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내세우는 우리 언론이 가짜듯

정의를 내세우는 우리 검찰이 가짜듯

구원을 내세우는 우리 교회가 가짜듯

 진리를 내세우는 우리 학문이 가짜듯 

 우리를 내세우는 우리 사랑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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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잇감으로 한 생을 살아온 사람이 우울과 불안에 침륜되었을 때 거기서 빠져나오려면 분노를 표현하고, 핑계 없이 거절하고, 남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사회행위가 필요하다. 물론 쉽지 않다. 기존의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능동 적극 행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관점을 바꾸면 부담을 덜 수 있다.

 

분노 거절 부탁의 누락은 기원이 하나다. 억압. 둘이어야 할 것을 억지로 하나 되게 하는 그 억압 말이다. 그 억압만 풀어놓으면 자연스럽게 분노 거절 부탁이 흘러나온다. 억압을 푸는 방법은 간단하다. 질문. 왜 화를 참아야 하는지, 왜 남의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하는지, 왜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지 묻는 그 질문 말이다. 그 질문만 던져놓으면 자연스럽게 억압이 풀린다.

 


요는 질문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이 봉인된 채 살아왔기 때문에 질문 자체도 엄두내기 힘들다. 엄두내기 쉬운 방법이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기울임과 동시에 발음 내는 것과 반대로 숨을 들이마시는 동작을 취하면 삽시간에 이의제기 모드에 돌입한다. 질문은 생각이 아니다. 질문은 행동이다. 이 작은 행동 하나가 한 생을 전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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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인류사회를 홀까닥 뒤집으며 흘러온 시간이 이미 상당하다. 인류역사를 통틀어 신적 권능과 편재성을 획득한 유일한 사건의 한가운데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진다. 처음에는 곧 끝나겠거니 했다가, 조금 있다가는 언젠가 끝나겠지 하더니, 이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이 등장하고 있다.

 

이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대중의 수동적이고 빙결된 태도다. 발 빠른 소수가 벌써 책도 내고 사업적 변신을 도모하며 새로운 세상 헤게모니 잡는 길을 닦아가는 동안 대다수는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쇠락과 고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다. 미끄러져 내려가는 사람 속에는 물론 나도 있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나,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러다 굶어죽겠구나, 한다. 번쩍 정신 들어 정색하고 정좌한다.

 

코로나19는 인류를 대면문명의 절벽 끝에서 돌연 밀어버렸다. 미증유의 충격으로 허둥대며 어떻게 비대면 문명을 정초할까 모두 분주하다. 분주 떨기 전에 대면문명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톺아보는 일부터 하자. 대면이란 무엇인가? 대면이 왜 문제인가?

 

코로나19는 다만 인간에게 감염질환을 일으키는 나쁜 타자가 아니다. 코로나19 습격이라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코로나19는 인간이 불러들였다. 불러들였다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하필 인간만 감염시키고 하필 남성과 친하고 하필 고령자에게 강한 것을 보면 코로나19가 발생과 진화 과정에서 인간과 상호작용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대면의 불가항력적 요구를 통해 현재 인류의 생활체계 전반을 전복시키는 증후가 현상적 보편성 너머 본질적 차원을 조준하고 있음이 확실한 이상, 단순한 외부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코로나19가 그려낸 전방위, 전천후 비대면 풍경은 현대문명에 대한 잔혹한 저주이자 불같은 심판이다. 자본주의 대면의 끝은 극한수탈이다. 신자유주의 대면의 끝은 무한폭력이다. 공동체의 종말이며 네트워킹의 종언이다. 코로나19는 수탈이 이루어지는 거리 190cm 이내 접촉을 엄금한다. 코로나19는 폭력이 이루어지는 거리 190cm 이내 접촉을 엄금한다. 코로나19는 코로나190을 불러낸다. 코로나190은 코로나19이다.

 

코로나19은 대면의 폐기가 아니다. 무엇이 참 대면인지 깨닫게 하는 공의 윤리다. 공의 윤리는 비대면 풍경을 비대면의 대면 풍경, 곧 역설적 전경全景으로 변환한다. 역설적 전경은 코로나19가 불러낸 자애로운 축복이자 강물 같은 구원을 담아낸다. 저주에서 축복을, 심판에서 구원을 이끌어낼 때 비로소 인류는 존속할 수 있다. 역설적 전경인 비대면의 대면은 무엇일까? 온라인대면on-tact이 비대면의 대면일까?

 

온라인대면이 비대면의 대면의 주요 방법이며 기술임에는 틀림없다. 방법이며 기술일 뿐인 한 그것은 빠른 시간 내로 또 다른 형태의 문명적, 생태적 폐해를 낳을 것이다. 그 폐해는 머릿속에 오직 방법과 기술밖에 없는 온라인대면체제의 헤게모니블록이 생산해낸다. 온라인대면체제의 헤게모니블록은 비대면의 대면을 존재, 인식, 윤리의 눈으로 숙고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돈 안 되니까. 돈 되는 짓만으로 코로나19를 피해 가면 코로나190은 물 건너간다. 코로나190이 물 건너간 인류는 제6 대멸종을 앞당긴다.

 

코로나19가 종식시킨 대면문명은 인간 존재를 거대구조의 부속품으로, 유일신의 피조물로, 영속화폐의 노예로 만들었다. 인간 인식을 일극집중의 형식논리에 결박시켰다. 인간 윤리를 약육강식의 정글에 귀속시켰다. 이것이 대면의 진면모다. 진면모로서 대면은 가학밀착이며 피학애착이다. 코로나190이 일으키는 비대면의 대면 문명은 인간 존재를 미세네트워킹의 객체주체로, 무한신의 소미심심 창조자로, 소멸화폐의 선물로 만든다. 인간 인식을 화쟁의 역설논리에 풀어놓는다. 인간 윤리를 평등평화공생의 장에 깃들인다. 이것이 비대면의 대면의 진면모다. 진면모로서 비대면의 대면은 외경친밀이며 포용소격이다.

