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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평점 :
가장 위대한 현대철학자인·······미하일 바흐친·······이 보기에 웃음은 우스꽝스러운 일을 향한 반응일 뿐만 아니라, 독특한 앎의 형태이기도 하다. 웃음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있다.”라고 그는 서술했다.
웃음은 전체인 세계, 역사와 인간에 관한 진리의 본질적 형태 가운데 하나다. 세계와 관련한 고유한 시각이다. 엄숙함의 관점에서 볼 때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세계가 온전하게 다시금 새로이 보인다. 따라서 웃음은 보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에 엄숙함만큼이나 위대한 문학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다. 이 세계의 본질적인 어떤 측면들은 오로지 웃음만 접근 가능하다.(58-59쪽)
“전체인 세계, 역사와 인간에 관한 진리의 본질적 형태”는 “웃음” 그리고 “엄숙함”, 그러니까 울음의 둘이다. 이 둘의 화쟁은 해체와 구축, 놀이와 일, 발산과 수렴, 평등과 자유, 허령虛靈과 곡진曲盡, 공空과 색色·······무궁무진한 비대칭의 대칭 작용으로 번져간다. 그런데,
어째서 웃음의 관점에서 보면 엄숙함의 관점에서 본 세계보다 “어쩌면 훨씬 더” “온전하게 다시금 새로이” 드러날까? 마사 누스바움을 참고한다.
우리에게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포클레스보다 멀게 느껴지는 것 같다. 왜냐하면 훌륭한 유머는 일반적으로 친근한 맥락과 그때그때의 상황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정치적 감정』 460쪽)
친근한 맥락과 그때그때의 상황은 구체적인 생생함·신선함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시의성과 적소성을 갖춘 해체는 이제와 여기서 생생하고 신선한 새 세계로 우리를 열어놓는다. 이제와 여기가 매순간 다시 창조되는 사건임은 물론이다. 해체는 누적이 아니다. 해체는 진화가 아니다.
누적·진화 불가한 우스개는 카이로스 진리를 각각의 특이점에 현창하는 빛 알갱이들의 눈부신 놀이다. 놀이의 “깊은 철학적 의미”는 “감각”(53쪽)에 헌정된다. 감각에 질량이 존재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