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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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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탄소동화작용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분해로 생겨난 탄소 원자는 모든 식물의 화학작용에서 중추 구실을 한다. 탄소는 식물 신체구성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당이, 전분, 엽록소 같은 일차화합물과 산, 알칼로이드, 스테로이드 같은 수백만 개의 복합 이차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화합물은 서로 다른 구성 기술을 통해 생산한다. 각 이차 대사산물 계통은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하위물질을 포함한다. 예컨대 당 분자 네 개의 관계만 바꾸어도 35000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 생산이 가능하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알칼로이드가 한 가지씩 확인되고 있다.
이 화합물은 대부분 ppm(1/100만), ppb(1/10억), ppt(1/1조) 단위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생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결합할 때, 그 작용력은 놀랍게 증강된다. 복합 피드백 고리를 통해 식물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이 만드는 화학물질의 종류, 양, 결합을 조절한다.(200~201쪽)
낭·풀의 탄소동화작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학교에서 다 배웠다. 문제는 그 배움이 죽은 지식을 전달해주고 끝낸다는 데 있다. 이런 죽은 지식의 연장선에서 살아온 사람이 수십 년 후 다시 위 본문 같은 내용을 읽으면 뭐가 달라질까. 그저 그 죽은 지식의 양이 좀 더 늘어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이 지닌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는 지식주체의 삶에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운 가치와 결합하면서 부단히 자라가는 과정이다. 부단히 자라가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에게 제시된 신의 길이다. 그 신의 길이 바로 낭·풀의 길이다.
낭·풀의 길은 탄소동화작용에서 출발한다. 이 출발에서 화학의 향연은 실로 소미한 물길 따라 실로 방대하게 흘러 번져간다. 복잡다단한 계통수를 이룬다. “복합 피드백 고리를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이 만드는 화학물질의 종류, 양, 결합을 조절한다.” 인격신의 설계? 어림 반 닷곱 없는 소리다.
인격이라는 것도 결국은 동물성에 기반을 둔다. 동물은 애당초 독립영양생물이 아닌데다 삶에 악조건이 닥치면 대부분 경우 도망치는 방식으로 회피한다. 창조능력도 없고 변변한 솔루션도 없다. 기생과 도피 프로세스를 극단으로 구사해 생태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 동물이 인간이다. 그 권력의 다른 이름이 다름 아닌 인격이다. 인격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원형에 신을 앉힌다. 다시 그 인격신의 형상을 자신에게 입힌다. 이 순환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낭·풀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다. 인격이 인식하지 못하면 대뜸 없다고 한다.
그 없는 대표적 존재가 “이름 없는 잡초”다. 이름뿐 아니라 쓸모도 없는 풀이란 뜻이다. 인간이 이름을 모를 따름이고, 쓸모를 모를 따름이다. 내가 우울장애 치료 근간으로 삼는 시호라는 약초는 99%의 사람이 이름도 쓸모도 모르는 잡초다. 쓰는 나도 시호가 베푸는 화학의 향연 적은 일부만 알 뿐이다. 모르고도 누릴 때 감사나마 하면 그 아니 귀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