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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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가 말했듯이, “올바른 진술의 반대는 거짓 진술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또 다른 심오한 진리다.” 역설적으로 생각하기는 창조성의 열쇠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향해 정신과 마음을 열어 놓으면서, 갈라지는 생각들을 끌어안는 능력이다. 역설적으로 사는 것은 인격의 온전함에 이르는 열쇠다. 그것은 자기모순을 끌어안는 능력에 달려 있다.

  나는 역설의 관점으로 삶의 프레임을 다시 짜면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온전해지려면, 어둠과 빛을 둘 다 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인 생각은, 성장을 억제하고 가로막는 기독교 신앙관에서도 우리를 구원해준다. 그런 신앙관은 실제로는 살아 있는 하느님 위에 신학적인 추상화를 올려놓는 우상숭배다.·······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기독교 세계도 달라졌을 것이다.(96쪽)


내가 열아홉에 붙잡은 원효의 옷자락 하나가 바로 역설의 알갱이다. 물론 그것을 역설이라 이름 하지 않았다. 역설이란 표현은 형식논리의 관점을 반영한 서구 어법에서 왔다. 서로 모순인 진리를 자연스러운 논리로 받아들였던 동아시아 지혜에서 역설이란 표현은 호들갑스러운 무엇이다. 사십여 년 동안 궁굴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비대칭의 대칭’이라 붙였다.


토머스 머튼과 파커 J. 파머가 역설을 종지 삼고 강조하는 것은 내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내 사유와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비대칭의 대칭 때문이다. 비대칭의 대칭은 나를 우울의 늪에서 구해 공적 참여의 지평으로 안내했다. 그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내 말글의 도처에서 점멸하고 있다. 여기서 정색하고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파커 J. 파머가 언급한 기독교 세계 문제 때문이다.


파커 J. 파머가 그랬듯 나 역시 주류 기독교 세계에서 참된 하느님의 길을 찾다가 비대칭의 대칭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목도하고 그만두었다. 파커 J. 파머가 퀘이커로 남은 반면 나는 기독교란 이름 밖으로 아예 나온 것이 다를 뿐이다. 기독교란 이름이 감당할 수 없는 전체성으로서 비대칭의 대칭이 예수에게 있으므로 기독교에 얽매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나는 판단했다. 기독교인 가운데 성서가 비대칭의 대칭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문제는 그것이 이른바 성령의 감화와 무관한 우연이라는 사실이다. 성서 속 비대칭의 대칭은 “하느님 위에 신학적인 추상화를 올려놓는 우상숭배”를 타파해야 비로소 성령의 감화로 재구성된다. 사유에서도 삶에서도 기독교 세계가 비대칭의 대칭을 구가할 수 없는 것은 절대 일극집중의 자기거점을 지우는 하느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가 하느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그 길이 자기구조를 스스로 파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는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축출하고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등극시킨다. 하나님은 비대칭의 대칭과 전혀 무관한 가짜 신이다. 가짜 신을 놓고 더 이야기하기엔 내 말이 너무 아깝다. 땡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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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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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아의 탐구와 하느님에의 탐구, 그것은 차이가 없는 구분으로서, 나의 영적 생활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더욱 깊이 인도해주었다.(95쪽)


차이가 없는 구분”이 실제로 가능한가?


이 질문은 단단한 형식논리로 양육된 사람을 부득불 아포리아에 빠뜨린다. 파커 J. 파머도, 그를 이끈 토머스 머튼도 이 아포리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참 자아 탐구는 참 자아“” 탐구이고, 하느님 탐구는 하느님“에의” 탐구라 하니 말이다. “의”와 “에의”는 다만 글자 하나 차이가 아니다. 절대타자로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결코 불식될 수 없는 개념이며 사유이리라. 혹은 아무리 참 자아라고 해도 결국은 자아의 확장에 지나지 않거나.


이런 한계가 “신에게 부여받은 자아”(95쪽)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인연에 온전히 충실한 파커 J. 파머에게 더 오를 경지 운운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그의 삶에서 풍겨나는 거룩함이 내가 궁구하는 거룩함과 같은 점이 있는 한 감사함으로 교감할 수 있다. 내가 지닌 다른 점은 내 인연 속에서 거룩함으로 가꾸면 된다.


내게는 참 자아 탐구는 참 자아“” 탐구이고, 하느님 탐구는 하느님“에의” 탐구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 탐구도 하느님 탐구다. 내게는 참 자아가 자아의 확장이 아니다. 소거다. 내게는 하느님이 절대타자가 아니다. 네트워킹이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자아가 아니다. 신에게 배어들고 배어나는 자아다. 내게는 참 자아가 하느님이다.


구체적 실재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내 경계 안팎에 있는 모든 하느님을 “각각 그들의 참된 이름으로 부른다.”(리베카 솔닛의 『CALL THEM BY THEIR TRUE NAMES』에서 영감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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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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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수준의 소통은 소통이 아닌 교감입니다.·······그것은 말을 넘어서고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


  나는 토머스 머튼을 그가 죽은 이듬해에 만났다.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만났다.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만났다. 머튼과의 우정 그리고 지난 45년 동안 그것이 내게 준 희망이 없었다면, 나는 내 직업에 대한 믿음을 그나마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90-91쪽)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있는데, 여전히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한다.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를 촉구하거나 독려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영혼을 존중하고 마음을 북돋우며 정신에 영감을 주는 것,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일 뿐이다.