 

현 추세대로라면 코로나190 시대는 도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의 어둠과 야합한 세력의 준동 때문이다. 까불면 하나님도 죽일 수 있다는 권능의 화신이 스스로를 코로나19에 감염시킴으로써 이적을 행한다. 저 권능의 화신을 부추겨 수구의 아이콘으로 만든 매판집단이 일사불란하게 정권을 레임덕으로 몰아간다. 민주화운동 하다가 그 매판집단으로 기어들어가 국회의원 세 번씩이나 해서 코로나19에 면역력을 획득한 화상이 검진을 거부한다.

 

프랑스는 하루 확진자 6000명 사망자 300명 넘는 상황에서도 격리조치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 그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헤게모니블록은 쓰레기 언론을 필두로 생난리를 피워대고 있다. 무엇을 노리는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진흙탕에서 코로나190 운운하고 자빠졌으니 나도 차암 물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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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인은 자기 존재를 알고 있는 바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모를 때 행동하는 바로 증명해야 한다. 우리사회 이른바 진보지성인 거의 모두는 입으로 자기 존재를 과시한다. 자기를 셀러브리티로 키워준 쓰레기 신문쪼가리나 자기 패거리가 추임새 넣어주는 SNS에 쓰는 글로써 그 짓을 한다. 재난공동체를 꾸리는 실질적인 일에 앞장서기는커녕 한사코 비판만 한다. 공동체 외곽에서 자기의 초월적 윤리성을 증명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는 듯 보인다. 저들의 훤화가 개소리인 까닭이다. 저들 부류에 끼지 못하는 내 익명성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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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의의학 소설 초벌 작업이 끝난 뒤 다시 20일 동안 두벌 작업을 진행했다. 제목을 다시 고쳤다. 이야기들을 11개의 나선구조로 바꾸어 배치했다. 토씨 하나까지 바꾸는 세부작업을 한 번 더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처음 글과 그 제목은 <미안해서 못나서>였다.


*   

 

다시는 볼 수 없을 듯합니다. 그는 순도 99.99%의 우울장애 전형이었습니다. 모든 우선순위가 타인에게 있었습니다. 모든 중심이 타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맨 뒤에서 주춤주춤 따라 걸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변두리에서 자신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담 내내 미안하다는 말을 무수히 반복했습니다. 어째서 미안하냐고 물으니, 그가 서슴없이 대답했습니다.

 

못나서요.”

 

그는 자신이 못나서 부모에게도 형제자매에게도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절절했던지, 처음에 가슴이 먹먹하다가 나중에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부아를 삭이면서 저 또한 절절한 심정으로, 뭐가 어떻게 못났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웅숭깊게 대답했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요.”

 

그의 팔목, 아니 팔에는 무려 20개에 가까운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미안해서, 못나서, 그는 긋고 또 그었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나 유령인 채 잘난 사람들 언저리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돈이 있을 리 없습니다. 치료 받는 것도 미안하고, 돈이 없는 것도 미안하고, 그냥 와서 치료 받으라고 간곡히 권하는 제게도 미안해서, 결국 그는 두 번 다시 오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 딱 한 번 마주한 얼굴인데 잊히지 않습니다. 그가 아직도 건강을 되찾지 못 한 채 아프디아프게 살고 있다면, 여기에 제 책임도 없지 않다는 죄책감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


이것을 이렇게 바꾸었다. 제목은 <아침에 받은 것을 저녁에 돌려주다>다. 


*

 

다시없을 것이다. ㅁㄴ은 순도 99.99%의 우울장애 전형이다. 모든 우선순위가 타인에게 있다. 모든 중심이 타인에게 있다. 그는 언제나 맨 뒤에서 주춤주춤 따라 걷는다. 그는 언제나 변두리에서 늘 자신을 떠나고 있다.

 

ㅁㄴ은 미안하다는 말을 무수히 반복한다. 어째서 미안하냐고 물으니, 서슴없이 대답한다.

 

못나서요.”

 

그는 자신이 못나서 부모에게도 형제자매에게도 미안하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절절하던지, 처음에 가슴이 먹먹하다가 나중에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온다. 부아를 삭이면서 ㅂㅇ 또한 절절한 심정으로, 뭐가 어떻게 못났는지 묻는다. 그가 웅숭깊게 대답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요.”

 

내 팔목, 아니 팔에는 무려 20개가 넘는 칼자국이 있다. 미안해서, 못나서, 나는 긋고 또 긋는다. 긋는 찰나 들이닥치는 날카로운 통증이 나를 살리고 또 죽인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나 유령인 채, 나는 잘난 사람들 언저리를 떠돌고 있다.

 

치료 받는 것도 미안하다. 돈이 없는 것도 미안하다. 그냥 와서 치료 받으라고 간곡히 권하는 ㅂㅇ선생님에게도 미안하다. 모두 내 못난 탓이다.

 

내가 오늘 들고 갔던 카드는 여동생의 카드다. 그 여동생은 내가 너무나 자랑스러워해서 수없이 꽃을 선물했던 여동생이다. 그 여동생에게서 아침에 받았던 그 카드를 나는 저녁에 돌려주었다. ㅂㅇ선생님을 다시 뵙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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