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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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우리는 살아 있는 세계와 병행할 뿐 아니라 스스로 살아 있으면서 생명을 키우는 일에 관여하는 언어를 만들 수 있을 까요? 예를 들어, 우리의 언어 사용 방식은 다른 숨결과 온기와 습도와 지상에 소속됨과 머무름을 불러올 수 있을 까요? 그렇지 않고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 두 활동을 결합해야 할까요?(132~133)

 

마더: 어떻게 하면 나의 말이.......생명에 봉사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식물과 원소의 에너지를 뽑아내 언어적 표현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부호와 기호가 불가피하다는 사고를 수용하는 것,.......바깥 세계를 순수오성의 위임을 받은 엄격한 의미구조 속으로 흡수해 들이고, 이 의미구조를 다시 바깥 세계로 투사하여 의인화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은 밖으로 나가 자신의 감각과 생각을 원소와 식물에게 드러내고, 그 감각과 생각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비음성적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296~297)

 

최근 우리나라 농촌진흥청이 실험한 결과에 따르면 식물은 화학언어로 인간이 보낸 신호에 반응한다. 야생종·토종 식물이 더 잘한다. 특히 해를 입힌 사람에게 훨씬 더 민감/강하게 반응한다. 이 내용을 가지고 얼마나 일반화할 수 있는지 속단하기 이르지만 가능한 상상의 범위는 짐작 가능하다. 야생은 인간과 독립된 경계성으로, 토종은 생태적 인접성으로 논의 지평을 열어준다. 해를 입힌 것은 그와 상반되는 경우를 포함해 다양하게 정서적 교감 문제를 살펴볼 여지를 제공해준다. 실험에 입김을 사용한 것을 토대로 상상해보면 비음성적 방식을 너무 엄격하게 이해해서는 안 될 듯하다.

 

인간중심적 기호 언어가 식물들에게 의미 수탈로 작동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리가레와 마더의 말에 토를 달 이유는 없다. 그들이 식물 생명을 대하는 근본 태도에 비추어 당연하다. 여전히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것은 아쉽다. 그들이 식물 생명과 나눈 교감의 내용과 특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아무리 해도 식물 생명은 우리 신호를 이해하고 반응하지만 우리가 반응할 수는 없는 것인가? 반응한다 해도 우리가 그 사실을 지각하지는 못하는 것인가? 가보지 않은 길이라 아는 바가 없는지도 모른다. 사실 겨우 시작 단계니까 진정한 영적 각성은 여기서부터 일어나는 바로 이것이리라.

 

인간보다 위대한 대문자생명을 향해 열리는 영성은 허구다. 인간만의 공동체 안에 닫히는 영성은 환유다. 진정한 영성은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로 번져가다 마침내 계의 경계를 넘어 식물로까지 번져가는 생명의 소통이며 공존이며 상호양육이며 제의다. (박테리아 넘어 바이러스 넘어 비-생명의 원소 넘어 마침내 공변양자장으로 배어드는 것까지 영성인가 물으면 천착 허무로 떨어질 테니 붓다의 무기無記로 대응한다.) 이 진정한 영성의 빛으로 비추는 언어가 투명해질 순간을 기다리며 우리는 인간 언어를 관통해 식물 언어로 나아가야 한다. 신비주의 아닌 신비가 곧 모습을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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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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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식물 신체는 식물의 영혼이 자신을 작동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비파괴적인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관입니다. 이 에너지는 다른 식물, 동물, 인간 존재들도 공유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윤리적 범주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습관적으로 일축해버리는 순수 도구(매체나 채널로 읽음)는 가상의 목적 그 자체보다 생명윤리에 더 부합합니다.(288)


앞선 글에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식물은 도구가 아니다.” 이때 도구란 목적에 복무하는 수단을 뜻한다. 마더의 순수 도구는 전혀 다르다. “가상의 목적 그 자체보다 생명윤리에 더 부합한다는 진술을 뾰족하게 다듬으면 허구일 뿐인 목적을 제거하는 것이 생명윤리에 더 부합한다, . 목적을 제거했을 때, “비파괴적인 생명 에너지가 흐르는 관으로서 식물 신체는 순수 도구. 도구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통로이기 때문이고, 순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말고 다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 신체도 관이다. 통로다. 생명 에너지가 흘러들어와 흘러나간다. 생명 운동은 네트워킹이다. 인간이 타락한 정신으로 이 진리를 왜곡했다. 소유와 축적이라는 목적 관념,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돈에 대한 지배블록의 범죄적 합의가 생명 세계 전체를 이렇게 망쳤다. 이리가레와 마더가 식물의 사유를 화두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식물 신체의 원리를 받아들여 에너지를 흐르고 돌아 번져가게 만드는 것. 에너지는 번져서 평등하게 크는 것이지 쌓아서 그리 되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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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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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자연적 속성으로 돌아가 자연이 주는 생명 에너지를 회복하고 그 에너지를 다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새로운 인간 존재로 이행할 수 없습니다........하지만 우리에게는 성욕이 일깨운 에너지에 관한 지침이 부족합니다........우리 전통은 성욕이 깨어나는 것에 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육체적 사랑을 인간적으로 충족시키고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성을 성취하는 데 가장 핵심적 요인이지만, 대부분의 동양적 전통들조차 성욕의 차원을 경시합니다.......우리의 성적 속성과 그것의 공유를 키우고 가꾸는 일은 우리의 생명 에너지 경제를 찾기 위해 계속 추구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128~129)