  거의 반세기 동안, 머튼은 내 여정을 밝히면서 동행해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93-94쪽)


파커 J. 파머는 토머스 머튼이 열어준 길을 참 자아, 역설, 커뮤니티, 부서진 세계 속 ‘감춰진 전체성’의 넷으로 정리했다. 이 넷을 내 버전으로 바꾸면 바리, 화쟁, 아미타림(바리누리), 일심(비대칭의 대칭)이다. 내 토머스 머튼은 분황 원효다. 원효의 영성은 바리에 젖줄을 대고 있다. 아니, 그는 성육신한 바리다. 바리는 버림받은 “사회의 주변부”(토머스 머튼) 사람들이다. 바리로서 바리를 향해 가는 화쟁의 도상에서 바리누리가 꾸려지고 마침내 비대칭의 대칭인 일심세계가 드러난다.


나는 바리로 태어나 바리로 살다가 열아홉에 원효의 옷자락 하나를 처음 붙잡은 뒤 45년째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발견은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온다. 교감은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처음 원효의 글과 만났을 적 기억과 느낌은 아직도 나를 전율케 한다. 마치 내가 쓴 것을 읽는 듯 어휘와 문장을 하나하나 새기지 않았음에도 뜻이 통짜로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내 독서 태도 근본을 뒤집어 놓았다. 내 생각은 이렇게 전복되었다.


“글을 읽음으로써 그 너머의 교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글은 그것을 일깨우는 확실한 기회이자 부족한 방편일 따름이다.”


교감은 근원적·존재론적 상호작용이다. 소비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무드의 교류가 아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공현사건이다. 공현사건은 우리가 ‘따로 또 함께’ 존재한다는 진실의 증거다. 이 증거는 말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단 한마디 말만 허한다. 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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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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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환상을 꿰뚫어 실재에 가닿는 하나의 방법이다.

  ·······실패는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냉정한 진실 앞에 나를 마주시킨다. 성공과 그것이 빚어내는 환상의 햇볕을 기분 좋게 쬐고 있을 때는 피하게 되는 진실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실패는 명상적 삶이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 가운데 하나다.(86-87쪽)


인간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힘쓰지 못한다고 확신할 때, 그때가 우리 영혼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드러낼 시간이다. 또한 그것은 재앙에 의한 명상가가 되어 얻을 수 있는 결실 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89쪽)


“법적·경제적·직업적 인간으로 살해에 준하는 일을 당했”을 때, 정말 힘들었던 것은 실패를 받아들이고, 불안과 절망을 견디는 일이 아니었다. 내 아픔엔 빗장 지르고 남의 아픔을 맞아 들여 치유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 “영혼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힘쓰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상태였으므로 상담 예약 잡는 간호사 목소리가 마치 형벌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만둘 상황도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 채로 그냥 맡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마주앉았다. 아,


그렇구나. 바로 “그때가 우리 영혼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서 드러낼 시간”이구나. 이따금 비수처럼 파고드는 공포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느 때보다 곡진함으로 숙의를 끝냈다. “나 자신과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냉정한 진실 앞에 나를 마주시킨” 실패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환상을 꿰뚫어 실재에 가닿는 하나의 방법”을 깨치면서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재앙에 의한 명상가”가 되었던 게다.


실패가 끝내 실패로 남는 것은 성공으로 보상받으려 할 때다. 실패의 보상은 성공이 아니라 실재다. 실재는 인간이 이르러야 할 기본적이면서도 궁극적인, 사소하면서도 위대한 세계다. 이 비대칭의 대칭은 환상을 꿰뚫어야 감지된다. 환상이 권력인 이 세상에서 실패는 저항이다. 모든 저항은 성패의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넘는 일의 개 짜릿함,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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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에 가면 추사의 향을 달리 맡을 수 있는 편액을 둘 만난다. 



<판전>



<영산전>



위 것은 추사가 죽기 사흘 전에 남긴 유작이다. 추사체를 머금되 훌쩍 넘어 스스럼없이 네오테니에서 노니는 절정고수의 무애 자재함으로 신비감마저 군더더기 감정 같이 느껴지게 한다. 사찰에 걸릴 편액임을 알면서 병중에 썼다는 말을 굳이 남긴 까닭은 알 길 없으되 아마 이조차도 경계 너머 마음 아닐까 싶다. 


아래 것은 추사의 제자 추금秋琴 강위姜瑋의 문인이었던 백련白蓮 지운영池雲英의 글씨다. 추사체에 대한 초보적 기억만으로도 이 글씨에서 추사를 떠올릴 수 있다. 그 눈으로 보면 판전 글씨보다 잘 쓴 글씨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그러면 판전 글씨처럼 써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아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보편일 수 없다. 자신의 지향과 삶의 조건이 만나는 시공에서 지극함으로 각기 인연을 지을 따름이다. 추사는 추사의, 백련은 백련의 마음 다함에서 노닌다. 나는 내 마음 다함에서 노닌다. 이번은 영산전 앞에 오래 머문다. 이 머묾이 그저 스쳐갈 작은 우연이라면 그게 고마운 만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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