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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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타락이 이브가 지식knowledge의 나무 열매를 먹은 결과로 일어났다”고 하는 부분은 중요하다. 이는 타락이 어떤 새로운 지적intellectual 능력이나 인식awareness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담과 이브에게 이제는 “이해력understanding이 주어졌고”,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깨닫고realized 무화과 나뭇잎들을 모아 꿰매서 스스로를 가렸다”는 점이다. 이는 타락이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관찰하고observe 판단할judge 수 있는 어떤 새로운 능력을 주는 것, 어떤 새로운 자기인식이 인간 내면에서 발전되는 것과 연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149-150쪽) ( 원문 단어 인용자 붙임.)


이 주해리뷰는 “아는 게 악이다”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아는 게 병이다’라는 속담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제대로 된 것이 아닌 어설픈 앎은 되레 화를 부른다, 뭐 이런 깨달음 정도로 통용되는 말이다. 틀리지 않지만 여기서 멈추면 이 깨달음 또한 화를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인류 역사가 제대로 된 앎을 추구해온 과정임에도 화는 더욱 커지고 있으니 말이다. 앎 문제에 근원적 접근을 해야 할 최후 시점이 이제지 싶다.


딱 네 문장인 인용문에 쓰인 앎과 관련된 단어만도 일곱 개다. 앎의 결과 겹은 실로 무궁무진해서 그 자체가 앎의 차원을 넘어선다. 불가피하게 유한한 앎 속에서 유한한 앎으로 살아내야 한다. 모든 것을 알아야 제대로 살 수 있다면 제대로 사는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불완전한 채 온전히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의 전체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놓는 앎, 곧 타자의 진입을 흔쾌히 수용하는 앎, 오직 이뿐이다.


전체성을 위해 타자의 진입을 수용하지 않는 앎은 자체완결성을 구성한다. 자체완결성은 전체 진실에서 나와 나 이외의 모든 것 사이를 갈라놓는 성城이다. 전쟁, 가부장제, 아동학대, 소유 집착, 육체 소외, 자연 착취, 시간 지배, 거대종교, 이 모든 것이 자체완결성을 지닌 앎의 소산이다. 이 자체완결성의 단단한 토대가 다름 아닌 형식논리다. 형식논리에 터한 앎의 명쾌함은 그대로 칼날이 되어 그 밖의 모든 타자를 베어버린다.


타자를 살해함으로써 돈을 버는 도구가 인도유럽인과 셈족의 앎이다. 앎이 깊어질수록 악도 교묘해진다. 예를 든다. 최근 수십 년 동안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화학합성약물이다. 폭탄을 터뜨려 벌어들이는 돈보다 약을 팔아서 버는 돈이 더 많고, 폭탄을 터뜨려 죽이는 사람보다 약을 먹여서 살린다는 칭찬 들으며 죽이는 사람이 더 많은데 구태여 전쟁 벌이는 멍청한 짓을 할 까닭이 뭔가. 포성 없는 “세계대전”이다.


이 고요한 세계대전을 지휘하는 인도유럽인과 셈족의 제유提喩제국에서 앎은 필연적으로 절대 권력이다. 그 아래 전방위·전천후로 노예를 거느린 앎은 우아한 포르노로 등극한다. 앎의 포르노는 모든 실재를 망상으로 부패시킨다. 망상은 종당 앎 자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망상의 아가리 속에 처박히기 직전 “귀” 있는 자는 소리 없는 소식 하나를 듣는다. “네 앎의 거점을 지워버려라. 모르는 상태에서 두 팔을 활짝 벌려라.” 악마의 속삭임인가.


악마의 속삭임 치고는 너무 무모하다. 사실 앎에 집착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욕심에 빠져드는 것은 결핍감 때문이다. 결핍감에 휘말리는 것은 남이 내 것을 가져간다고 생각하는 망상 때문이다. 이 망상에서 놓여나는 단도직입의 방법이 바로 내 앎의 거점을 지우는 것이다. 내 앎의 거점을 지우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밖에 없다. 두 팔을 활짝 벌리는 것이다. 전체성에 항복하는 것이다.


전체성에 항복하면 타자의 진입을 막을 수 없다. 만일 타자 또한 전체성에 항복했다면 그도 내 진입을 막을 수 없다. 여기부터가 모름 공화국이다. 모름 공화국은 당연히 모름에게 주권이 있다. 모름이란 주권자는 모르기 때문에 평범하고 평등하며 평화로운 소통과 교감의 네트워킹을 한다. 네트워킹은 모름이 창조하는 앎이다. 이 앎이 참 앎이다. 참 앎이 참 삶이다. 참 삶이 번져가는 모름 공화국 헌법 제1조: “아는 게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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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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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전통문화에는 관용을 강조하며 어떤 탐욕의 표출도 경계하는 강력한 도덕적 원칙이 있다. 재산과 재화를 공유하지 않고 개인을 위하여 모으는 것은 범죄로 간주된다.·······“아프리카 종교에서 요구되는 윤리를 한 마디로 묘사한다면 바로 사교성(환대와 열린 마음으로 나눔을 의미)이다."(Magesa, L.『African Religion』-인용자 붙임)(122쪽)


