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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허태임 지음 / 김영사 / 2022년 7월
평점 :
생일 하루 전이었던 지난 토요일 저녁 옛 제자들이 대학로에서 축하 모임을 열어주었다. 대화가 한창 무르익던 어느 지점에서 요즘 내 공부 이야기가 나왔다. “한의학 공부할 때, 심지어 국시 준비할 때조차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들고 다니던 난데, 식물·지의·균·조·박테리아·바이러스에 심취해 있는 요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일제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 심지어 그 좋아하던 바흐조차 듣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오자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묻는다. “왜요, 선생님?” 내 대답은 간단했다. “하찮게 느껴져서.”
내 관지가 초월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므로 그들 호기심은 이치로 이동했다. 나는 인간중심주의 < 뇌중심주의 < 대뇌중심주의 < 직립보행 < 패자 정체성 < 공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진화사 이야기를 간결하게 풀어냈다. ‘지구생태계 네트워킹 기축은 곰팡이다’를 거쳐 ‘사람 직립보행은 나무 본성에서 왔다’에 이르러 마무리하며 내가 말했다. “꼬박 2년 독서하고 사색했더니 이제는 교보 식물 코너에 읽을 만한 책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다음 날, 나는 교보에서 『나의 초록 목록』을 발견했다. 더없는 생일선물이다.
먼저 이 말을 해야겠다: 좋은 책이다. 그보다 더 먼저 이 말부터 해야 맞다: 글이 참 좋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 글솜씨가 그만이다. 문학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문학서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디서 어떻게 글쓰기 훈련을 했는지 알 수도 없지만, 저자 글은 따스하고, 정감 있으며, 잘 흘러간다. 소소한 개인사에서 커다란 생물 주권, 기후 위기 문제까지 자연스레 넘나들며 이야기가 초군초군 번져간다. 좋은 글은 바른 사유에서 나온다는 말을 실답게 보여준다. 문득 내 30대를 돌아보게 만든다. 야젓한 청년이다.
좋은 이 책도 식물 지식 자체로 내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읽지도 않았으니 유감없고. 해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어떻게 쓸까, 잠시 고민했다. 내 방식인 주해 리뷰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한 번에 대충 버무려 쓰기에는 아깝고. 더 되작거린 뒤에 결정해야겠다. 하지만 우선 좋은 글, 좋은 책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글부터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물론 이런 글쓰기가 모르기는 해도 처음 아닐까, 싶은데 내 리뷰를 통해 내용을 파악하기 전 다른 이 스스로 읽을 기회를 주려는 새로운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