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중동 마루 넘어 70대로 속절없이 미끄러지던 어느 날 문득 나는 오랜 습관 하나를 정색하고 마주한다. 글 읽기와 글쓰기, 특히 직업도 아니면서 운명처럼 여겨온 글쓰기를 향해 질문한다. 왜 쓰는가? 필연으로 이어 질문한다. 마치 쓰기를 전제하기라도 한 듯 다른 사람 글을 왜 읽는가?
질문에 잠겨 나는 길게 침묵한다. 침묵 전 마지막으로 읽은 질리언 테트 『알고 있다는 착각ANTHRO-VISION』,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정화진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가 예전 같으면 글쓰기를 기다렸을 테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침묵에 무게를 더해준다. 여간해서 깨지지 않을 침묵 한가운데서 그 침묵을 위해 변명하려고 이 글 아닌 글을 쓴다.
나는 왜 침묵하는가? 글쓰기가 내게 무엇인지 답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계속해서는 안 되는 카이로스 상에 내가 섰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얼마쯤일까 생각해보니 더는 미룰 일 아니라는 판단에 다다른다. 침묵하는 동안 답을 내려면 관지觀地를 바꿔야 한다. 죽은 내 관지에서 이미 지나간 내 삶을 거꾸로 들여다보는 사死인칭 어법 아니면 안 된다. 사인칭 어법은 나도 아니고 남도 아닌 관지가 이끈다. 나는 이제 막 그 비대칭 대칭 세계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