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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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부터 제2차 물결이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방식은 문학이었다.·······19세기 말 이른바 낭만파라는 새로운 시 조류가 나타났다. 이것은·······시란 주관적이고 시인의 내면의 삶을 표현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낳았다.·······

  ·······낭만파 시인들에게는 새로운 공감정신이 다른 인간과 동물에게만 확장된 것이 아니라 전체 자연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들은 세상과 분리된 이원론적 관찰자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참여하였다.(300-402쪽)


  18세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문학적인 발전이 있었다. 현대소설의 등장이었다.·······소설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소설은 인간에게 꿈꾸는 것을 가르쳤다.(콜린 윌슨)”(402-403쪽)


  새로운 감성의 파도가 이 기간의 미술과 음악 분야에도 밀려들었다.·······미술가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품들로 이행되었다.·······이 시기를 낭만주의 시기라고 말한다.·······

  음악에서도·······19세기 초반에 베토벤이 신구시대의 간극을 연결하면서 음악은 더 풍부한 표현력과 극적인 요소를 지니게 되었다.(403-404쪽)


아름다움의 향수享受는 본질상 개인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적 참여로 일으켜지는 사건이다. 함께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제2차 물결의 “미학적 패러다임”(미셸 마페졸리)은 이 진리를 구현한 문학·미술·음악 운동에서 확인되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다. 어떻게 아름다움을 창조하는가? 접히고 구겨지고 구부러지고 뒤틀린 것을 폄으로써 그리한다. 이 생각을 더 밀고 가면 잘리고 끊긴 것들을 이어줌으로써 그리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펴고 이어주는 힘은 극적인 묘사에서 나온다. 극적일수록 묘사는 정확해진다. 정확할수록 묘사는 불확정성의 진실에 이른다. 이 역설이 세계 진실의 전체, 그러니까 펴지고 이어진 세계로 함께 들어가게 인도한다. 펴지고 이어진 세계가 드러내 보이는 고요한 술렁임, 그 지상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술의 천명이다.


참된 예술의 천명은 그러므로 분리문명의 자발적 파괴이자 일치문화의 창발적 건설이다. 파괴와 건설의 동시성은 예술적 상상력과 즉흥성, 그러니까 감성폭발에 힘입는다. 감성폭발은 저 사하라시아 자아폭발을 폭발시킨다. 폭발의 폭발은 무너져 흩어지게 하지 않는다. 무너져 열리게 한다(파커 J. 파머). 열림은 전체성을 향한 네트워킹이다. 감성 네트워킹.


감성 네트워킹의 감성으로 낭만주의를 찰나의 즉흥성 속에서 상상한다. 낭만주의, 그 통속한 ‘낭만주의’ 아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 루소와 낭만주의는 자연이 곧 감성이고 감성이 곧 민주주의라는 등식을 성립시켰으며, 사회질서를 극히 인위적인 것이라 서술하고 계급 특권에 반기를 드는 일이야말로 ‘유일하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했다.·······이때의 자연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온갖 급진주의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사회가 자연을 훼손한다는 것은 아이들과 못 배운 사람들이 가장 순수한 최상의 존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가히 급진적 반전이었다.·······워즈워스의 업적은 루소의 과제를 이어받아 더 발전시켰고, 유년과 자연과 민주주의 삼자의 관계를 밝히되 논리로 증명하는 대신 이미지로 그려보였다는 것이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179-180쪽)


워즈워스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하듯 워즈워스의 길을 완결해야 할 천명이 이제 나네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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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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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물결은 이전에도 수십 년간 천천히 힘을 축적하긴 했지만, 18세기 후반부에 눈에 띄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몇몇 변화가 일어났다.(395쪽)


이(때 일어난) 새로운 자비 정신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집단적인 정신 변화, 즉 자아단절감을 극복하려는 점진적 운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제1차 물결은 개체 인간에게 일어난 것이지만, 이 제2차 물결은 전체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394쪽)


<5. 타락의 시작-거푸 타락, 그리고>에서 나는 제2차 물결을 달리 해석했다.


