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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광석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21일, 수원의 아침은 몹시 추웠다. 전남 구례에서 올라온 트랙터 한 대는 눈길 가파른 경사로 발판을 내려오다 전복되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출발 전에 ‘가자 서울로, 윤석열 체포하고 농민헌법 쟁취하자’고 앞에서 외쳤고 뒤에서는 ‘혹시 경찰이 막으면 남태령 일거야’ 누군가 말했다. 트랙터는 총 37대였다. 나는 앞 트랙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뒷 트랙터에 밀려가는 것 같았다. 중간에 대열은 잠깐 쉬면서 생밤 몇 개를 나누어 먹었다. 트랙터 속도는 느려졌고 드문드문 경찰이 보였다. 이제 막는구나 생각했다. 남태령이었다.

몇몇 시민은 스케치북에 ‘멋져요, 파이팅’을 적어와 응원했다. 지나는 길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약간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차안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 차안에서 박수치는 사람, 차안에서 손가락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편에서 보는 사람들은 저편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인데, 만난 일 없고, 만날 날 없을 텐데 같은 고장에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경찰의 진은 남태령을 넘어서 경사면에 위치했다. 14시였다. 서울로 가는 차선과 서울에서 나오는 차선에는 중앙분리대가 없이 30센티 높이의 보도블럭이 경계선을 만들고 있었다. 성질 급한 트랙터 한 대가 그곳을 넘어 반대차선으로 뛰어들어 세 대가 연달아 경찰의 저지선을 넘었다. 경찰은 반대차선도 차벽으로 급히 막았는데 네 대는 이미 현장을 벗어나 동작대교와 반포대교로 진출했다. 그들은 막힌 자리에 트랙터를 놓고 돌아와서는 대열을 이탈하니 경찰도 막지 않고 갈 데가 딱히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남태령 양방향 도로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첩첩산중이며 고립무원이며 진퇴양난이며 속무수책이었기 때문에 남태령은 대열이 살거나 죽을 자리였다. 오후 해가 가파르게 졌다. 령은 양쪽 높은 봉우리 중간에 있었다. 령은 서울의 길목이며 산을 낀 수도방위사령부 철책은 삼엄했다. 그곳이 1980년에 노태우가 사단장이었다는 사실, 이번 쿠테타에서는 지하 벙커에 잡아온 정치인을 가두려고 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는 계속 고팠다. 빵과 떡이 일부 돌았으나 그것도 바닥났다. 인근에 상점은 없었다. 령을 넘어가려는 바람의 숨소리는 거칠어서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않고 트랙터에 안에서 시동을 켜놓고 시간을 보냈다. 내 트랙터는 히터가 나오지 않았다. ‘아 여기서도 춥고 배고픔에는 계급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19시 쯤 경찰 10개 중대가 견인차, 지게차를 앞세우고 진압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들어내려고 하는 구나’ 경찰이 들어내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이대로 허무하게 끝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트랙터를 견인하려면 기아를 빼야 하는데 기아를 넣은 상태에서 열쇠를 빼면 그들은 바퀴가 구르지 않는 트랙터를 사지를 묶어 끌고 가야한다. 그러면 클러치박스와 미션이 다 아작난다고 누가 말했다. 일부는 그렇게라도 버티면서 진을 사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자가 트랙터에서 시동을 끄고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회의가 열렸다. 현재상황은 진(進)의 길은 없고 퇴(退)의 길은 열려있다고 했다. 척화파와 주화파가 논쟁을 하듯 간부들은 명분과 현실 앞에서 흔들렸다. 오히려 간부가 아닌 사람들이, 평소에 조용한 사람들이, 간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아따 눈들이 많은디 여기서 우리가 빠지면 쓰겄는가, 쪽팔리게’ 그것은 명분도 실리도 아닌 체면과 양심이었다. 죽되든 밥되든 버틴다고 결정했다.

