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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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의 가장 전통적인 기능 중의 하나는 사회개혁이다. 비판으로 인간의 잘못을 고치게 할 수는 없지만 풍자로는 가능하다. 이 경우 적대는 고상하고 정중한 결말로 이어진다.(74쪽)


415총선은 위대한 우스개였다. 이 우스개는 이름도 입도 없는 민중이 표 하나로 구사한 추상같은 풍자였다. 나경원·김진태·민경욱·이언주가 아무리 막말을 해도 민중은 비판하지 않았다. 조용히 투표장 가서 발열 체크 받고 비닐장갑 끼고 꾹 한 번 눌렀을 뿐이다. 다음날이 밝기 전에 나경원·김진태·민경욱·이언주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조선일보프레임 언론과 윤석열 검찰, 그리고 미통당이 총선을 겨냥해 작심하고 벌인 이른바 조국전쟁을 지켜보면서 민중은 저들을 비판하지 않았다. 조용히 투표장 가서 발열 체크 받고 비닐장갑 끼고 꾹 한 번 눌렀을 뿐이다. 다음날이 밝기 전에 조선일보프레임 언론과 윤석열 검찰, 그리고 미통당은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이른바 조국전쟁을 거치면서 뜨르르한 진보지식명망가 최장집·홍세화·김누리·강준만·진중권은 조국과 문재인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민중은 저들의 비판 또한 비판하지 않았다. 조용히 투표장 가서 발열 체크 받고 비닐장갑 끼고 꾹 한 번 눌렀을 뿐이다. 다음날이 밝기 전에 최장집·홍세화·김누리·강준만·진중권은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웃음거리가 된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저들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태도를 바꾼 것은 민중이다. 민중은 스스로의 우스개로 스스로를 저들과 함께 웃음거리가 되게 함으로써 유쾌하게 판을 뒤집어버렸다. 실제로 어떤 자가 이번 선거를 개돼지의 선거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 나 개돼지다. 개돼지가 만든 판에서 어디 한번 놀아봐라."


촛불은 촛불이라서, 선거는 선거라서 한계가 있다고 그때마다 나서서 촐싹거리던 똑똑하고 잘난 자들을 묵묵히 견딘 결과, 민중은 시나브로 “고상하고 정중한” 치유 도정에 스스로를 놓아가고 있다.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영혼을 더럽힐 수밖에 없었던 치욕과 그 죄의식을 걷어내며 민중은 웃음의 지성소를 되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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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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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과 리얼리즘의 연결 자체는 도발적이다. 유머가 지배욕과 소유욕을 진정시킴으로써 욕구와 필요의 강박에서 해방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도록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자기 계획의 일환일 뿐, 더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실제로 웃는 몸은 그 같은 작용을 할 수 없다.·······희극은 위협적인 분위기를 떨쳐냄으로써 세상사를 더 가깝게 만들지만, 그와 동시에 깊은 감정을 사라지게 한다. 요란스런 요구나 욕망과 무관하게 파악할 수 있는 지점으로 현실을 밀어낸다. 즉각적 실천을 면제한다는 측면에서 유머는 예술과 한 맥락이다.(63-64쪽)


우스개는 삶이 우스꽝스러운 유희이며 우아한 방기放棄라는 진실을 일깨우는 소식 놀이다. 소식 놀이에는 질량이 존재하지 않는다. 질량 없는 놀이에 빠진 몸은 “작용을 할 수 없다.” 작용할 수 없는 몸에서 “깊은 감정”은 사라진다. 깊은 감정이 사라진 몸은 “현실을 밀어낸다.


현실을 부둥켜안고 “즉각적 실천”에 돌입하려면 몸이 깊은 감정을 담고 있어야 한다. 깊은 감정이란 실천의 에너지로 전화할 질량 정서다. 이 질량 정서 유발은 우르개의 몫이다. 우르개는 삶이 엄숙한 과업이며 숭고한 저항이라는 진실을 전해주는 기운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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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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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현대철학자인·······미하일 바흐친·······이 보기에 웃음은 우스꽝스러운 일을 향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독특한 앎의 형태이기도 하다. 웃음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있다.”라고 그는 서술했다.

  웃음은 전체인 세계, 역사와 인간에 관한 진리의 본질적 형태 가운데 하나다. 세계와 관련한 고유한 시각이다. 엄숙함의 관점에서 볼 때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세계가 온전하게 다시금 새로이 보인다. 따라서 웃음은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에 엄숙함만큼이나 위대한 문학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다. 이 세계의 본질적인 어떤 측면들은 오로지 웃음만 접근 가능하다.(58-59쪽)


전체인 세계, 역사와 인간에 관한 진리의 본질적 형태”는 “웃음” 그리고 “엄숙함”, 그러니까 울음의 둘이다. 이 둘의 화쟁은 해체와 구축, 놀이와 일, 발산과 수렴, 평등과 자유, 허령虛靈과 곡진曲盡, 공空과 색色·······무궁무진한 비대칭의 대칭 작용으로 번져간다. 그런데,


어째서 웃음의 관점에서 보면 엄숙함의 관점에서 본 세계보다 “어쩌면 훨씬 더” “온전하게 다시금 새로이” 드러날까? 마사 누스바움을 참고한다.


