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광화문으로 가는 일은 이제 제의로 굳어진다. 박근혜 때 스물세 번을 꼬박 갔는데 이번에는 또 얼마나 가야 끝나려나. 시민 발언과 가수 노래를 들으며 그때와 이제를 비교해 보니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복잡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지긋지긋한 식민 그늘을 벗어나려면.

 

서울서부지법에서 윤석열 구속영장을 발부하자 광신도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일요일 아침, 나는 현장으로 향한다. 상황이 일단락된 뒤 풍경을 통해 오는 전언을 듣기 위해서다. 거리 곳곳에 저들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반증이 나뒹군다. 군데군데 여전히 남아 수군대거나 떠들어댄다. 슬프고 가여운 생명들이다.

 

자신이 짝퉁 키세스 전사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당 받고 나온 할멈 예닐곱이 뜨끈한 국물을 나누며 시시덕거린다. 자신을 여기로 끌어들인 사악한 자들은 지금 아늑하고 풍요로운 공간에서 돈 세고 있을 텐데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러는지. 아린 눈길을 접고 나는 다시 국사당으로 향한다. 지난주 남겨둔 아쉬움을 거두러.






 

고건축 전문가에 따르면 국사당은 전체로 견실 간소한 조선 후기 건축 방식을 따르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우아한 면을 찾아볼 수 있는 중앙 경공(京工) 솜씨가 드러난다고 한다. 나중에 덧붙인 부분과 제대로 가꾸지 못한 주위 경관 탓에, 옹색하고 심지어 너저분한 느낌까지 들긴 해도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만하기도 어렵다.

 

본디 국사당은 조선 수호신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해진 남산 꼭대기에 있었던 서울 수호 신당이다. 초기에는 신주도 있었으며 국가에서 제사도 지냈다고 하니 규모나 미학 측면에서 만만치 않은 건물이었음이 틀림없다. 왜놈에게 쫓겨나 이리로 오면서 원재료를 거두어 복원했다고 하는데 제반이 위축됐을 가능성이 크다.

 

왕궁과 대찰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국사당 앞에 한참 서서 나는 무속이 걸어온 침하(沈下) 역사를 돌아보고 또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사회문화, 정치경제, 생태계 문제 전반을 둘러본다. 유구한 우리 산천 신앙을 범주 인류학 서사로 재탄생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깨달음에 든다. 현실 무속, 딱 그 짝 거대종교는 망조다.

 

명신이를 부추긴 무속과 석열이를 부추긴 개신교는 신벌을 받아야 한다. 물론 천공이 놈이 믿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도 광훈이 놈이 믿는 여호와도 가짜 신이니 그들이 벌을 내릴 리는 없다. 그들을 벌할 신은 인민, 깨어 있는 시민이다. 시민을 깨어 있게 하는 신령들이다. 그 신령 가운데 신덕왕후께 절하고 국사당을 떠난다.



 

국사당 떠나 인왕산 남쪽 자락을 따라간다. 끄트머리 직전에 마을 길 거쳐 자하문로를 걷다가 이내 창의문로 건너편 칠궁으로 향한다. 한눈팔지 않고 곧장 육상궁으로 간다. 어제오늘 일을 고하고 팡이실이 신령을 청한다. 이렇게 새로운 순례길을 짠다: 국사당-육상궁-정릉. 버림받은 지성소가 연대해 반제 전의를 드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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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원(문화학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사람이 참으로 간사하다. 매일매일 속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뉴스를 챙겨보았다. 온갖 사람들의 온갖 발언에 신경을 끓이고 때로 긁히는 마음이 들 만큼 예민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토리 아빠가 떠난 뒤 문득 허망한 마음이다.