따뜻한 떡볶이가 왔다. 시민이 보내준 것이라고 했는데 두 그릇을 먹었다. 조금 있으니 김밥이 왔다. 있을 때 먹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먹었다. 핫 팩이 왔다. 핫 팩에는 군인이 근무를 서는 사진이 있었다. 여기가 그들이 지키는 고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저녁이 되어서 시민들이 모두 자리를 뜨면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언론이 없을 때 들어내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다.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여덟시가 지나자 광화문에 있는 시민들이 여기로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돌았다. 늦은 시간에 누가 온다는 것은 우리를 구하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홉시가 되자 트랙터 옆에 삼삼오오 사람이 보이더니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앞 사람은 앉으라더니 더 큰 엠프를 행사장에 가져온다고 말하더니 노래가 나오고 사람들이 미치고 노래는 더 커지고 저녁 10시가 되자 대열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제 사람들은 한 5천 명, 아니 만 명, 숫자는 가늠 되지 않았다. 꾸역꾸역 느릿느릿 무장무장 밀물이 뭍을 압박하듯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나는 그곳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열한시면 지하철이 끊긴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바람 차가운 령에서, 군인들도 서 있기 어려운 이 추운 고지에서 젊은 사람들이 버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10시가 넘자 사회자가 걱정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곧 지하철이 끊기면 이곳은 올 수도 없고 나갈 수 없는 곳이 됩니다. 어찌합니까?’ 어떤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던 것 같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데 혼자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렇게 밤샘 농성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응원봉이 바다를 이루었다. 바다 빛은 서로 다르면서 하나였다. 네모, 동그라미, 세모였고 파란빛, 빨간빛, 노란빛이었다. 손잡이 길이도 짧은 것과 긴 것이 있었다. 물어보니 가격도 달랐다. 왜 그런 것 까지 물어보냐고 웃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나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통계를 확보하기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여기저기 물어보았다. 최저 가격이 3만원 이었고 최고 가격이 10만원 이었다. 그들 대게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었는데 모르는 노래가 없었고 지칠 줄 몰랐고 준비성도 좋아서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와 방한 숄더, 돗자리와 장갑, 작고 엷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유심히 들었는데 티어스와 밤이면 밤마다, 여행을 떠나요, 남행열차, 질풍가도, 다만세와 로제의 아파트와 윤수일의 아파트와 BTS 등을 불렀고 여기에 적지 못한 노래가 더 많다.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도 불렀는데 기가 막힌 것은 노래를 부르면서 구호를 외친다는 것이었다. 가사와 가사 사이, 시로 말하면 1연과 2연 사이에 불과 1, 2초 간격에 ‘탄핵 탄핵 윤석열 탄핵’과 ‘차빼라, 차빼라’를 떼창했는데 원래 그 노래에 그 가사가 생겨먹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집회 사회자라 하기는 어렵고 무슨 DJ라고 해야 할 주관자는 노래마다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떼창을 유도했는데 실로 이것은 경이로운 사태였다. 그들은 밤새웠고 그것을 보는 농민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고 보고 싶어서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의 나락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추고 말하고 한숨 쉬고 야유하고 환호했다. 처단할 것을 결의하고 울지마라고 위로했다.

그들은 순서대로 발언대에 올라 3분을 말했는데 그러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강사, 초등학교 교사, 농업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광주에 사는 롯데 팬, 전라도 혐오 때문에 괴로운 대학생, 이번에 수능을 본 재수생, 자신이 농업지대에 산다는 학생, 부산에서 주말마다 올라온다는 24살 여성, 수방사에서 군인으로 근무한 아버지를 둔 직장인,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여성, 대학을 가기 위해 뒤늦게 수능준비를 한다는 30대 여성, 취직이 걱정인 4학년 여학생, 대학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성소수자 남성,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당한 친구를 둔 여성, 양평에서 아버지가 농사짓는다는 직장인을 따라온 양평에서 혼자 농사짓는 여성, 농민운동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연단에 선 고 신용범의 딸 신우리, 집회장의 천연기념물이 되었다는 20대 남성,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노조운동을 한다는 21살 여성 등이 말했다. 그들의 말잔치는 끝이 없었고 박수의 가열참은 겨울 공기를 뚫었다.

