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지도 쓰지도 않은 지 100일이 넘었다. 극진히 관심 둔 곳은 서울 산이었다. 서울 안과 경계에는 표고 200m 이상 산이 22개 있다: 봉산(209), 백련산(228), 앵봉산(235), 남산(271), 망우산(282), 대모산(293), 아차산(296), 안산(296), 구룡산(308), 우면산(313), 천림산(327), 인왕산(338), 백악산(343), 용마산(348), 호암산(393), 삼성산(481), 불암산(510), 청계산(617), 관악산(632), 수락산(641), 도봉산(740), 북한산(836). 이미 넘은 산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 배어들고 배어나는 일로 더 깊이 침묵했다. 마침내 11월 27일 망우산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모두 합해 8,937m를 넘은 셈이다.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고산증 없는 wellbeing 히말라야네!”
마지막 일정을 망우산으로 잡은 까닭이 있다. 수많은, 특히 버려진 무덤으로 말미암아 더 육중한 고요에 잠겨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스치는 행인 이외에 인기척 느낄 일 없는 길가 무덤이든 이목 끄는 표지판까지 갖춘 역사적 인물 무덤이든 고요하긴 마찬가지지만 들으려는 산 자 발길이 끊어진 무덤은 인간 윤리, 그 하찮음을 압도적으로 깨우친다. 산 자가 스스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하는 삶 이야기 아닌 죽은 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말하는 삶 이야기를 알아듣지도 못한 채 깨닫기에 한사코 그 무덤 사이를 지나고 또 지난다. 지나는 동안 문득 깨닫는다: 모든 산은 그 자체로 무덤이다. 무언 무덤에서 인생 언어가 돌연 우꾼한다.
용마산과 아차산 사이 고랑을 따라 올라가 능선 가로질러 아차산과 용마산 그리고 망우산 사이 고랑으로 다시 내려간다. 적정 지점에서 둥글게 돌아 아차산과 용마산을 이어주는 능선길로 되돌아온다. 이 계획에 문제가 생겼다. 지도에는 길이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둘: 왔던 길을 되돌아가거나 눈에 보이는 다른 길로 감으로써 행로를 수정한다. 이는 안주 아닌가. 나는 안주하는 생을 거절하고자 이 침묵을 택했으니 그럴 수는 없다. 내 길은 하나다: 길을 스스로 만들기. 나는 오로지 내가 향하고자 했던 능선 방향만 응시한 채 망설이지 않고 절벽에 가까운 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될만한 공간을 탐색하면서 나아갔지만, 순간마다 아뜩해지곤 했다. 돌아가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한발 한발 올라갔다. 얼마를 헤맨 끝에 길일 수밖에 없게 생긴 지점에 이르렀다. 거기서 보니 본디 정했던 능선길과 만나는 방향이 순식간에 눈으로 들어왔다. 그 방향으로 한참 걸어가자 마침내 저만치 앞에 사람 모습이 어른거린다. 숲은 내게 길을 감춤으로써 스스로 길 만들 기회를 주었다. 왜 글을 읽어야 하는지,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여태까지 해온 식에 안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으므로 새로운 길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명토 박아주었다. 숲, 곧 사인칭 관지는 내게 오늘을 전복 카이로스로 해석하도록 이끌었다. 큰 틀이 결정됐으니 시름 하나 잊는다忘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