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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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416 자체로 살아가기-헌정의 나날


어차피 1, 2년에 끝날 거 아니잖아. 난, 사람 자체가 세월호야. 긴 세월이니 오늘 또 살아내야지.(371쪽- 최윤민 엄마 박혜영)


최윤민이 죽음의 차원으로 실재하므로 박혜영은 오롯이 416 자체일 수 있다. 416 자체가 된 그는 개인적인 삶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영역에서 그는 416의 화신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그의 전인격이 내린 규정이다. 극진한 헌정이다. 이 헌정에 힘입어 최윤민은 공적으로 부활한다.


98. 416 없이도 살아가기-나만의 꿈


수현이가 없는데 내가 뭔가를 해도 될까? 남편은 진상규명 얘기만 하는데 내가 꿈을 꿔도 될까?(373쪽-박수현 엄마 이영옥)


멸절이 아니긴 하지만 박수현은 이영옥의 눈앞에서 분명히 사라졌다. 이영옥의 꿈을 함께할 박수현은 이제 없지만 박수현이 일깨운 이영옥의 꿈은 여기 있다. 여기 있는 이영옥의 꿈을 박수현이 이제 없다고 접어야 하나. 박수현이 없어 이제 나만의 것이 되어버린 그 꿈을 계속 꾸는 것이 옳다. 이 꿈을 통해 박수현은 사적으로 부활한다.


99. 416 곁에서 살아가기-눈물 고인 작은 웃음


큰 행복을 바라지 않아요. 다만 호연이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정말 편하게 웃고·······느끼며 살고 싶어요. (눈물 고인 작은 웃음) 새롭게 행복하고 싶어요.(375쪽- 김호연 엄마 유희순)


김호연은 없지만 있다. 없지만 있는 김호연이라서 유희순은 눈물 고인 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일상에서 감지함으로써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새로운 행복이다. 절대 상실을 관통한 역설의 행복이다. 욕심이 씻겨나간 맑은 기품을 지닌 삶에서 피어오르는 향이다. 그 향에 어우러져 김호연과 유희순은 공동체로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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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스템으로는 세월호가 끊임없이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368쪽- 곽수인 엄마 김명임)


마고사키 우케루가 쓴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에 따르면 미국의 일본 지배도구는 언론과 검찰이었다. 미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부패 관련 정보를 언론에 흘려주면 언론이 스캔들로 만들고 이것을 검찰(동경지검 특수부)이 수사해서 자주파를 제거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사회 각계에 포진해 있는 친미파 인사들의 광범위한 백업이 ‘인프라’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낯익은 풍경 아닌가.


35년 동안 지속된 일제 식민 통치와 이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식한 미군정이 대한민국 통치의 실질 체제이므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첩적이다. 매판집단은 응당 친일파, 친미파 둘이다. 물론 둘의 경계는 모호하거나 없다고 봐야 하지만 구태여 둘이라고 하는 것은 의존과 착취가 이중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매판집단의 자체적인 힘도 훨씬 강고해 시스템을 굴리는 독자적 기술을 지닌다.


지구 최강의 매판집단이 존재하는 한 이 땅에서 416은 되풀이될 것이다. 안전사고를 가장한 이런 제노사이드만 416인 것은 아니다. 부도덕한 ‘강남좌파’의 위선을 까발려 공정과 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체 하면서 자주정서에 찬물을 끼얹고 진보의지에 허무 바이러스를 살포함으로써 공동체 일각을 허물어버린 이른바 조국사태도 다른 버전의 416임을 대다수가 모른다. 저들은 갈수록 교활해질 것이다.


매판이 교활해질수록 우리사회의 문제의식은 난잡하게 왜곡된다. 이 땅 언론과 지식인이 현 상황에서 ‘강남좌파’ 문제를 돋을새김 하고 나서는 것은 프랑스 언론과 지식인이 ‘캐비아 좌파’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과 사뭇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나라 말아먹은 매판이 전선을 조작하고 교란하는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왜곡을 조장해 시대정신을 소리 없이 살해하는 것은 얼마나 영악한 416이랴.


전방위·전천후의 416들은 미래의 공포가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미래로 밀어 놓는 것뿐이다. 감각을 열면 416들은 시시각각 느껴지는 현재의 고통이다. 삼성은 연말정산 내역을 뒤져 진보 성향 사회단체에 기부한 임직원 수백 명을 색출했다. 쌍용은 복직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고 무급휴직 노동자 47명에게 무기한 휴직 연장을 통보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매판의 발길질은 들이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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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에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게 전문가를 통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전문적인 조사예요. 하지만 내가 자꾸 전문가들을 비판하게 되는 게 뭐냐면, 전문가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테두리 안에 세월호 참사를 끌어와서 그 테두리 안에서만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자기가 설명을 못하잖아요? 그러면 그걸 부정하는 거야. 그 사람들 머릿속에는 세월호 참사의 모습은 이런 것이라는 상이 이미 정해진 거죠.(362쪽-예은 아빠 유경근)


식민지와 군부 통치를 찬양했던 시인 서정주가 생전에 변명이랍시고 한 말이 “정치 백치”였다. 내게는 이 말이 범죄자가 출구전략으로 써먹는 “심신 미약”과 같은 것으로 들린다. 정치에 백치는 있을 수 없다. 불의한 통치에 자발적·능동적으로 부역하는 것이 백치인가. 어찌 서정주뿐이랴. 수많은 예술가, 학자, 기술인들이 전문가 알리바이에 기대어 근현대사의 질곡을 뻔뻔하게 웃으며 통과했다. 지금도 그렇다. 기사 조훈현이 대표적인 예다.


416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전문가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가령 백남기 선생의 사인을 규명할 때 물대포가 직접 원인이 아니라고 진단한 양의사 백선하를 전문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가 다른가. 왜 죽였는지를 묻는데 배 타령하는 게 전문가인가. 정말 전문가는 박근혜 패거리가 어떻게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일으키고 조작했는지,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했는지를 밝히는 사람 아닐까. 물적 증거를 지닌 사실의 조합 너머 인간의 의도와 행위까지 결합된 전체 서사로서 진실을 드러내는 사람 아닐까. 전문가 역설이다.


전문가 아닌 전문가가 반드시 전체를 지휘·감독해야 한다. 416을 정치적 범죄로 보는 관점 없이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 아닌 전문가는 정치적 범죄의 피해 당사자다. 피해자의 눈으로 보지 않는 객관성과 중립성은 속임수다. 본디부터 없었다며 청맹과니 전문가가 찾지 않는 증거, 그러니까 박근혜 패거리가 인멸시킨 증거를 구성적으로 상상하고 발견하는 눈을 지닌 유가족이야말로 416진실 규명의 수승한 전문가다.


현실에서는 이런 이치가 통하지 않는다. 촛불시민도 촛불정부도 살아 있는 권력이 아니다. 살아 있는 권력은 언제나 그렇듯 매판 본진이다. 매판 본진이 허락하지 않는 어떤 일도 이 땅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냉철하게 따지면 특조위가 아무리 애쓰더라도, 검찰특수단은 일부러 그렇게 할 테여서, 핵심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패배의 불길한 예감을 안고서도 유경근이 싸우는 까닭은 뭔가. 처절한 패배마저 보이지 않는 416진실을 깊은 실재로 살아 있게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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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sérénité, c'est l'acceptation de soi-même et de ce qui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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