농민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양곡법을 거부한 것에 분노한다고, 국산 쌀밥 먹는 경찰은 부끄럽지 않냐고, 국민의힘의 콘크리트 지지율은 이제 깨진다고, 민주주의는 광장에 있다고,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전봉준 티셔츠를 입고 다니겠다고 말했는데 집회 때 마다 큰 소리로 현 시국을 개탄하는 민주단체 지도자들 보다 말을 잘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으로 자신들이 할 말을 적어왔는데 발언의 마무리를 구호로 하는 것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라가 부끄러웠고 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를 잊을 수 없다. 민중가수 최도은은 활화산이었고 불화살이었다. 최도은은 음악도 없이 불나비를 불렀는데 입때껏 그런 날 것 같은 포효를 본 적 없다. 맥박도 핏줄도 터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농민가’를 떼창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몇 사람 깨워서 서울로 향했던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진리와 죽은 자가 갔던 길과 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산자의 길을 생각했다. 우금치에서 죽은 자의 몸 위에 포개진 산자의 몸과 80년 5월 27일 전남 도청의 동호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며 나는 울었다.

나는 연민과 분노를 생각했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농민, 특성화고 출신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직시하려는 마음, 타인의 배고픔과 추위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차별과 배제의 고통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이며 인간의 마을에 피어나는 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세월호 아이들을 보았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 자리에 왔다고 굳게 믿었다. 죽은 자가 산자의 길을 열었다고 믿었다. 하늘의 별이 된 그들의 영혼이, 배에 남긴 마지막 손톱자국이,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지상에 내려와 응원봉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이전의 세상과 이후의 세상은 달라야 한다는 다짐들이 저들의 가슴속에서 분노의 꽃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찬 바다에서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겨울 하룻밤이 무슨 대수냐며, 그들은 인류의 역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아름답기 그지없는 인간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나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남태령에서 여명을 보았고 승리를 확신했고 세월호의 부활을 보았다. 그 후로부터는 경찰벽을 넘는 것도, 한강을 넘은 것도, 윤석열 자리의 턱밑까지 압박한 것도 이미 되어질 길이었다.

체면과 양심이 대열을 분산의 길에서 구했고 연민과 분노가 트랙터의 길을 열었다. 나는 불량한 자들의 시대가 가고 인간이고 싶은 이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저들의 형식의 가벼움과 내용의 무거움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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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트위터 읽다가 남태령으로 행로를 정한다. 날씨가 제법 매섭다. 밤을 지새운 사람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저체온증으로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미안한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사당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간다. 수많은 공회전 차량으로 대기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남태령역으로 다가가자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가 들려온다. 시민 발언, 구호, 연호, 박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며 관악산과 우면산 발치를 뒤흔든다.

 

경찰 버스로 왕복 8차선 과천대로를 가로막아 놓았다. 그 너머 붉은빛 트랙터들이 마치 장수처럼 서서 금방이라도 내달릴 듯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늘 그렇듯 농민도 냅다 걷어찬 윤석열을 체포하겠다고 용산을 향해 온 농민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고 서서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중이다. 사회자가 간간이 지원 물품을 소개하면 열기는 한층 고조된다. 축제도 이런 축제가 없다.

 

각종 단체 깃발이 펄럭인다. 누구나 잘 아는 딱딱한 조직은 물론 말랑말랑한, 심지어 장난기 가득한 알 수 없는 단체 깃발로 하늘은 물결이 된다. 하지만 여기도 홀로 나온 10, 20대가 곳곳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한쪽 구석에 앉아 마른 빵을 먹는 소녀가 있다. 나는 보온병을 꺼내 물 한 컵을 건넨다. 해맑게 웃으며 받아 마시고 돌려준다. 나는 엄지척을 해 보이고 일어선다. 저 나이 때 나는 저 아이처럼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소식을 알리면서 시간을 살핀다. 점심 식사 하기 위해 따라갈 동선을 생각한다. 지원된 음식을 나같이 부끄러운 늙은이가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텅 빈 과천대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언제 어떻게 이 차로 한가운데를 걸어 남태령을 넘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1차선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과천 선바위역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 먹기로 하고 고갯마루를 향해 간다. 생각보다 남태령은 나지막하다.

