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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명상 수행은 에너지 재분배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말하면 타락과 동시에 발생했던 재분배의 전복이다. 타락 직후에는 경이로운 세계를 자각하는 데 들어갔던 의식 에너지가 자아로 향했다. 명상 수행이 성공을 거두면 자아는 차츰 사그라들고, 그토록 게걸스런 에너지 포식을 멈춘다. 남은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지각하는 데로 돌아간다.(371-372쪽)
신비 체험에는 외향성과 내향성 두 가지가 있다·······외향성 유형은 타락하지 않은 의식 상태와 가장 가깝다.·······모든 사물에 숨어 있고 그것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세계의 궁극적 실체로서 영혼의 힘·세상의 현존과 아름다움·내면의 안녕 인지를 특징으로 한다. 이 모든 특징은 한 수준 더 높은 강렬함으로 밀려 올라간다.
내향성 신비체험은 타락하지 않은 의식 상태와는 다르다. 그것은 세상을 체험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자신들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우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때는 자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형태와 물질, 모든 경계의식이 사라진다. 모든 사물이 발생하는 우주의 근본적인 실재로 보이는 “공허”를 체험한다.·······일부 신비주의 철학자들은 내향성 체험이 외향성 체험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내향성 체험은 형태를 가진 세계 전체를 통하지 않고 그 너머 순수 상태의 영적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체험을 보통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보다 더 강렬한 의식 상태로 간주할 수 있다.(373-374쪽)
명상(이든 참선이든 요가든 영적 수행)은 많은 사람들이 허기증에 가까운 그리움을 느끼는 대상이다. 위대한 스승들이 명멸하고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련법들이 떠돈다. 그러나 스티브 테일러 브레이크를 밟고 볼 때, 인류가 자아폭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이 따위 명상은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내향성 신비 체험이라는 것은 폭발한 자아를 전제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자아폭발의 긍정적 측면의 소산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외향성 체험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게 옳은지, 이런 “강렬한 의식 상태”가 정녕 인간에게 소중하고 유용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고도한 무지와 자기기만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근본적 실재로 보이는 “공허” “형태를 가진 세계·······너머 순수 상태의 영적 실재”란 무엇인가? 형태 없이 텅 빈, 그래서 순수하고 근본적인 영적 실재가 과연 존재하는가? 텅 비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진공인가? 진공이면 순수한가? 진공 순수가 영(의 상태)인가? 게다가 그것은 외부 세계에서는 불가능하고 인간 내면에서만 체험 가능한가?
만일 이 모든 말이 맞는다면 명백한 이원론, 그러니까 분리문명의 어법이다. 잠정적·비본질적 혼합물질 세계를 거치지 않고 도달한 허공이란 실재로서 시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간 실재에 존재한다면 허공일 수 없다. 허공이 아닌 것은 순수하지 않다. 순수하지 않아 근본적 실재가 아니라면 근본적 실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 실재로 영혼(의 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순수 허공, 그러니까 진공이 아니고 혼합 상태다. 혼합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 그러니까 소통하는 관계의 네트워킹이 영혼이다. 그 영혼이 신-사건이다. 사건으로서 신이 참 신이다. 참 신은 인간 외부보다 내면에 “한 수준 더 높은” “우월”함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인간(과 그) 내면을 우월하게 보는 그 자체도 자아폭발의 유제다. 이런 유제는 왜 생긴 걸까?
인간 내면이란 말은 육체의 경계 안 어딘가에 근거를 둔 정신 의식을 전제한다. 의식이 있어야 그 의식-자아, 경계, 물질, 형태에 대한-이 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의식은 어디서 생기는가? 통설적 이론은 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급진적인 다른 이론을 주장한다. 의식이 뇌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모든 실재에 배어 있는 우주의 근본적인 힘이다.·······뇌는 라디오가 전파를 수신하듯 일종의 의식 수신기로 작동한다. 그것은 생경한 우주의식의 정수를 개성이 부여된 의식으로 바꾼다.(356쪽)
뇌가 의식을 생산한다면 인간 내면은 거기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수신기라면 뇌는 인간 내면의 근거일 수 없다. 아니. 내면이란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은 경계로 존재한다. 경계 존재인 인간에게 내면, 더군다나 외부세계에 대해 우월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난센스다. 경계의 한쪽을 내면이라 부르고 그 반대쪽을 외부라 부른다면 그것까지 말릴 필요는 없으나 내면을 인간의 것으로 외부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일은 여전히 이치에 맞지 않다. 내면이라 부르기로 한 그 한쪽도 실제로는 외부인데 인간 육체 안에 있다고 오해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면으로 오해받는 외부는 무엇인가?
장내세균총으로 불리는 장외 미세생명 세계다. 인간 자신의 세포수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하면서 인간의 면역과 그 의식을 일으키고 지도한다. 면역의식은 인간의 마이크로 의식 또는 무의식을 형성한다. 더 결정적인 것은 장외 미세생명 세계가 뇌에 직접 영향을 미쳐 각종 정신 현상을 일으키고 지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의 매크로 의식이다. 장외 미세생명 세계야말로 인간 정신을 창조하는 무한-신이 아닌가. 고래와 소통할 줄 몰라서 정신병에 걸리는 일은 없지만 장외 미세생명 세계에 무지해서 항생제로 대량살해하면 정신질환에 걸린다. 장외 미세생명 세계를 경건히 마주하고 곡진히 섬기는 일이 극한의 영성이며 수승한 신비 체험이다. 진실에 대한 고도한 무지가 빚은 표현이지만 내향성 신비체험이 우월하다는 말은 이 경우에 한해 타당하다.
이 타당성의 한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보통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보다 더 강렬한 의식”에 이르려고 “깊은 명상”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상은 물질적 본질을 놓친 관념성에 갇혀 있다. 그래서 “지나치게” 깊다. 자아의식을 포함한 모든 의식이 사라지는 신비가 일상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영적 스승들이 윤리적 파탄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예가 비일비재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정도면 명상은 포르노다. 포르노인 명상에서 체험하는 신비는 맹렬한 중독일 뿐이다. 중독의 요체가 바로 몸 감각의 소실이다. 몸 감각으로 즉각 복귀해 그 물질적 본질을 지켜야 명상의 신비체험은 삶의 실재에 바쳐지는 헌정이 된다. 삶의 실재는 신비를 품되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비를 체험하는 몸 감각은 장외 미세생명 세계의 병리 상태를 과학의학으로 파악해 음식과 천연약물을 지원함으로써 우울증 환자가 치유되도록 하는 일이 기적이며 신비임을 깨닫게 한다. 참으로 깊은 명상이란 소소하고 미미하게 소소하고 미미한 존재에게 배어드는 마음[소미심심小微沁心]이며 그 몸임을 깨닫게 한다.
소미심심의 신비를 체험하려면 그 체험이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공동체적 신비체험은 커다란 황홀경으로 모든 구성원이 일사불란하게 들어가는 게 아니다. 각기 다른 개성이 무한히 작은 결과 겹의 스펙트럼을 이루며 역동적 비대칭의 대칭으로 부글거리는 것이다. 이 부글거림 속에서는 포르노마저 중독마저 발효되고 만다. 전방위 발효의 생태학, 전천후 발효의 주술이 명상의 무덤이자 빈 무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