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편은 내가 우는 걸 보기 힘들어해요.·······내가 아플까봐 걱정했던 거예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요.(26쪽-김호연 엄마 유희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 안됐지만”이 앞에 있어 역접논리를 구성한다. 불연속이며 끝내는 단절일 수밖에 없는 어법이다. 냉엄한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근본 이치로 따지자면 죽은 사람만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 불가능성과 맞물려 이 말은 산 사람이 차마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이다.


산 사람이 이 말을 입에 올리려면 일반적 논리를 전복해야 한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으니”를 앞에 두어 순접논리를 구성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뒤에 따라오는 말은 “산 사람은 살아내야 한다.”를 의미로 지니게 된다. 죽음과 삶이 연대하는 순간이다. 운명이 천명으로 승화는 순간이다. 416사건에 적용해 문장 전체를 확충하면 이렇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임을 당했으니 산 사람은 기어이 살아내야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산 사람은 기어이 진실을 규명하여 범죄자를 심판하고 의로운 세상을 일궈내야 한다.”


유가족도 생존자도 생존자 가족도 깨어 있는 시민도 모두 죽임당한 사람들을 구심으로 하는 동심원적 희생자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할 역사적 의무 앞에 결곡히 서야 한다. 우리의 의무가 숭고한 것은 절대불의의 권력에 의해 죽임당한 것만으로 죽임당한 사람들은 장엄하기 때문이다. 장엄이 존재하므로 거기로 가는 길이 숭고한 것이다. 숭고를 담아 나지막이 다시 한 번 입에 올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벽을 보고 눕지를 못해요. 주아가 그 배에 갇혀서 숨 못 쉬었을 생각을 하니까 벽이 내 앞에 있으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요.(24~25쪽-김주아 엄마 정유은)


416 직후 한의원에는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공황이나 우울을 호소하며 찾아오는 환자 수가 다소 늘었다. 그러나 전체 환자 수는 급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는 얼른 이해했지만 후자는 의아해했다. 얼마만큼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찾아온 몇몇 환자가 심경을 토로하면서 궁금증이 풀렸다. 아이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간 상황에서 허리 좀 아프다고 침 맞으러 오는 게 죄스러웠다는 유의 이야기였다. 정색하고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더라도 누구든 이와 비슷한 마음 상태 속에서 꽤 오랫동안 힘들어했으리라.


이게 인간이다. 인간 형상을 했을 뿐 신의 경지에 올라 416을 백안으로 “내려다보신” 분들이 계셨음은 물론이다. 광화문 분향소 앞에서 ‘빨갱이’ 유가족을 단호히 꾸짖었던 기독교 성도들이 그렇고, 치킨으로 성찬예식을 거행하여 ‘단식 쇼’ 중인 유가족을 감화시켰던 일·베 성자들이 그렇고, ‘죽은 자식 정치에 이용하는 파렴치한’ 유가족을 엄히 경책한 자유당 선량들이 그렇다. 이 신들은 교통사고 아닌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차린 416가족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추방당한 인간들을 향한 자비와 공감은 금물이었다.


추방당한 인간들을 향한 자비와 공감으로 찰나에서 영원까지 살아내야 하는 천명이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다. 질병, 특히 마음병 걸린 사람은 사회에서 추방당한 사람이다. 사회적 약자를 생물학적 약자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참 의자醫者로 살려면 정치적 의로움은 필수다. 현실은 판이하다. 주류 양의집단은 태극기부대와 비슷한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주류 한의집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실에 투명한 소수 의자들은 무능으로 내몰리며 익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익명을 강요당하는 삶의 동일한 맥락에서 나는 416아이들과 416가족과 416운동과 416공동체와 416네트워킹혁명을 극진히 맞이하고 모신다. 내 개인의 익명화에 저항하는 일이 416의 익명화를 저지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은 내 인생의 어떤 다른 지평 제시가 아닐까 찬찬히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는 진리가 어떻게 물질적 본질을 지니는지 오달지게 알고자 홀로 앉을 시공간이 미상불 묵직하게 휘지 싶다. ‘4월에는 이별한다.’고 표현했을 만큼 아팠던 이 4월의 마지막 날 밤에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풍경이 자연스러워졌다는 게 어떨 때는 소름끼쳐요. 여전히 가슴이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아이 없는 이 공간에 익숙해져가는 것이 문득문득 속상하고 너무 미안해요. 마음 같아서는 죽을 때까지 이 일상도 낯설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낯설지가 않아요.(23쪽-정예진 엄마 박유신)


낳아주신 엄마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하마 육십년 가까이 되어간다. 폭을 맺지 못한다. 세 번째 계모를 마지막으로 엄마라고 부른 것도 오십년 가까이 되어간다. 엄마라는 말을 내가 입에 올리는 순간 주위 사람들이 갸웃할 것 같다. 기억이 바래지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는가 보다. 상실과 부재의 경계선이 지워질 테니 말이다.


부재가 되어버린 어머니를 내가 그리워할 길은 없다. 어머니 없는 풍경이 본디 내 자연이며 나는 이미 거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박유신에게 정예진이 부재일 수는 없다. 불의한 권력이 강탈해간 딸을 어떻게 부재로 여길 수 있나.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져도 소름끼치는 어떨 때가 있으며, 문득문득 속상하고 너무 미안한 마음이 있는 한, 딸은 상실로 엄존한다.