“·······나는 2차 운동에 특유한 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2차 운동의 특유한 계기는 바로 인도유럽인의 2차 이주다. 이른바 신대륙의 발견으로 본격 시동이 걸린 제국주의가 1차 이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와 속도, 그리고 파괴력으로 지구 전체를 점령해버렸다. 저들의 근대 과학과 자본은 살육과 수탈의 도구인 동시에 글로벌한 각성과 소통의 매개였다. 이 덕에 타락과 극복운동의 진행이 밀접하며 서로 엉켜 있다. 극복운동의 동시적·지구적 연대가 가능해졌다. 가히 제국주의의 역설이라 할 만하다. 2차 운동의 고유한 방식은 2차 운동의 고유한 계기에 터한 것이다. 이 계기를 나는 2차 타락이라 이름 한다.”


이를테면 제2차 타락이 타락의 결정판이므로 제2차 물결은 전복의 결정판이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여 정치경제학비판 차원에서 둘을 이끌어냈다. 개인과 정치의 종말인 공동체, 경제의 종말인 생태학적 순환. 그 둘을 다시 하나로 귀결시켰다. 공동체150의 무한 네트워킹.


최종적으로 보충한다면 이성적·쌍무적 계약 거래의 종말인 감성적·주술적 상호 침투. 감성은 미학을, 주술은 종교를 의미한다. 미학은 제도적 예술과 무관하다. 질탕한 놀이로서 삶을 함께 향수함을 의미한다. 종교는 제도적 종교와 무관하다. 거룩한 제의로서 삶을 함께 헌정함을 의미한다.


모순의 공존이 빚어내는 이 역설의 향연을 펼치는 데 공동체150이 필요충분조건이다. 150인 각자의 네트워킹인 이 공동체가 다시 네트워킹의 무한한 상호침투로 번져갈 때 자아폭발이 쌓아올린 국가, 정치, 개인, 이성, 경제, 종교, 역사, 사회라는 모든 질병, 모든 악이 사라진다. 아나키즘의 진정한 담지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150이다. 이런 지향이 스티브 테일러한테서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정색하고 명토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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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영정 떠난 광화문이 텅 비어 있다.

엄마 아빠의 가슴은 대체 얼마나 어떻게 또 텅 텅 비어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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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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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수행은 에너지 재분배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말하면 타락과 동시에 발생했던 재분배의 전복이다. 타락 직후에는 경이로운 세계를 자각하는 데 들어갔던 의식 에너지가 자아로 향했다. 명상 수행이 성공을 거두면 자아는 차츰 사그라들고, 그토록 게걸스런 에너지 포식을 멈춘다. 남은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지각하는 데로 돌아간다.(371-372쪽)


신비 체험에는 외향성과 내향성 두 가지가 있다·······외향성 유형은 타락하지 않은 의식 상태와 가장 가깝다.·······모든 사물에 숨어 있고 그것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세계의 궁극적 실체로서 영혼의 힘·세상의 현존과 아름다움·내면의 안녕 인지를 특징으로 한다. 이 모든 특징은 한 수준 더 높은 강렬함으로 밀려 올라간다.

  내향성 신비체험은 타락하지 않은 의식 상태와는 다르다. 그것은 세상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때는 자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형태와 물질, 모든 경계의식이 사라진다. 모든 사물이 발생하는 우주의 근본적인 실재로 보이는 “공허”를 체험한다.·······일부 신비주의 철학자들은 내향성 체험이 외향성 체험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내향성 체험은 형태를 가진 세계 전체를 통하지 않고 그 너머 순수 상태의 영적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체험을 보통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보다 더 강렬한 의식 상태로 간주할 수 있다.(373-374쪽)


명상(이든 참선이든 요가든 영적 수행)은 많은 사람들이 허기증에 가까운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이다. 위대한 스승들이 명멸하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련법들이 떠돈다. 그러나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를 밟고 볼 때, 인류가 자아폭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 따위 명상은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내향성 신비 체험이라는 것은 폭발한 자아를 전제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자아폭발의 긍정적 측면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외향성 체험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게 옳은지, 이런 “강렬한 의식 상태”가 정녕 인간에게 소중하고 유용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고도한 무지와 자기기만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근본적 실재로 보이는 “공허” 형태를 가진 세계·······너머 순수 상태의 영적 실재”란 무엇인가? 형태 없이 텅 빈, 그래서 순수하고 근본적인 영적 실재가 과연 존재하는가? 텅 비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진공인가? 진공이면 순수한가? 진공 순수가 영(의 상태)인가? 게다가 그것은 외부 세계에서는 불가능하고 인간 내면에서만 체험 가능한가?


