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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평점 :
가장 깊은 수준의 소통은 소통이 아닌 교감입니다.·······그것은 말을 넘어서고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
나는 토머스 머튼을 그가 죽은 이듬해에 만났다.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만났다.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만났다. 머튼과의 우정 그리고 지난 45년 동안 그것이 내게 준 희망이 없었다면, 나는 내 직업에 대한 믿음을 그나마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90-91쪽)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있는데, 여전히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한다.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를 촉구하거나 독려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영혼을 존중하고 마음을 북돋우며 정신에 영감을 주는 것,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일 뿐이다.
거의 반세기 동안, 머튼은 내 여정을 밝히면서 동행해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93-94쪽)
파커 J. 파머는 토머스 머튼이 열어준 길을 참 자아, 역설, 커뮤니티, 부서진 세계 속 ‘감춰진 전체성’의 넷으로 정리했다. 이 넷을 내 버전으로 바꾸면 바리, 화쟁, 아미타림(바리누리), 일심(비대칭의 대칭)이다. 내 토머스 머튼은 분황 원효다. 원효의 영성은 바리에 젖줄을 대고 있다. 아니, 그는 성육신한 바리다. 바리는 버림받은 “사회의 주변부”(토머스 머튼) 사람들이다. 바리로서 바리를 향해 가는 화쟁의 도상에서 바리누리가 꾸려지고 마침내 비대칭의 대칭인 일심세계가 드러난다.
나는 바리로 태어나 바리로 살다가 열아홉에 원효의 옷자락 하나를 처음 붙잡은 뒤 45년째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발견은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온다. 교감은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처음 원효의 글과 만났을 적 기억과 느낌은 아직도 나를 전율케 한다. 마치 내가 쓴 것을 읽는 듯 어휘와 문장을 하나하나 새기지 않았음에도 뜻이 통짜로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내 독서 태도 근본을 뒤집어 놓았다. 내 생각은 이렇게 전복되었다.
“글을 읽음으로써 그 너머의 교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글은 그것을 일깨우는 확실한 기회이자 부족한 방편일 따름이다.”
교감은 근원적·존재론적 상호작용이다. 소비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무드의 교류가 아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공현사건이다. 공현사건은 우리가 ‘따로 또 함께’ 존재한다는 진실의 증거다. 이 증거는 말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단 한마디 말만 허한다. 닥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