상실은 끊임없이 각성을 소환한다. 각성은 통증으로 시작된다. 진통제를 거절하면 통증은 생명의 결을 변화시킨다. 통증을 끌어안고 삶을 곡진히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명은 네트워킹이 되어간다. 네트워킹은 입자 통증으로 하여금 파동 장을 이루게 한다. 이 거룩한 역설로 말미암아 상실은 오도의 표지가 되고, 세상은 성숙의 은총에 깃든다. 전패진승全敗眞勝.


엄마가 부재의 실재가 됨으로써 나는 삶의 물질성 또는 몸으로서 삶을 상실했다. 마치 나 자신이 상실의 잔여인 듯하다. 잔여의 삶은 익명의 집요한 경사를 이기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진다. 미끄러짐이 선명하게 감지된다.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하다. 이 미안한 마음에 의지해 스스로 스스로에게 엄마가 되어준다면 내게도 오도와 성숙의 기회가 오지 않겠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마음이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이 세상에는 제가 느끼는 이 상실감을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 같아요.(23쪽-정예진 엄마 박유신)


수백 명이 모인 공개 장소에서 한 소녀가 느닷없이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의 두 뺨을 번갈아 가며 무참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것과 달리 정작 옆에 앉은 엄마는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곡절을 알고 나선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 아파했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는 아이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자신의 의사를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장애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 고통에 그 소녀는 자기 자신을 공격함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하는 엄마 마음은 또 얼마나 갈가리 찢어졌으랴.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앓는 아이가 말이 불가능해서 겪는 고통과 416엄마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 겪는 고통은 본질상 다르지 않다. 말해지지 못하고 표현되어지지 못하는 고통의 치유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에서도 같다. 다른 점이 있다. 416엄마는 반응reaction을 넘어 고통에 감응response한다.


감응은 “표현할 단어가 없는” 한계를 직시하고 부족하나마 할 수 있는 말들을 주고받음으로써 언어의 행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언어의 행간은 치유를 가로막는 견고한 적요가 아니라 치유의 틈을 내는 역동적 고요다. 이 고요가 네트워크를 짓는다. 네트워크는 존재의 근원이다. 존재의 근원을 복원하는 행진의 선두에 416엄마가 있다.


416엄마는 이 세상에 있는 단어로 말함으로써 이 세상에 없는 단어를 고요 속에 전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언어에 기대지 않는 진리[不立文字]를 낳는 위대한 자궁이 된다. 박유신은 정예진을 잃은 고통을 통과하면서 정예진 엄마 너머 숭고 공동체의 엄마로 번져 간다. 골고다 언덕에서 빈 무덤을 미리 본 자 누군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망과 절망의 사이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안전 사회 건설을 위한 ‘416운동’을 견인해온 세월호유가족입니다. 재난 유가족이 이렇게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활동을 펼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 일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유가족은 말합니다. 이렇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요.·······그런데 정말 그것만이 이유일까요.·······

  우리가 싸우는 유가족을 보며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이 펼치고 있는 싸움의 빛깔에 관해서입니다. 그들은 그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정의와 싸우기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지만, 뒤흔들려야 할 것은 세상임을 깨달았습니다.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너와 같은 모두를 살리는 마음으로 넓히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날 이후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구성하며 살아왔습니다.(5-6쪽)


지난 5년 동안 박근혜 패거리를 포함한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세월호참사와 그 희생자에게 보여준 행태 일체는 그대로 고의에 의한 살인죄의 자백이다. 고의가 어느 시점부터 어떻게 작동했든지 간에 저들은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고, 증거를 인멸했고, 진실을 조작했고, 정치에 악용했고, 이득을 취했음이 분명하다. 저들은 오랜 시간 쌓아온 내공 덕에 원톱시스템의 일사불란한 지휘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조직하며, 변신하며, 영속화한다. 목하 자유당과 태극기부대가 준동하는 꼴을 보면 우습다가도 그 뒷배가 무섭다는 생각이 더 깊어진다. 저들의 유치하고 뻔뻔한 자신감은 물경 15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장구한 시간에 걸쳐 저들은 자기 패거리만의 부귀영화를 위해 중앙 권력에서 변두리 유치원까지 지배자 카르텔을 구축했다.


지배자 카르텔이 살해와 수탈의 피바람으로 시공을 쓸고 가는 동안 민중은 대부분 피지배자 프레임에 갇혀 변혁의 확고한 주체로 자리 잡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수없이 명멸했던 민란의 영성은 갑오농민혁명, 3·1혁명, 4·19혁명, 5·18혁명으로 이어지며 성장했다. 마침내 촛불혁명은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국가원수를 파면하고 그 정부를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미증유의 사건 선두에 “‘416운동’을 견인해온 세월호유가족”이 서 있었다. 416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재난 유가족”의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활동”이다. 재난 유가족은 엄밀하게 말하면 권력에 의해 살해되고 버려진 사람들의 공동체다. 버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리데기들의 자발적인 네트워킹이기 때문에 조직 너머 무엇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조직 너머 무엇은 “그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정의와 싸우기로 선택한” 가치요 미학이다. 이 선택은 “세상이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지만, 뒤흔들려야 할 것은 세상임을 깨달”은 데서 나온 결단이다. 이 결단은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너와 같은 모두를 살리는 마음으로 넓히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사는 대동 세상의 추구다. 개인적인 피해자의식에서 벗어나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구성”하려는 혁명이다. 혁명, 그 진정한 발걸음이 “그날 이후” 시작된 것이다. 그날, 2014년 4월 16일은 1500년 매판 범죄의 결산일이자, 단군 이래 가장 웅숭깊은 근원혁명의 발발일이다. 이 경이로운 역설에서 우리 공동체의 도저한 영성, 버림받은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바리사상의 개화가 시작된다. 그 이름 416혁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