만일 이 모든 말이 맞는다면 명백한 이원론, 그러니까 분리문명의 어법이다. 잠정적·비본질적 혼합물질 세계를 거치지 않고 도달한 허공이란 실재로서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간 실재에 존재한다면 허공일 수 없다. 허공이 아닌 것은 순수하지 않다. 순수하지 않아 근본적 실재가 아니라면 근본적 실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 실재로 영혼(의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순수 허공, 그러니까 진공이 아니고 혼합 상태다. 혼합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 그러니까 소통하는 관계의 네트워킹이 영혼이다. 그 영혼이 신-사건이다. 사건으로서 신이 참 신이다. 참 신은 인간 외부보다 내면에 “한 수준 더 높은” “우월”함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인간(과 그) 내면을 우월하게 보는 그 자체도 자아폭발의 유제다. 이런 유제는 왜 생긴 걸까?


인간 내면이란 말은 육체의 경계 안 어딘가에 근거를 둔 정신 의식을 전제한다. 의식이 있어야 그 의식-자아, 경계, 물질, 형태에 대한-이 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의식은 어디서 생기는가? 통설적 이론은 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급진적인 다른 이론을 주장한다. 의식이 뇌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모든 실재에 배어 있는 우주의 근본적인 힘이다.·······뇌는 라디오가 전파를 수신하듯 일종의 의식 수신기로 작동한다. 그것은 생경한 우주의식의 정수를 개성이 부여된 의식으로 바꾼다.(356쪽)


뇌가 의식을 생산한다면 인간 내면은 거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수신기라면 뇌는 인간 내면의 근거일 수 없다. 아니. 내면이란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은 경계로 존재한다. 경계 존재인 인간에게 내면, 더군다나 외부세계에 대해 우월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난센스다. 경계의 한쪽을 내면이라 부르고 그 반대쪽을 외부라 부른다면 그것까지 말릴 필요는 없으나 내면을 인간의 것으로 외부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일은 여전히 이치에 맞지 않다. 내면이라 부르기로 한 그 한쪽도 실제로는 외부인데 인간 육체 안에 있다고 오해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면으로 오해받는 외부는 무엇인가?


장내세균총으로 불리는 장외 미세생명 세계다. 인간 자신의 세포수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하면서 인간의 면역과 그 의식을 일으키고 지도한다. 면역의식은 인간의 마이크로 의식 또는 무의식을 형성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장외 미세생명 세계가 뇌에 직접 영향을 미쳐 각종 정신 현상을 일으키고 지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의 매크로 의식이다. 장외 미세생명 세계야말로 인간 정신을 창조하는 무한-신이 아닌가. 고래와 소통할 줄 몰라서 정신병에 걸리는 일은 없지만 장외 미세생명 세계에 무지해서 항생제로 대량살해하면 정신질환에 걸린다. 장외 미세생명 세계를 경건히 마주하고 곡진히 섬기는 일이 극한의 영성이며 수승한 신비 체험이다. 진실에 대한 고도한 무지가 빚은 표현이지만 내향성 신비체험이 우월하다는 말은 이 경우에 한해 타당하다.