언젠가 나는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을 아테네 민주주의 시대의 예술과 비교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은 <라오콘상>이나 <사모트라키의 승리의 날개> 같은 작품들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장엄하고 화려하며 역동적인 기교와 자태를 뽐낸다. 이 시대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중 하나는 과거 그리스 시대 건축물을 상징하는 양식이 도리스, 이오니아식 원주의 소박하고 강건한 느낌과 달리 화려한 잎으로 테두리를 두른 코린트 양식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려하고 역동적인 작품들을 보면서도 어쩐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만개한 꽃이 마침내 시들어버리듯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의 이면에서 그 시대의 우울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들이 이처럼 화려해진 까닭은 한 마디로 예술가의 후원자(물주)들의 경제력에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 확장된 그리스-마케도니아 제국의 지배계층은 이전 시대 폴리스의 물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해졌다. 기본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 작품들은 부유한 개인 후원자의 현시욕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제작된 훌륭한 문화상품이었다. 설령, 이 작품들이 공공적인 목적으로 발주되었고, 공공장소에 전시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드러내주는 것은 과거 상고기 그리스 폴리스의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의 공공 건축물이나 이를 장식한 조각이 해당 도시국가와 공동체 주민들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냈다면, 헬레니즘 시대는 표면적으로 그리스 문화에서 기원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알렉산드로스의 사후, 제국을 분할 지배한 제왕들의 전제 왕정이었음을 숨기지 못했다. 도시국가의 공공성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알렉산드로스 이후 남겨진 전제군주의 권세와 그 주변의 관료와 상인 등 지배세력의 공공성만 남아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작품들이 이처럼 극도의 화려함과 장식성을 추구한 이면에서 지식인들의 철학은 현실참여 대신 현실도피를 추구했다. 기원전 300년경에 등장한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은 쾌락과 금욕이라는 서로 다른 지점에서 출발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두 철학은 사회의 복리가 아닌 개인의 선(행복)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는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졌지만 궁극적으로는 마음의 평정보다 나은 다른 것을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고전기 그리스 문화의 모태가 된 폴리스(도시국가)들은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회였다. 혈연, 경제적 이해관계를 비롯해 수많은 사회적·정치적 유대를 통해 시민이 결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본토의 충만했던 사회적·가족적 유대관계는 개인에게 여러 정치적 의무와 가족과 공동체 관계 속에서 제약을 부과했지만, 반대로 이들 상호간의 이해와 신뢰는 고대의 다른 어떤 문화가 성취했던 것보다 큰 정치적 권리(참정권)를 시민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 거대한 세계주의(전제정치의 지배 아래 있는 세계 제국) 아래에서 한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삶을 규정짓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정치(공동체 참여)와의 긴밀한 연계는 지방적 차원에서조차도 사라져버렸다. 헬레니즘 왕국의 평균적 그리스인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직계가족밖에는 없었다. 그와 같은 시대였기에 문학에서 이른바 현실도피적인 '전원시' 장르가 출현한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자연인> 같은 프로그램이나 귀향 귀촌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데, 이런 현상도 민주주의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당신은 더 이상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정치적 낙담이 하나는 퇴폐와 유미주의로, 다른 하나는 은둔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적 삶의 전통적 가치관과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적·정치적 현실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괴리가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헬레니즘 제국은 시민(市民)에서 신민(臣民)으로 정치적 위상이 변화한 이들에게 사회적 양극화와 정치적 무기력을 강요했다. 헬레니즘 제국의 세계주의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세계화'를, 그리스 본토의 좁은 경제권을 넘어 헬레니즘 체제에서 유한계급이 얻었던 경제적 권력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양극화를 발견한다. 모던(modern)한 고대(古代)의 풍경에서 현대(現代)의 고대(古代)적 풍경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아테네 민주정이란 정치적으로 각성된, '제멋대로 시민'들의 발언과 정치적 참여가 실제로 아테네의 현실 정치에 반영되는 정치적 효용감을 느낄 수 있었던 시대였다면, 헬레니즘 시대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더 광대한 '제국의 세련된 신민'이 되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선택이 제국의 통치에 반영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장에서 돈을 세거나 더 즐거운 자극을 찾아 헤매는 일뿐이었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서로 다른 현장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벌써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란 우두머리가 버티다 체포된 지 이제 불과 하루밖에 안 되었지만, 벌써 내 안의 긴장이 이렇게 사라져버렸다. 어떤 이는 십년 넘은 쳇기가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선 그 심정이 곧 나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헌재의 시간'이라느니, '공수처와 검찰의 시간'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결국 지금까지도 존재해왔던 기득권 '체제의 시간'이기도 하다.

