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내 인생은 열린 책 + 청소부 매뉴얼 - 전2권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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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무엇인가이후 한 달 보름 동안 리뷰를 쓰지 않았다. 4천 쪽 분량의 책들을 천천히 읽기만 했다. 특히 지난 2주 동안은 루시아 벌린과 밀착해 있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내 생각은 복잡했다. 비대칭의 대칭 사유구조가 팽팽히 형성되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백지 상태 속에 놓이곤 했다. 와중에 나는 구체적인 변화의 단서를 낚아챘다. 그 변화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불현듯 루시아 벌린 이야기의 틈이 열렸다.

 

먼저 발견한 것은 내 인생은 열린 책인데 먼저 읽은 것은 청소부 매뉴얼이다. 온갖 찬사를 물리치고 맨얼굴로 루시아 벌린을 만났다.

 

외국 작가와 만날 때 언제나 그렇듯 루시아 벌린과도 한참을 버성겼다. 번역 문제도 분명히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외국어 자체의 문제다. 다른 언어가 자아내는 사회역사의 생경함은 독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이해와 감흥의 즉시성을 앗아가기 일쑤다. 대체 이런 글을 왜 쓰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쓰는 걸까, 하는 의문이 수시로 덮친다. 가장 가려운 것은 서구의 자랑인 유머가 도처에 깔려 있는데 즐기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번역자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각주를 다는 것도 좋지만 원문을 병기하는 것이 더 나은 친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훼방꾼을 제치고 루시아 벌린의 체취가 맡아지는 거리까지 왔을 때, 내게 가장 뚜렷하게 일어난 변화는 단편소설 쓰고 싶다였다. 열네 살 때 단편소설 하나를 쓴 뒤 처음 든 생각이었다. 며칠 뒤, 나는 출판을 거절당해 묶여 있는 내 의학 저술의 구조와 내용 전반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단편소설집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물론 대단히 황당한 짓임에 틀림없지만, 내게는 이 변화를 말하는 것이 루시아 벌린을 달리 표현한 어떤 말보다 결곡 곡진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 저 황당한 짓거리를 계속하는 내내 루시아 벌린의 삶, 그 모호함과 내 자신의 삶, 그 명료함을 대면시켜볼 작정이다. 이미 그 한계의 어떠함을 알고 있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다. 아니다. 큰 함정이다. 큰 함정에 빠질 것이므로 계속 대면시킨다. 그것이 루시아 벌린에 대한 나만의 예의다.

  

루시아 벌린이 평생 남긴 단편은 모두 77개다. 내가 써 놓았다는 그 의학 책도 숙의치료 임상 기록을 77편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 주된 내용이다. 내 변화를 이 이야기에서 시작하기로 한 까닭이 바로 이 숫자의 우연적 비본질적 일치 때문이다. 이런 유치함을 마다않고 품은 것은 루시아 벌린의 삶을 관류하는 어떤 천치미학의 울림 탓이다.

 

천치미학이란 표현은 자기 삶을 이끄는 어떤 주술적 에너지와 파동을 따라 계산하거나 흥정하지 않은 채 무심히 번져가는 루시아 벌린의 영혼에 가닿았을 때 문득 떠오른 말이다. 내가 처음 품었던 의문, “대체 이런 글을 왜 쓰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쓰는 걸까는 루시아 벌린의 영혼에 다가갈수록 대체 이런 삶을 왜 사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사는 걸까로 깊이 가라앉았다. 아직도 그의 영혼에 온전히 감응할 수 없어 변죽만 울리면 루시아 벌린은 자기 안의 천재에 무심히 저항한 천치로서 살았다. 이 도저한 비대칭의 대칭이 77개의 단편소설을 낳은 것 아닐까.

 

루시아 벌린의 글을 두고두고 곰씹을 생각은 내게 없다. 내게는 루시아 벌린의 삶을 두고두고 곰삭힐 생각이 있다. 내 삶과 어떻게 포개지고 어떻게 쪼개지는 지 톺아가며 단편소설 쓰고 싶다란 변화 욕구를 삼가 발효시키기로 한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여태도 내가 알코올중독에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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