이 타당성의 한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통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보다 더 강렬한 의식”에 이르려고 “깊은 명상”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상은 물질적 본질을 놓친 관념성에 갇혀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깊다. 자아의식을 포함한 모든 의식이 사라지는 신비가 일상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영적 스승들이 윤리적 파탄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예가 비일비재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정도면 명상은 포르노다. 포르노인 명상에서 체험하는 신비는 맹렬한 중독일 뿐이다. 중독의 요체가 바로 몸 감각의 소실이다. 몸 감각으로 즉각 복귀해 그 물질적 본질을 지켜야 명상의 신비체험은 삶의 실재에 바쳐지는 헌정이 된다. 삶의 실재는 신비를 품되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비를 체험하는 몸 감각은 장외 미세생명 세계의 병리 상태를 과학의학으로 파악해 음식과 천연약물을 지원함으로써 우울증 환자가 치유되도록 하는 일이 기적이며 신비임을 깨닫게 한다. 참으로 깊은 명상이란 소소하고 미미하게 소소하고 미미한 존재에게 배어드는 마음[소미심심小微沁心]이며 그 몸임을 깨닫게 한다.


소미심심의 신비를 체험하려면 그 체험이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공동체적 신비체험은 커다란 황홀경으로 모든 구성원이 일사불란하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각기 다른 개성이 무한히 작은 결과 겹의 스펙트럼을 이루며 역동적 비대칭의 대칭으로 부글거리는 것이다. 이 부글거림 속에서는 포르노마저 중독마저 발효되고 만다. 전방위 발효의 생태학, 전천후 발효의 주술이 명상의 무덤이자 빈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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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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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는 예수가 타락 이전 또는 타락 초월의 일치와 영적임재를 체험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하늘의 왕국이 네 안에 있다.”거나, “나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 있으며, 아버지 하느님은 내 안에 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약 1세기 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옥시린쿠스” 파피루스의 <예수 말씀집>을 보면·······예수가 말하는 신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숭배하는 분리되고 의인화된 독립체가 아니다. 신은 인간 내부에 있는 영이며, 예수 자신이-신의 현현으로서-모든 피조물 안에 깃든 영이다. “돌을 들어라, 그러면 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나무를 쪼개라, 거기 내가 있을 것이다.”(379-381쪽)


기독교에는 1000년대 시작과 함께·······수많은 저명 신비주의자가 연속해서 나타났다. 이런 신비주의자의·······신 개념은 정통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 그의 신은 세상을 돌보는 인격신이 아니었다. 그의 신은 실질적으로 브라만이고 영적 힘이었다. 그에게 전체 세계는 신의 빛으로 충만하다.(387쪽)


스티브 테일러가 제시하는 예수의 신은 유일 인격신이 아니다. 복음서가 암시하고 옥시린쿠스 파피루스가 전하는 예수의 신 인식은 “타락 이전 또는 타락 초월의 일치와 영적임재”를 반영한다.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예수는 모세 종교, 그러니까 사하라시아 종교의 향벽설위向壁設位를 타파하고 향아설위向我設位를 복원하려 했다. 향아설위, 그러니까 아버지 하느님-예수 자신-제자-작은 자-돌과 나무로 번져가는 “일치와 영적임재”를 제시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신성과 그 네트워킹인 무한-신 사건의 전경을 넌지시 열어 보인 것이다.


예수 “믿는” 무리는 각기 무궁한 다양성으로 무진하게 네트워킹 해냄으로써 무한-신 사건을 실천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는가? 아니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제도 기독교 주류는 예수 진리 파악에 철저히 처절히 실패했다. 예수의 무한-신 사건은 성인숭배 중심의 지역 기반 작은 공동체 민중과 신비주의 소종파의 지류로만 겨우 명맥을 이어왔을 뿐, 기독교 전반은 타락의 본질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타락의 본질은 거대유일신에게 지은 원죄가 아니다. 거대유일신을 세계 밖에 만들어 세우고 우상으로 숭배한 것, 그 참람한 분리가 타락의 본질이다. 분리 없는 곳에 우상이 있을 리 없다. 기독교는 이 진리를 뒤집은 오류에 침륜되어 있다. 이 실재를 간과하는 한, 어떤 식의 개혁으로도 기독교는 예수 진리에 가닿을 수 없다.


식탁에 놓인 봄동 한 포기가 살아 있는 하느님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걸 주신 분이라며 스스로 개입시킨 허깨비에게 감사기도 올리는 타락한 영혼이 입에 예수를 담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봄동 버려서 얻은 ‘천국’이 어찌 구원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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