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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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가레: 어떤 면에서 시바는 우리에게 숲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힌두 신입니다. 그는 특히 명상, , 사랑을 통해 자신의 개별성에 도달하기 위해 숲에 머뭅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식물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운명은 자기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식물이 되기 위해 식물 존재를 모방하거나 전용하기 위해 식물과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니체 식 가르침을 빌리자면 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식물과 공존합니다.

  시바는 식물 세계와 소극적 교감만 나누는 데 만족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키우고 그 에너지가 적절히 구현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그 에너지가 얼어붙거나 불타지 않도록 하여 에너지가 척박하거나 파괴적이 되지 않게 하고, 그의 살아 있는 에너지가 미래의 생성에 활용될 수 있게 하는 데 어울리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121~122)

 

마더: 혼자 있으면서 혼자 있지 않다는 느낌은.......더불어 성장하면서 이산한다는 생각으로 돌아갑니다.........이런 중간 상태는 세계와 융합되는 대양적 느낌과 유아론의 대안으로서 성장 운동에 참여합니다. 중간 상태는 타자와 더불어 있으면서 또한 더불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타자와 더불어 있지 않음으로써 더불어 있습니다.(275~276)

 

내가 숲에서 만난 다른 사람과 나는 우리의 만남이 일어났던 숲 덕분에 만났습니다. 이 만남의 결과로 우리 각자는 조금 더 인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스쳐간 그 짧은 순간에 우리 사이에는 암묵적 연대가 있었습니다. 그 연대는 서로를 향한 직접적 헌신의 형태가 아니라 식물 세계에 대한 책임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만남의 침묵은 식물 생명의 침묵을 반향하고 있습니다. 그 침묵은 우리 서로와 식물을 향한 존중의 기호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침묵이 공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침묵이 식물의 침묵에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78~279)

 

개별성을 기축으로 한 이리가레의 어조는 단호하고 높직하다.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 구현한다. 이때 숲은 무슨 작용을 어떻게 하는가? 이리가레는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 중간 상태를 기축으로 하는 마더의 어조는 모호하고 나직하다. 인간의 연대는 암묵적이다. 숲의 침묵을 반향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침묵은 공명한다. 그 침묵이 식물의 침묵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리가레가 숲의 작용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마더가 숲의 침묵을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가? 숲의 침묵이 아무런 작용도 아니라고 전제할 때는 그렇다. 숲의 침묵이 아무 작용도 아니라면 구태여 숲이어야 할 이유는 뭔가. 숲의 침묵은 사막의 침묵과 다르다. 모든 푸나무는 각기 고유한 생체진동수를 지니며, 그들이 어울린 숲은 무한히 다양한 전자기장을 형성한다. 여기서 나오는 신호 화학, 소통 물리학과 상호작용하며 살아온 시간이 인간 진화 경험의 99.5%인데, 0.5%의 문명사가 인간의 바이오필리아를 맹렬히 둔화시킨 탓에 느끼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이다. 숲의 작용과 인간의 감응에 대한 논의가 도구와 효능의 땅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다.

 

숲은 도구가 아니다. 숲은 효능 따라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다. 숲은 인간 존재의 근간이며 시원이다. 오감과 육감을 열어 섬세하고 온전하게 느끼도록 극진히 애써야 하는 살아 있는 생명 네트워킹이다. 숲이야말로 인간의 숭고하고 우아한 삶을 더불어 펼쳐야 할 파트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이 인간만의 특성으로 빚어야 할 장엄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영성의 본진이다. 이 경계에서 나와 숲은 더불어 연대하는 다른 인간, 또는 성차화된 동반자를 창조한다.

 

그 창조는 내가 스스로 생명의 기존 거점을 지울 때 일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무한 확산으로 먼저 빚어진다. 증득한 역설 잠재태다. 구가는 그 뒤에 온다. 현실태로서 성차화된 동반자는 다양한 결을 지니고 찾아온다. 숲을 모방하거나 전용한 것이 아니다. 숲과 만남으로써 인간 생명 주파수의 정확하고도 예술적인 발현이 각성된 것이다. 성차화가 단순하거나 통속하지 않다는 사실은 식물 세계의 그것이 그러하다는 사실의 반향이다. 이 문제의식은 인간에게 아직 그리 본격적으로 열리지 않았다. 숲속에서 만나는 다른 인간을 얼마나 어떻게 감지하고 경험하느냐에 따라 그 속도와 폭이 달라질 것이다.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경이로운 세계가 기다릴 텐데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시간이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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