 

남태령 본디 이름은 여우고개였다. 능행 길에 정조가 묻자 차마 그대로 아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과천 이방이 남쪽 큰 고개란 그럴싸한 이름을 급조해 올린 뒤부터 이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어감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나 백성 실제 삶과 얽힌 서사를 도려낸 이름은 본디 것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깊은 숲이 고개 양쪽에 있어 실제로 여우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 이름했다니 말이다. 여우고개가 남태령보다 더 정겹고 사랑스럽지 않나.




 

생각보다 나지막한 여우고개를 예상보다 일찌감치 넘어 시간이 남는다. 나는 행로를 바꾼다. 선바위역 가기 전에 우면산 서쪽 능선으로 올라가 과천대로와 평행한 숲길을 걸어 다시 남태령역으로 간다. 산 넘어 이따금 아스라이 들리는 함성을 향해 간다. 돌아가 보니 사람이 더 늘어나 있다. 사당으로 나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또 남태령역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또 더 늘어나 길을 가득 메운 행렬은 고개 쪽 경사를 따라 부쩍 길어진다.


 

오늘 뭐가 돼도 되겠구나 싶다. 가족과 한 저녁 약속 때문에, 해 떨어지기 전 남태령역을 떠난다. 역 안 한 귀퉁이에 오도카니 홀로 앉아 있는 여고생에게 묻는다. “어떻게 혼자 올 생각을 했어요?” 그가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그냥요.” 그냥 민주주의다. 얼마 뒤 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농민에게도 1030 여성에게도 감사한다. 오늘부터 남태령, 아니 여우고개는 130년 만에 전봉준이 부활한 우금티. 명신이네는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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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불가피한 경우라도 아주 조금만 먹는다. 처음부터 무슨 목적이나 지향을 지니고 그리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태생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99.9%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은 동물성 식품인 모유 아니면 우유지만 나는 미음이었다. 어머니에게서는 젖이 나오지 않았으며, 1950년대 중반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는 우유를 구할 수가 없었다. 미음 머금은 솜을 입술에 대고 짜 먹여 연명시켰다 한다. 이 곤경이 미각을 확정했다.

 

붉은빛 음식이 식욕을 더 자극한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풀빛 음식을 보면 눈이 반짝인다. 냄새도 마찬가지다. 신선할 때는 물론 데칠 때 나는 나물 냄새, 뜸 들 때 나는 밥 냄새, 심지어 내가 먹지도 못하는 소여물 끓이는 냄새까지 좋아한다. 조사에 따르면 인류 공통으로 가장 이끌리는 냄새가 바닐라 냄새라고 한다. 이름이 그래서 상상하기 어려우나 그 냄새가 근원에서 쌀, 그리고 벼 냄새라는 사실을 나는 대뜸 알아차렸다. 북미 대륙 토착민이 향모라고 부르는 볏과 식물 기원 아로마를 바닐라그라스라고 부르는 까닭도 거기 있을 테지만, 모두 바이 모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식물에 빙의되어 공부하면서 식물-지의류, 균류, 조류 포함-에 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내가 살기 위해 먹는, 그러니까 죽이는 식물을 대하는 자세가 영 달라졌다. 식물 공부 끄트머리에 더 큰 회심이 일어나 제국주의 공부 길로 들어섰는데 이때 식물과 식사에 관한 생각이 한 번 더 바뀌었다. 무엇보다 식물 생태 본성인 평등 분산 팡이실이, 그 네트워킹을 내 생명에 받아들인다는 각성이 눈부신 변화였다. 식물이 지니는 영양소를 분석해 그래서 몸에 좋다는 따위 서구 기계론과 환원주의 관념을 벗어던진 나지막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 연장선에서 일어난 변화는 식물을 먹는 일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일이라는 정치적 각성이었다. 제국주의 본성이 바로 평등 분산 팡이실이, 저 공생 생태계를 멸절하는 전쟁이고, 그 대표 병기가 바로 육식이다. 육식은 동물 생태 본성인 불평등 집중 기관 구조, 저 기생 생태계를 내 생명에 구현하는 일이다. 육식 중독 인간이 제국 신민 되는 일은 필연이다. 이 저주는 군대를 동원한 거대 전쟁으로 풀 수 없다. 가장 사소한 일상, 그러니까 식탁에서부터 제국 생활 양식을 걷어내면서 식물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지닌 팡이실이 본성을 찾아가야 가능하다.