마더: 열매는 식물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열매는 식물 생명의 충족입니다. 사정은 성행위의 오르가즘적 목적입니다. 따라서 사정은 욕망의 충족입니다. 그러나 목적에 복무하지 않는 에너지, 최종 생산물의 에너지원이 되지 않으면서 내게서 혹은 나와 남들의 번영에서 충족을 찾는 에너지라면 어떨까요? 식물들을 소비하려는 욕구 바깥에서 식물들과 더불어 있는 것은 목적 없는 충족이 아닐까요?.......생명은 물리적 종점에서 충족되지 않고 타자들과 더불어 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에너지의 충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다른 에너지를 명명할 필요가 있다면 만남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남은 에너지를 추출하기 위해 연소시킬 물체나 물질에 대한 작용이 아닙니다........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을 때, 내가 만나는 타자를 진정 필요로 여기지 않을 때, 만나는 존재에게서 무엇을 얻을지 내가 나 자신과 다투지 않을 때, 오직 그럴 때만 만남은 일어납니다........만남의 에너지는 생산적 파괴의 회로 안에서 작동하는 냉혹한 경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남는 것이며 더해지는 것일 뿐 아니라.......자신이 더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만남 에너지는 경제적 틀을 초과한 저 너머의 무엇입니다.(283~284)

 

이리가레와 마더가 주고받은 편지는 여기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는다. 독자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하면 다리가 놓아지려나. “인간의 육체적 사랑은 만남의 에너지를 일으키는 양태 또는 전달하는 매체인가?” 두 사람은 식물 세계 에너지와 인간의 육체적 사랑, 이 두 문제에서 각각 장군과 멍군을 주고받는다.

 

마더에 따르면 식물 에너지는 인간 에너지와 다르다. 그것은 만남 에너지다. 추출, 파괴 양태로 획득하지 않는다. 전달, 확산의 방법으로 사용한다. 육체적 사랑이 인간성을 성취하는 핵심 요인이라는 통찰을 마더의 만남 에너지에 적용했더라면 이리가레는 에너지 성격과 사용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달리 사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심지어 에너지 경제를 추구한다.


이리가레에 따르면 인간의 육체적 사랑은 인간성을 성취하는 핵심 요인이다. 옹골찬 성차화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당연하다. 식물 에너지가 만남 에너지라는 통찰을 이리가레의 성차화에 적용했더라면 마더는 육체적 사랑을 만남 에너지를 일으키는 양태 또는 전달하는 매체로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정을 언급함으로써 이리가레의 육체적 사랑을 오해의 사정권 안에 배치한다.

 

적어도 식물세계가 건네준 생명력으로 충만해진 인간의 육체적 사랑이라면 기존 인간 세계의 에너지와 동일한 것을 일으키거나 전달할 수 없다. 일방적이든 쌍방적이든 파괴하지도 추출하지도 소유하지도 축적하지도 않는다. 어떤 목적에 복무하는 수단일 수 없다. 누가 누구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얻어가지도 않는다.

 

이리가레가 식물의 만남 에너지의 결을 지각하고 충만해짐으로써 명징하게 드러냈어야 할, 마더가 성차화를 살갑게 지각하고 흔쾌히 만남의 에너지 장으로 해석했어야 할 인간의 육체적 사랑은 타자와 더불어 살고 성장하는 과정의 진수다. 경제의 틀을 초과한 저 너머의 무엇이다. “식물과 더불어 식물을 경유한”(285) 이 새로운 육체의 사랑으로만 새로운 인간 존재로 이행할 수있다.