관용과 공유, 그러니까 환대와 나눔은 나와 남이 불연속 아닌 연속인 존재라는 자각에서 온다. 연속의 자각은 불연속 상태이기 때문에 온다. 불연속과 연속은 각기 홀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서로 밀고 당기면서 전체성을 형성한다. 타락, 그러니까 자아폭발 이전 우리 조상들은 이 전체성을 무의식 상태에서 향유하며 살았다.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터질 때 속수무책이 된다. 혼전 성교란 자신의 인생에 당연히 없는 일이라고 굳게 믿는 미국보수개신교 십대 여학생의 임신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현상을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정색하고 문제 삼아보자. 남은 당연히 나인가? 나는 당연히 남인가?


출생 직후 영아는 엄마를 자신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몸을 경계로 하는 자아의식이 없다. 당연히 타자의식도 없다. 내남의 구분이 안 되는 시기가 지속되다가 9개월 전후로 서서히 분리가 일어나 자아의식이 생긴다. 2세 전후까지 아기는 분리를 거부하고 타자를 자아에 연속·복속시키려 한다. 3세 전후해서 분리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대립적 결속 관계를 형성한다. 6-7세 전후로 이 과정을 다시 시작해 청소년기에 이른다. 청소년기를 기점으로 청년기까지 이 과정은 또 한 번 되풀이된다. 반복과 전진이 나선을 이루며 어른으로 성장해간다.


발달심리학의 여러 이론들을 버무려 대략 구성한 내러티브다. 이런 변화를 거치는 동안 인간은 자타의 분리를 체득하고 분리된 자타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관용과 공유를 익혀간다. 물론 이것은 충격의 계기마다 연착륙이 성공해 건강하게 자란 경우 이야기다. 경착륙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경우 아이는 정신분열, 성격장애, 우울증 따위의 이름을 지닌 질병에 노출된다. 크게 보면 모든 정신병은 발달불균형증후군 또는 발달장애스펙트럼이다. 그 증후군 또는 스펙트럼의 극단적 어둠을 일러 악이라 한다.


이 성장 내러티브, 특히 경착륙 에피소드를 인류역사에 적용하면 스티브 테일러의 타락 이론은 어떤 한 면에서 명쾌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부연하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문제는 어떤 다른 면에서는 근원적 난관에 봉착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타락을 “분리”(367쪽)the separate sense of self exists(p. 262)라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분리라고 묘사하면 당연히 목표는 (재)통합이다. (재)통합이 단순 복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진경을 정확히 묘사한 말은 아니다. 진경을 정확히 묘사하려면 “전체성의 파괴 또는 상실”이라 해야 한다. 전체성의 진경은 통합된 하나가 아니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不二而不(守)一” 상태가 전체성의 진경이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상태의 전체성을 깨달아서 향유하면 두 가지 더 큰 축복 아래 놓인다. 문제가 생길 때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고 향유하는 기쁨이 더욱 탱탱해지고, 고마움이 더욱 생생해진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문화유산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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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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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궁금증을 견디기 어려워 『자아폭발』 원서를 사들였다. 가장 궁금했던 것이 자아폭발이란 말의 본디 모습이었다. 원제가『The Fall: The Insanity of the Ego in Human History and the Dawning of a New Era』이므로 그것은 The Insanity of the Ego일 텐데, 왜 번역을 그렇게 했을까 의아해했던 것이다.


저자는 책 제목의 평행과 달리 본문에서는 the Ego Explosion이라는 용어를 썼다. 번역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히 번역자가 각주를 붙인 의도도 내가 추측한 것과 같지 않다. 물론 팽창에 대한 의견은 변함이 없다.(주해리뷰 <3. 인류는 무엇이 잘못되었나-대칭을 베다>참조)