 

인간에게 과연 팡이실이 본성이 있는가? 있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진화사에 기댄다: 거대 파충류에게 패배한 포유류는 숲으로 쫓겨났다. , 그러니까 식물에서 포유류는 팡이실이 본성을 배웠다. 포유류 팡이실이 본성은 승자 파충류에 없는 공동체 형성으로 나타났다. 서로에게 닿고 이어짐으로써 위험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적응을 통해 패자 필생 승자 필멸이란 진리를 세웠다.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영장류에서 다시 인간으로 진화하는 동안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변이가 일어났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공동체 본성이 남아 있다.

 

공동체 본성은 장 신경-무수 미주신경(미주신경은 부교감신경을 이루는 주축이다)-교감신경-유수 미주신경으로 이어지는 자율신경 진화 과정에서 획득했다. 유수 미주신경은 타자와 얼굴을 마주해 서로 이어지며 놀며 나아가 더불어 안전한 생명 활동을 영위하게 하도록 진화한, 고대 미주신경과는 다른 곳에서 발원하여 다른 곳에 도달하는 또 다른 미주신경이다. 스티븐 포지스가 말하는 () 미주 이론인데 바로 이 두 번째 미주신경이 공동체 본성 증거다. 아직 수정 보완 확장할 일이 남아 있는 이론이지만 근본 진실성은 분명하게 확보했다고 평가한다.

 

나는 이 이론에 두 질문을 붙여 근원 서사를 그려보고 싶다. 첫째, 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미소 생명이 이 시스템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둘째, 숲은 이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이야기는 공동체 개념을 지구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는 토대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 전체를 수탈·살해하는 제국주의와 맞설 수 없다. 백반집에서 먹는 6천 원짜리 식사로 반제 전투를 하려고 할 때, 쌀과 곰취와 버섯이 전우가 아니라면 나는 반제 전사가 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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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와 언론의 자유가 선한 의도에서 발원했다고 생각하는 우리 상식은 그리 상식적이지 않은 듯하다. 적어도 오늘날 종교와 언론의 자유가 남용되고 훼손되는 현실만 보면 마치 기득권을 수호하려 만든 보장으로 비친다.

 

20241214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탄핵 의결을 촉구하는 시민 200만이 모여 시위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개방 화장실이 부족해 시민이 큰 불편을 겪자, 누군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화장실 개방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한다.

 

거절 이유가 놀랍고도 가소롭다: 하나님 뜻인지 몰라서 개방할 수 없다. 말인즉 너희들 하는 짓은 하나님 뜻에 반한다, 그런 얘기다. 종교 시설을 정치 집회에 내줄 수 없다, 정도도 아니다. 이 나라 개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란 무엇일까.


 

20231217일 김명신 부부는 공식 순방으로 위장해 네덜란드를 사사로이 여행했다. 위장에 속아 네덜란드 국왕 부부가 그들을 맞아 만찬을 베풀었다. 그때 네덜란드 왕비는 김명신과 건배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 아는 그 사실 때문이다.

 

국민일보는 사진을 합성해 두 사람이 건배한 것처럼 보도했다. 눈길이 서로 어긋나 조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텐데, 담당 기자가 혼자 그 짓을 했을까.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일이다. 국민일보 데스크, 아니 사주에게 언론의 자유란 무엇일까.

 

국민일보 사주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차남인 조민제다. 종교단체가 언론사를 소유한 실제 목적이 무엇이든 우리 현실에서 볼 때 두 분야가 지닌 어둠은 서로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손잡고 함께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중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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