우리에게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포클레스보다 멀게 느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훌륭한 유머는 일반적으로 친근한 맥락과 그때그때의 상황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정치적 감정』 460쪽)


친근한 맥락과 그때그때의 상황은 구체적인 생생함·신선함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시의성과 적소성을 갖춘 해체는 이제와 여기서 생생하고 신선한 새 세계로 우리를 열어놓는다. 이제와 여기가 매순간 다시 창조되는 사건임은 물론이다. 해체는 누적이 아니다. 해체는 진화가 아니다.


누적·진화 불가한 우스개는 카이로스 진리를 각각의 특이점에 현창하는 빛 알갱이들의 눈부신 놀이다. 놀이의 “깊은 철학적 의미”는 “감각”(53쪽)에 헌정된다. 감각에 질량이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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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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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 무대는 분열적인 내용으로 균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형식면에서 질서와 계획의 감각을 지켜낸다. 내용은 풍자적이거나 악마적인데 반해, 형식은 유토피아적이거나 천사적인 것이다. 한 편의 희극 작품은 끝에 가면 전자 상태에서 후자 상태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런 움직임은 상징적 질서 내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중심축으로 전개될 수도 있으나, 궁극의 목적은 바로잡고 복원하고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 희극은 질서 희극으로 대체된다. 천사적인 것은 악마적인 것의 결과에 부수하여 발생한다. 다만, 투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57-58쪽)


이 문단의 테리 이글턴을 따를 때, 희극이 분열에서 조화로, 악마에서 천사로, 위기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논리를 구성할만한 단서란 “질서와 계획의 감각을 지켜낸다.”와 “궁극의 목적”뿐이다.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질서와 계획의 감각을 지켜낸다고 하면 둘은 하나로 결합된다. 이때 부딪히는 것이 “결과에 부수하여 발생한다.”는 말이다. 목적론적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게다가 마지막에 툭 떨어뜨린 한 문장은 알리바이 용 같기도 하고, 해야 할 뒷말을 잘라버린 무책임한 말 같기도 하다. 정작 큰 문제는 그 “투쟁”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맥상 투쟁은 부수와 맞서는 말일 텐데, 목적론적 설정이라면 이 문장은 더욱 어정쩡해 보인다.


이 어정쩡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궁극의 목적이 “바로잡고 복원하고 조화를 이뤄내는 것”인가? 무엇을 바로잡는가? 무엇을 복원하는가? 무엇과 조화를 이뤄내는가?


1. 바로잡는다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전제로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분열과 풍자, 그리고 악마가 잘못되었는가? 분열과 풍자, 그리고 악마를 야기한 천사가 잘못되었는가? 귀결이 질서라면 답은 자명해진다. 분열과 풍자, 그리고 악마가 잘못되었다. 과연 그런가? 그러면 애당초 희극이 존재할 이유는 ‘들러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면 바로잡는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새겨야 한다. 바로잡는다는 것은 악마를 바로잡아 천사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악마가 뛰어든 역사는 100% 천사세계도 아니고 100% 악마세계도 아닌 세계를 열어젖힌다. 역설세계다. 신神세계다. 진정한 인간세계다. 바로잡는 것은 접힌 부분세계를 전체세계로 펼치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이 길을 잃었나.


2. 복원한다는 것은 돌이켜야 할 원형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무엇이 원형인가? 질서정연한 유토피아, 저 천사세계인가?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면 복원한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새겨야 한다. 복원한다는 것은 악마가 휘저어 혼란해진 세계를 천사세계로 되돌려놓는다는 것이 아니다. 악마가 일깨운 역사는 100% 천사세계도 아니고 100% 악마세계도 아닌 본디 세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복원하는 것은 조각난 부분세계를 본디 전체세계, 그러니까 역설세계·신神세계·진정한 인간세계에 이어붙이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이 또 길을 잃었나.


3. 조화를 이뤄낸다는 것은 불화가 있고, 그 불화가 나쁘다는 것을 전제한다. 풍자와 분열이 일어났으니 불화는 당연히 있다. 그 불화는 나쁜가? 불화의 답이 그래서 조화인가? 설마. 그럴 리가. 예컨대 우울증의 답이 조증일 리 없다. 더군다나 악마와 천사가 조화를 이루다니. 조화는 근본적으로 비非개념이다. 악마적인 것과 천사적인 것의 모순적 공존이 있을 따름이다.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고 은유로 소통할 따름이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네트워킹 할 따름이다. 테리 이글턴이 끝내 길을 잃었나.


애당초 희극이 일어난 것은 천사의 유토피아독재 때문이다. 천사의 유토피아독재는 실재가 아니라 과잉 진화한 인간 자아가 만든 압제적 관념이다. 이 압제에 균열을 내려고 던지는 돌팔매가 희극이다. 그런 희극이 꿈꾸는 세상은 확정 질서의 왕국이 아니라 불확정 약동의 공화국이다. 불확정 약동의 공화국에서 위기와 질서가 서로 극단의 프로세스를 구사하는 경우란 없다. 적절히 기우뚱한 균형을 잡으면서 인간의 공적참여와 사적행복을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준다.


불확정 약동의 공화국은 웃음과 울음을 인간자연이게 한다. 우스개와 우르개는 잠정적 사건이다. 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어정쩡함에서 뛰어내려 모호한 진리의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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