들은 여러 결로 거기 엮여 있다. 종교는 역동하는 부동 실재다. 우스워서 무서운 권력이다. 숲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아무쪼록 현실 혐오가 아니라 치유일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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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0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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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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