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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평점 :
희극 무대는 분열적인 내용으로 균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형식면에서 질서와 계획의 감각을 지켜낸다. 내용은 풍자적이거나 악마적인데 반해, 형식은 유토피아적이거나 천사적인 것이다. 한 편의 희극 작품은 끝에 가면 전자 상태에서 후자 상태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런 움직임은 상징적 질서 내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중심축으로 전개될 수도 있으나, 궁극의 목적은 바로잡고 복원하고 조화를 이뤄내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 희극은 질서 희극으로 대체된다. 천사적인 것은 악마적인 것의 결과에 부수하여 발생한다. 다만, 투쟁이 없는 것은 아니다.(57-58쪽)
이 문단의 테리 이글턴을 따를 때, 희극이 분열에서 조화로, 악마에서 천사로, 위기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논리를 구성할만한 단서란 “질서와 계획의 감각을 지켜낸다.”와 “궁극의 목적”뿐이다.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질서와 계획의 감각을 지켜낸다고 하면 둘은 하나로 결합된다. 이때 부딪히는 것이 “결과에 부수하여 발생한다.”는 말이다. 목적론적 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게다가 마지막에 툭 떨어뜨린 한 문장은 알리바이 용 같기도 하고, 해야 할 뒷말을 잘라버린 무책임한 말 같기도 하다. 정작 큰 문제는 그 “투쟁”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맥상 투쟁은 부수와 맞서는 말일 텐데, 목적론적 설정이라면 이 문장은 더욱 어정쩡해 보인다.
이 어정쩡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궁극의 목적이 “바로잡고 복원하고 조화를 이뤄내는 것”인가? 무엇을 바로잡는가? 무엇을 복원하는가? 무엇과 조화를 이뤄내는가?
1. 바로잡는다는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전제로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분열과 풍자, 그리고 악마가 잘못되었는가? 분열과 풍자, 그리고 악마를 야기한 천사가 잘못되었는가? 귀결이 질서라면 답은 자명해진다. 분열과 풍자, 그리고 악마가 잘못되었다. 과연 그런가? 그러면 애당초 희극이 존재할 이유는 ‘들러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면 바로잡는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새겨야 한다. 바로잡는다는 것은 악마를 바로잡아 천사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악마가 뛰어든 역사는 100% 천사세계도 아니고 100% 악마세계도 아닌 세계를 열어젖힌다. 역설세계다. 신神세계다. 진정한 인간세계다. 바로잡는 것은 접힌 부분세계를 전체세계로 펼치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이 길을 잃었나.
2. 복원한다는 것은 돌이켜야 할 원형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무엇이 원형인가? 질서정연한 유토피아, 저 천사세계인가?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면 복원한다는 말의 의미를 달리 새겨야 한다. 복원한다는 것은 악마가 휘저어 혼란해진 세계를 천사세계로 되돌려놓는다는 것이 아니다. 악마가 일깨운 역사는 100% 천사세계도 아니고 100% 악마세계도 아닌 본디 세계를 되돌아보게 한다. 복원하는 것은 조각난 부분세계를 본디 전체세계, 그러니까 역설세계·신神세계·진정한 인간세계에 이어붙이는 것이다. 테리 이글턴이 또 길을 잃었나.
3. 조화를 이뤄낸다는 것은 불화가 있고, 그 불화가 나쁘다는 것을 전제한다. 풍자와 분열이 일어났으니 불화는 당연히 있다. 그 불화는 나쁜가? 불화의 답이 그래서 조화인가? 설마. 그럴 리가. 예컨대 우울증의 답이 조증일 리 없다. 더군다나 악마와 천사가 조화를 이루다니. 조화는 근본적으로 비非개념이다. 악마적인 것과 천사적인 것의 모순적 공존이 있을 따름이다. 서로의 경계를 인정하고 은유로 소통할 따름이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네트워킹 할 따름이다. 테리 이글턴이 끝내 길을 잃었나.
애당초 희극이 일어난 것은 천사의 유토피아독재 때문이다. 천사의 유토피아독재는 실재가 아니라 과잉 진화한 인간 자아가 만든 압제적 관념이다. 이 압제에 균열을 내려고 던지는 돌팔매가 희극이다. 그런 희극이 꿈꾸는 세상은 확정 질서의 왕국이 아니라 불확정 약동의 공화국이다. 불확정 약동의 공화국에서 위기와 질서가 서로 극단의 프로세스를 구사하는 경우란 없다. 적절히 기우뚱한 균형을 잡으면서 인간의 공적참여와 사적행복을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준다.
불확정 약동의 공화국은 웃음과 울음을 인간자연이게 한다. 우스개와 우르개는 잠정적 사건이다. 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우리는 어정쩡함에서 뛰어내려 모호한 진리의 창공으로 날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