 

새로운 육체의 사랑을 통해 이행한 새로운 인간 존재의 모습과 풍경을 스케치해보자. 사랑하는 사람 각자는 향락적 퇴폐적 육욕과 학대에서 자유로울 만큼 충분히 독립되어 있다. 각자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삶으로써 서로를 이롭게 한다. 천천히 가는 연인을 기꺼이 기다려준다. 약점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루는 삶은 적절한 빈틈이 있다. (우종영의 사유를 원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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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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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어떤 면에서 시바는 우리에게 숲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힌두 신입니다. 그는 특히 명상, ,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개별성에 도달하기 위해 숲에 머뭅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식물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운명은 자기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식물이 되기 위해 식물 존재를 모방하거나 전용하기 위해 식물과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 식 가르침을 빌리자면 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식물과 공존합니다.

  시바는 식물 세계와 소극적 교감만 나누는 데 만족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키우고 그 에너지가 적절히 구현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그 에너지가 얼어붙거나 불타지 않도록 하여 에너지가 척박하거나 파괴적이 되지 않게 하고, 그의 살아 있는 에너지가 미래의 생성에 활용될 수 있게 하는 데 어울리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121~122)

 

마더: 혼자 있으면서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은.......더불어 성장하면서 이산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갑니다.........이런 중간 상태는 세계와 융합되는 대양적 느낌과 유아론의 대안으로서 성장 운동에 참여합니다. 중간 상태는 타자와 더불어 있으면서 또한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타자와 더불어 있지 않음으로써 더불어 있습니다.(275~276)

 

내가 숲에서 만난 다른 사람과 나는 우리의 만남이 일어났던 숲 덕분에 만났습니다. 이 만남의 결과로 우리 각자는 조금 더 인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스쳐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 사이에는 암묵적 연대가 있었습니다. 그 연대는 서로를 향한 직접적 헌신의 형태가 아니라 식물 세계에 대한 책임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만남의 침묵은 식물 생명의 침묵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그 침묵은 우리 서로와 식물을 향한 존중의 기호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침묵이 공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침묵이 식물의 침묵에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78~279)

 

개별성을 기축으로 한 이리가레의 어조는 단호하고 높직하다.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구현한다. 이때 숲은 무슨 작용을 어떻게 하는가? 이리가레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 중간 상태를 기축으로 하는 마더의 어조는 모호하고 나직하다. 인간의 연대는 암묵적이다. 숲의 침묵을 반향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침묵은 공명한다. 그 침묵이 식물의 침묵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리가레가 숲의 작용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마더가 숲의 침묵을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가? 숲의 침묵이 아무런 작용도 아니라고 전제할 때는 그렇다. 숲의 침묵이 아무 작용도 아니라면 구태여 숲이어야 할 이유는 뭔가. 숲의 침묵은 사막의 침묵과 다르다. 모든 푸나무는 각기 고유한 생체진동수를 지니며, 그들이 어울린 숲은 무한히 다양한 전자기장을 형성한다. 여기서 나오는 신호 화학, 소통 물리학과 상호작용하며 살아온 시간이 인간 진화 경험의 99.5%인데, 0.5%의 문명사가 인간의 바이오필리아를 맹렬히 둔화시킨 탓에 느끼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다. 숲의 작용과 인간의 감응에 대한 논의가 도구와 효능의 땅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숲은 도구가 아니다. 숲은 효능 따라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다. 숲은 인간 존재의 근간이며 시원이다. 오감과 육감을 열어 섬세하고 온전하게 느끼도록 극진히 애써야 하는 살아 있는 생명 네트워킹이다. 숲이야말로 인간의 숭고하고 우아한 삶을 더불어 펼쳐야 할 파트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 인간만의 특성으로 빚어야 할 장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영성의 본진이다. 이 경계에서 나와 숲은 더불어 연대하는 다른 인간, 또는 성차화된 동반자를 창조한다.

 

그 창조는 내가 스스로 생명의 기존 거점을 지울 때 일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무한 확산으로 먼저 빚어진다. 증득한 역설 잠재태다. 구가는 그 뒤에 온다. 현실태로서 성차화된 동반자는 다양한 결을 지니고 찾아온다. 숲을 모방하거나 전용한 것이 아니다. 숲과 만남으로써 인간 생명 주파수의 정확하고도 예술적인 발현이 각성된 것이다. 성차화가 단순하거나 통속하지 않다는 사실은 식물 세계의 그것이 그러하다는 사실의 반향이다. 이 문제의식은 인간에게 아직 그리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숲속에서 만나는 다른 인간을 얼마나 어떻게 감지하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그 속도와 폭이 달라질 것이다.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경이로운 세계가 기다릴 텐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시간이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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