열린 광장과 촛불의 결과였던 문재인 정부가 검찰 개혁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검찰 공화국의 출현을 막지 못했던 것, 수구보수세력의 향수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했음에도 수구보수세력이 이후 ‘히드라’처럼 더욱 집요한 형상으로 되돌아온 것처럼 이제부터가 진짜 어떤 미래로 갈 것인가? 어떤 대한민국을 요구할 것인가? 저들보다 더욱 집요하게, 더욱 혼란스럽게, 더욱 시끄럽게 말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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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 나는 나지막한 산길을 걸어 출근한다. 남쪽에서 비탈길을 올라 능선길 따라가다가 북쪽 비탈길에 이르면 아연 풍경이 달라진다. 눈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심할 때는 아예 발길을 들여놓지 못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거기만 걷기 위해 스노우 부츠를 신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오늘은 길섶에만 눈이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아예 눈을 떼고 걷기는 뭣하다. 밤기운이 여전해 어둑어둑할 때는 더 그렇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아직 동은 트지 않았다. 긴급뉴스 보는 일을 축으로 해서 돌아가던 긴장된 일상이 어느 정도 풀어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공화국 계절은 겨울이고 민주주의 하루는 밤이다. 가만히 앉아서 봄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우리 공화국 처지다. 이불 속에 누워서 아침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우리 민주주의 형편이다. 어쩌겠는가. 우리 손으로 세워야 할 공화국이고 우리 손으로 닦아야 할 민주주의다.

 

남들은 모른다. 우리가 중첩 또는 누적 식민지라는 악무한(惡無限)과 분단이라는 악조건이 빚어내는 왜곡과 굴절로 말미암아 이렇게 몸부림친다는 사실을. 사회 모든 분야 꼭대기에 철옹성 쌓고 앉은 특권층 매판 부역 세력이 시도 때도 없이 나라를 말아 처먹는다는 사실을. 저들이 쳐놓은 가짜 반공과 사이비 자유민주주의에 휘말려 막무가내 날뛰는 광신도가 총궐기하면 능히 독자로 정권도 창출한다는 사실을.

 

말이 쉬워 평평하게 K-민주주의, K-공화국이라 일컬으나 인민이 주체이므로 민주주의일 뿐이고, 인민에게서 주권이 나오는 나라니까 공화국일 따름이다. 우리는 실제로 자주(自主)와 통일이라는 불퇴전 목표를 놓고 반제국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반제국주의 전쟁이라서 자맥질이 극심하다. 악랄한 제국과 노회한 부역 지배층이 구사하는 전략·전술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워온 인민이 치른 희생은 형언 불가다.

 

희생은 패배로 끝나지 않는다. 어제 희생한 죽음들이 봄을 데려오고 오늘 희생하는 삶들이 동을 틔움으로써 패자 필생 승자 필멸 진실을 세워간다. 패륜·비리 검사 한 놈이 사이비 언론 사기술 탓에 대통령 돼서 210개월 동안 승승장구했던 부역 전쟁은 우주 전사 키세스 소녀들이 지새운 겨울밤 희생 덕에 끝판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붉은 해가 떠오를 때까지 소녀는 응원봉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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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석열이 놈 체포했다. 아직 다 끝나지는 않았으나 축하할 며리는 차고도 넘친다. 나는 즉시 새 술병을 열어 한 잔 따른다. 악귀 한 마리 떠올리며 축하주를 마신다. “축하해, 명신아!”


 

이 술은 남태령 대첩에 참여한 강원도 철원 전봉준 투쟁단 소속 농부 술도가 <대작>에서 빚은 증류식 소주 모을동주(43%). “명신아, 전봉준 투쟁단이 넘어온 남태령을 네 집사람이 거꾸로 넘더구나. 운명이다. 부디 과대망상을 버리지 말고 챙겼다가 해군 함정 다시 가서 폭죽놀이 보며 술 파티해라. 그때 꼭 이 모을동주를 마셔라. 맛도 내음도 기가 막히는구나. 안녕을 빈다!”


 

명신이 부부가 시전한 이 과정은 허울 대한민국 주류인 특권층 매판 세력 성공 방식, 파멸 기전을 압축해 보여준다. 성공은 철저하게 저주하고, 파멸은 처절하게 축원해야 참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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