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더군다나 문학적 글쓰기는 감불생심. 루시아 벌린을 읽으면서 단편소설 쓸까 하는 생각이 벼락치듯 일어났다. 내 생에 일어났던 일 가운데 숙의치료 부분부터 손을 대기 시작했다. 미리 써둔 글을 바꾸는 일이었으므로 생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쉽다고 판단한 것이다. 20여 일에 걸쳐 간단한 초벌 작업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이것이다. 본디 글은 <망상이라도 좋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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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자의 길을 가다보면 순간순간 전능한 존재가 되는 망상에 잠깁니다. 고통 가운데 망가져가는 사람의 참담한 모습, 좀처럼 변하지 않는 상황을 보면서도 이렇다 할 수를 내지 못하고 뭔가 계속 말해야 할 때, ‘손을 얹은 즉 병이 나았더라.’는 신약성서 속의 예수가 되는 헛꿈을 꿀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도 이제도 다음도 모두 사기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회의가 밀려들면 모든 생각이 확 뭉그러집니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들어섰습니다. 복잡하고 거대한 강박증후군에 시달려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습니다. 5가지 화학합성약물을 처방 받아 복용하고 있었습니다. 효과는 미미한데 부작용이 뚜렷하고 다양해 약을 먹는 것인지 독을 먹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나마 약이라도 먹는다는 심리적 위안 때문에 끊지도 못한 채, 부작용으로 100kg이 넘어버린 몸을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학령기 이전 시골마을에서 누군가 개를 잡아 내장 손질하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고 충격 받은 이래 결벽 경향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노인에게 성추행을 당해 그 경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급기야 중학생 시절에는 야동을 접하고 다양한 더러움(!)에 치를 떤 이후 완연히 병적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몇 시간씩 쏜을 씻어댔습니다. 자위행위를 하고 나면 손과 성기가 더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씻고 확인하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소변을 보고도 그랬습니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 의식이 번갈아 찾아들면서 성기를 확인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대처하는 데 미숙했던 부모는 강제로 그를 정신병원 또는 수용시설에 4차례나 가두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기도원 같은 곳에 감금해 놓고 결벽을 도리어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학교는커녕 그 어떤 외부 활동도 불가능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게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와 상담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저의 치료 방식과 효과에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강한 신뢰를 표시했습니다. 그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상담에 임했습니다. 한두 달 만에 상황은 몰라보게 호전되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외부 생활을 조금씩 재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안정에 도달하자 더 이상은 진전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느 하나가 좋아지면 다른 하나가 불쑥 나타나는 방식으로 헛돌면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저도 그도 서로 안타까워하며 힘을 내었으나 좀처럼 타개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시나브로 지쳐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달리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간절한 마음이 되어 대상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참담할 따름이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일심으로 수련하면 기적의 영성을 획득할 수 있으려나, 부질없는 상념이 무시로 스며들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쌓여만 가는 치료비 때문에 미안했고, 저는 나아지지 않는 게 미안했습니다. 서로 격려하며 견뎌온 연대는 는적는적 끊어져갔습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던 바로 그 무렵 저는 개인적으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아 삶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에게로 뻗었던 손을 지탱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의원을 닫았습니다.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습니다. 소년티 그대로 묻어 있는 그의 선한 눈매가 이따금씩 떠오르면 전능한 신이란 정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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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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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섯 살 무렵, 누군가가 죽은 개 내장 주무르는 광경을 우연히 목격하고 크게 충격 받았다. 그 때문에 결벽증이 자리 잡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노인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그 증상은 더욱 강해졌다. 급기야 중학생 시절, 야동을 통해 들이닥친 강도 높은 음란함을 더러움으로 인식한 이후, 극심한 병적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하루 7-8시간씩 피가 나도록 손을 씻어댔다. 자위행위를 하고 나면, 손과 성기가 더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씻고 확인하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소변을 보고도 그랬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 의식이 번갈아 찾아들면서 성기를 확인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확인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때리기도 했다.
이런 상태를 대처하는 데 미숙했던 부모는 강제로 나를 정신병원 또는 유사한 수용시설에 4차례나 가두었다. 심지어 개신교 기도원 같은 곳에 감금해 놓고 결벽을 도리어 부추기기도 했다. 결국 복잡하고 거대한 강박증후군에 시달려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졌다. 5가지 화학합성약물을 처방 받아 복용했다. 효과는 미미한데 부작용이 뚜렷하고 다양해, 약을 먹는 것인지 독을 먹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약이라도 먹는다는 심리적 위안 때문에 끊지도 못한 채, 부작용으로 100kg이 넘어버린 몸을 견뎌내고 있었다. 학교는 진즉 그만두었고 아예 외부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천신만고 끝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가 찾아간 사람이 바로 숙의치료자 ㅂㅇ.
ㅂㅇ는 극진히 나를 대했다. 나는 그의 치료 방식과 효과에 매우 놀랐다. 강한 신뢰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혼신의 힘을 다해 치료에 임했다. 한두 달 만에 상황은 몰라보게 호전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외부 생활을 조금씩 재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안정에 도달하자, 더 이상은 진전이 되지 않았다. 어느 하나가 좋아지면 다른 하나가 불쑥 나타나는 방식으로 헛돌면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나도 그도 서로 안타까워하며 힘을 내었으나, 좀처럼 타개되지 않았다. 나는 시나브로 지쳐갔다.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그에게조차 갈 수 없는 상태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어렵사리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석 달 째 못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습니다.
도통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가난했던 나의 부모는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수백 만 원이 밀려 있기까지 했다. 나는 이래저래 그에게 미안했지만 달리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도리어 내게 미안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치료연대는 그렇게 는적는적 뭉그러져갔다. 얼마쯤 지나 짤막한 그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의 진료소가 없어졌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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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량미달, 아니 아예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말이 되는 것은 이 작업을 하는 그 20여 일 동안 내 삶에 분명하고 구체적인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글들을 문학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이 변화하는 과정의 증언으로 삼기 위해서 계속해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