번역은 쉽지 않은 일이다. 번역서를 읽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관건적이거나 문제적인 어휘와 문장은 원문을 병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 동안 수없이 했다. 그러다가 더러는 이번 경우처럼 원서를 직접 찾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궁금증이 풀렸고, 앞으로 그럴 일도 없으니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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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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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수렵채취 생활을 했든 정착 생활을 했든 간에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절대 다수는 거의 놀라울 정도로 평등주의적이었다.·······한 영국군 장교는 18세기 체로키 인디언에 대해 부정적인 어투로 이렇게 기술했다. “그들 사이에는 법도 없고, 복종도 없다.·······그들 중 가장 낮은 사람도 스스로를 위대하고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높다고 생각한다.·······누구나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많은 경우에 평등주의는 하나의 이념으로 잘 발달되었다. 많은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서는 우리가 “개인 권리”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인식이 극히 높다.·······이로쿼이와 알곤킨 인디언 사회의 핵심 원칙들은 “개인 권리를 강조하고 분명히 하며, 개인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결정에 바탕을 두고, 모든 집단의 행동은 참여자들의 동의에 근거를 둔다.”는 것이다.(111-112쪽)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6000년 전부터 이렇게 결곡한 평등 민주주의를 실천해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인도유럽인이 이주하기 훨씬 전에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가 일점일획조차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복원해도 될 만큼의 수준 높은 정치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미합중국이 창시자인 원주민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백인 남성 지주에게만 평등을 보장함으로써 근대민주주의는 출발부터 함량 미달의 장물臟物이었던 것이다. 마치 세계 민주주의의 수호신처럼 굴지만 미합중국은 여전히 이 장물 민주주의의 기조를 유지·강화하고 있다. 타락의 퇴적층이 쌓여가면서 고결한 민주주의 씨앗에는 화석화가 진행 중이다. 오늘 여기서 정색하며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민주주의 씨앗을 발굴해낸다.


민주주의에서 주체적 개인에 대한 명료한 인식 없이 평등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권리”, “결정”, “동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평등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공동체 “이념”이 결정적일수록 평등한 개인 주체 개념은 요체가 된다.


누가 이 생각을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나. 누가 이 씨앗을 화석으로 만들어가고 있나. 정히 다시 심는다. 싹트리라 믿는다. 싹틀 것을 믿으며 씨를 심는 사람, 나는 누군가. 미합중국이 보장하는 평등의 경계 밖에 있는 주변인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똑같이 버림받는 사람이다. 버림받는 주변인이어서 민주주의가 왜 관건인지, 민주주의 요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인식론적 은총을 인식하는 바리데기여서 타락의 물결과 마주해 선다. 바리데기 정치학이 타락 재난, 그 폐허에서 유토피아를 꿈꾼다. 만국의 바리데기여, 개망하라open net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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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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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리진 사회·······여성은 그 자체로 날 때부터 삶에 대하여 어른스럽게 이해하는 “완성된” 존재로 생각되며, 곧 바로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반면에 남성은 오랜 절차의 성년식 과정을 거쳐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서 자신을 “완성시켜야만” 한다.(99쪽)


남성이 얻으려고 하는 영적 지식을 여성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므로·······


“남성의 정신이 본질적으로 유기체의 창조라는 관점에서는 부차적이거나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것 같다. 여성은 연약한 남성의 자아는 지속적으로 외부에서 보강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안다. 여성은 남성의 정신을 형성하는 남성의식을 격려하고 지원한다. 그리하여 남성의 정신이 자연과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한다.”(롤러)(100쪽)


2차 타락을 통해 인도유럽인이 살육하고 유폐시킨 오세아니아 대륙 원주민 애버리진의 여성·남성 인식은 특이함을 넘어 수승하다. 물론 이들의 고유한 삶의 조건이 빚어냈겠지만 보편적 진리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미 『안녕, 우울증』에서 이들과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을 밝힌 바 있다.


‘남자는 철들자 죽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그저 우스개려니 하지만 가부장 사회에서 평생 아이처럼 나대며 무책임하게 살다 죽는 남자 꼴을 본 여성의 ‘증언’인 만큼 뼈저린 진실을 머금은 말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말에는 생물학적 진실도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윤리적 판단을 관장하는 뇌 부위 성장의 마무리가 남성은 여성에 비해 대략 5년 정도 늦다. (혹시 이 또한 타락의 결과라면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전통적으로 결혼 적령기와 맞물리는 시기다. 이런 진실의 고갱이를 애버리진 사회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무엇보다 “유기체의 창조”, 그러니까 월경-임신-출산-육아 전 과정에서 “부차적이거나 매우 동떨어져” 있는 남성의 결함이 문제다. 내부 창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연약한 남성의 자아”는 “지속적으로 외부에서 보강해주어야” 하는데 이 일을 여성이 적극적으로 보살핀다. 완성된 여성의 모성적 영성이다.


타락 이후, 남성은 이런 결함에 마음의 불화를 일으켰다. 여기서 도망치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부장제를 확립하여 여성을 지배하는 것. 더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른 하나는 수련 또는 수행을 통해 여성보다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 극단적 정신 고양으로 오른 그 경지가 실제로 여성의 영성보다 무엇이 어떻게 높은지 검증할 길이 없으니 자기기만일 가능성이 높다. 허다한 영적·종교적 ‘거물’의 대부분은 여기에 속한다.


남성이 이 중독에서 풀려나려면 완성된 여성의 영성 속으로 흔쾌히 걸어 들어가는 것뿐이다. 문제는 오늘 여기에 완성된 여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많은 ‘여자’가 가부장제를 내면화했으니 말이다. 저 완성된 여성을 보고 싶은데 내 아름에서 만날 수 없다면 어찌 한담? 여성 말고 여성‘성’을 향해 결곡히 길 떠나지 뭐. 엄마 만나러 무수히 어머니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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