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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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은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공통된 행동양식과 자각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나는 인간사의 일반적인 그림이다.·······관심의 초점을 한 개인에서 전체적인 패턴으로 전환하고·······거리를 두면서 정서적 반응을 솎아내는 것이다.·······즉 단일 현상을 처리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는 고통이 아니라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이중화doubling다. 우리는 각각의 상황이 서로 다르리라 예상한다. 우연히 뜻밖의 동일성을 발견하면 어긋나 있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87-88쪽)


이 문맥의 핵심 문구는 뜻밖에도 “정서적 반응을 솎아내는 것”이다. “행동양식” “반복” “패턴” “이중화” “동일성” 같은 중요한 단어는 정서적 반응을 솎아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정서적 반응을 솎아내는 것은 “감정이입”(89쪽) 또는 “공감”(89쪽)을 차단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이나 공감을 정확한 한 단어로 바꾸어야 한다. 감동. 우스개가 일으키는 재미는 「감동感動 없는 동감同感」이다.


동감이 없으면 우스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선행하면서 더 중요한 것이 감동이 있으면 재미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감동은 “단일 현상을 처리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 그러니까 “깊은 감정”(64쪽)을 요구한다. 그 깊은 감정이 재미를 잡아먹는 포식자다. 그 포식자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한 소식이 우스개다.


우스개는 “서로 다르리라 예상한” “각각의 상황”에서 동일성을 찾아내 상황의 심각성을 제거함으로써 안심하고 재미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까꿍 놀이를 가지고 이치를 들여다보자.


엄마 얼굴이 사라지고 그것이 끝이라면 아기의 공포와 울음으로 상황은 종결된다. 공포가 울음을 폭발시키기 직전 엄마 얼굴이 “까꿍” 소리와 함께 나타난다면 아기는 놀람과 기쁨의 웃음을 터뜨린다. 이 최초의 “까꿍”은 우스개가 아니고, 아기 웃음은 즐거움이 아니다. 여기는 아직 감동의 누리다. 한 번 더 반복되면서부터 “까꿍”은 우스개로 작용하며, 아기는 즐기기 시작한다. 이제 여기는 감동 없는 동감의 누리다.


이쯤에서 오늘 이야기를 접어도 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본다. 까꿍 놀이를 통해 아기가 즐기는 것이 헤어졌던 엄마를 다시 만나는 환희인가? 설마. 그럴 리가. 그 환희는 헤어짐을 전제한다. 다시 만나는 것이 패턴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헤어짐을 즐기는 것이다. 심지어 우스개가 바라보는 곳은 더 너머까지다. 엄마와 헤어지는 공포와 슬픔의 운명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하는 바로 그것. 우스개를 통해 운명에서, 놀이를 통해 현실에서 심각함·진지함의 독을 빼는 일이 우스개의 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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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나무와 어떻게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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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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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세계는 그런 사실을 온전히 앎으로써 긍정된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낯섦을 마주할 때 오는 심리적 불편함과 불쾌함에서 우리를 구원한다.·······세계를 소상히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이런 확고한 안심감은 여러 경험 가운데 본질적으로 가장 희극적이다. 웃긴다는 의미에서 희극적이라 한 게 아님은 물론이다. 유머는 그로부터 길러지는 평정심에서 흘러나올 수 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도처의 불행과 차분하게 거리를 둔 채 파국을 맞고 피하는 것이 자연 섭리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현실을 어떤 장엄한 예술품처럼 보는 것이다.(86-87쪽)


[앎-안심감·평정심-현실을·······예술품처럼 보는-거리를 둔-희극] 키워드를 원형대로 열거한 것이다. 조금 정리하면, [인지·인용認容-안심감·평정심-심미적 자세-소격효과-우스개]가 된다. 이 연결 과정에는 의문 하나가 존재한다. 낯섦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앎인데, 그 앎이 다시 소격효과, 그러니까 낯설게 하기를 유발한다. 대체 무슨 일인가?


여기 앎은 단순한 알아차림이 아니다. 거기에는 받아들임이 포함된다. 인지·인용이라고 조금 바꾼 까닭이 여기 있다. 인지는 본질적이든 역사적이든 이 세계에 “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인용은 잔인함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 세계의 어떤 궁극 지점에 우리 실천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받아들임은 평정심을 전제로 한 실천의 무자비한 축소다. 현실을 실천의 스케일 밖으로 밀어내는, 그러니까 “장엄한 예술품처럼” 보는 “심미적 자세”(86쪽)에서 나온다. 심미적 자세가 거두는 소격효과다. 소격효과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우스개다. 우스개의 사람은 예술품으로 여기는 세상 속에서 예술적 인생을 살아간다. 밥이 나오느냐는 별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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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 화장실쪽 벽에 담쟁이가 새잎2020을 피워 올리고 있다. 옆 건물과의 사이가 좁아 하루 고작 십 분가량 햇빛을 받는 곳이라 그 눈부신 연두에는 계절의 간절함이 담긴 듯도 하고 카르페 디엠의 유쾌함이 담긴 듯도 하다. 비극과 희극의 지성소는 같은 곳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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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 - 농담과 유머의 사회심리학
테리 이글턴 지음, 손성화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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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극은·······무자비한 축소의 제스처를 포함한다. 즉 허무와 치유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밟아 뭉갠다.(80쪽)


<5. 가면 벗기 또는 벗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면을 벗으면 된다.·······예수는 신의 가면을 벗고 인간이 되었다. 죄 없는 인간의 가면을 벗고 사형수로 죽었다. 죽음의 가면을 벗고 무덤을 비웠다. 부활의 가면을 벗고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거점마저 지웠다. “나를 만지지 마라!” 우주 최강의 유쾌한 우스개다.


가면은 뭔가? “축소”의 타깃인 거대와 의미다. 거대는 본디 허구다. 의미는 당최 없다. 이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 우스개다. 우스개는 찰나적으로 인간 존재의 거점을 아득한 허무 속에 던진다. 허무 속에서 가뭇없이 존재의 거점이 지워져나가는 인간을 향해 신의 마지막 말씀이 날아든다. “나를 만지지 마라!” 신이 친히, 그것도 먼저 존재의 거점을 지운다는 선포다. “허무와 치유 사이의 가느다란 선을 밟아 뭉갠” 우주 최강 “무자비”다. 무자비한 이 말씀 한마디로 허무와 치유의 지평은 융해된다. 역설의 절정에서 터져 나오는 욼음과 함께 웅대한 신화는 소미한 역사로 완성된다. 장엄 쥐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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