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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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속에 묶여 있기는 하지만 식물의 뿌리는 극히 넓은 표면영역을 확보한다. 한 예로, 호밀 한 그루는 1300개 이상의 가는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길이를 합하면 1100km에 이른다. 이 가는 뿌리는 뿌리털로 덮여 있으며, 140억 개나 되는 뿌리털 길이를 합하면 10600km나 된다. 이 모든 뿌리 표면에서 화학물질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각기 다른 양으로 분비되는데, 이 물질들이 식물이 살아가는 동안 부근 생물군락을 조절한다.......식물과 그 근계에 사는 균·, 미소식물 사이에는 아주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 쌍방향의 매우 정교한 피드백 고리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면, 식물은 이를 토대로 화학물질을 생산한다. 식물이 생산하는 가벼운 화합물은 대부분 근계 속으로 분비된 뒤, 그곳에 사는 생물에 의해 중합체 같은 더 복잡하고 무거운 화합물로 변형된다.......이렇게 변형된 화합물은 토양 속에서 다른 식물이나 토양 미생물 화합물과 결합해 부식腐植산을 생산한다. 부식산은 생태계 조절과 오양의 비옥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러므로 토양의 건강은 근계 생물군락과 식물의 이차화합물하고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 근계 생물군락은 생명네트워크를 떠받치고 있는 박테리아 건강에도 크게 기여한다. 박테리아 건강 유지는 물론 식물의 화합물은 근계를 태양과 연결해주기도 한다. 중재자인 식물은 화학물질의 종류와 양을 조절해 토양을 최적상태로 유지한다. 이런 작용을 해줌으로써 식물은 건강과 성장을 보장받는다.(207~211)

 

호밀 뿌리의 길이가 1100km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자크 타상Jacques Tassin나무처럼 생각하기Penser comme un arbre에서 호밀 뿌리의 표면적이 400에 이른다.”(59)고 표현한다. 어떤 차이를 느끼는가?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가 극히 넓은 표면영역을 확보하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식물 뿌리의 표면적 아닌 길이를 제시한 이유는 인간에게 친숙한 방식을 무심코 따랐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로의 신체 규모를 표현할 때 신장은 요건이지만 표면적은 요건이 아니다. 1100km 하면 대뜸 놀랍다는 표정을 짓지만, 400하면 맹한 표정을 짓는다. 그 넓이가 인간 210명의 표면적에 해당한다고 비교해야 비로소 구체적 반응이 온다. 그마저도 1100km처럼 와 닿지 않는다. 시간 감각이 도와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크 타상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나무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나무를 바라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60)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나무를 바라본다는 것이 핵심 아닐까 싶다. ·풀의 생명원리에서 이탈한 뒤 인간의 삶은 표면적을 변방 요소로 밀어냈다. 중심은 부피다. 부피의 대부분은 장기organ. 장기는 내부의 근거가 된다. 이로써 인간은 심신의 안팎이 분리되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풀은 안팎이 분리되지 않는다. 안팎이 분리되지 않는 살아 있는 껍질”(58)이 낭·풀이다.

 

껍질로 살아갈 때 표면적은 modularity, networking, collective intelligence를 한껏 구현하는 조건이자 결과다. 그 조건과 결과가 어떻게 낭·풀 자신과 그 주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지 개관해준 본문을 낭·풀의 눈으로 다시 한 번 정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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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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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동화작용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분해로 생겨난 탄소 원자는 모든 식물의 화학작용에서 중추 구실을 한다. 탄소는 식물 신체구성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당이, 전분, 엽록소 같은 일차화합물과 산, 알칼로이드, 스테로이드 같은 수백만 개의 복합 이차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화합물은 서로 다른 구성 기술을 통해 생산한다. 각 이차 대사산물 계통은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하위물질을 포함한다. 예컨대 당 분자 네 개의 관계만 바꾸어도 35000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 생산이 가능하다. 지금도 매일 새로운 알칼로이드가 한 가지씩 확인되고 있다.

  이 화합물은 대부분 ppm(1/100), ppb(1/10), ppt(1/1) 단위로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생물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결합할 때, 그 작용력은 놀랍게 증강된다. 복합 피드백 고리를 통해 식물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이 만드는 화학물질의 종류, , 결합을 조절한다.(200~201)

 

·풀의 탄소동화작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학교에서 다 배웠다. 문제는 그 배움이 죽은 지식을 전달해주고 끝낸다는 데 있다. 이런 죽은 지식의 연장선에서 살아온 사람이 수십 년 후 다시 위 본문 같은 내용을 읽으면 뭐가 달라질까. 그저 그 죽은 지식의 양이 좀 더 늘어날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식이 지닌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는 지식주체의 삶에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변화는 새로운 가치와 결합하면서 부단히 자라가는 과정이다. 부단히 자라가는 과정이야말로 인간에게 제시된 신의 길이다. 그 신의 길이 바로 낭·풀의 길이다.

  낭·풀의 길은 탄소동화작용에서 출발한다. 이 출발에서 화학의 향연은 실로 소미한 물길 따라 실로 방대하게 흘러 번져간다. 복잡다단한 계통수를 이룬다. “복합 피드백 고리를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이 만드는 화학물질의 종류, , 결합을 조절한다.인격신의 설계? 어림 반 닷곱 없는 소리다.

 

인격이라는 것도 결국은 동물성에 기반을 둔다. 동물은 애당초 독립영양생물이 아닌데다 삶에 악조건이 닥치면 대부분 경우 도망치는 방식으로 회피한다. 창조능력도 없고 변변한 솔루션도 없다. 기생과 도피 프로세스를 극단으로 구사해 생태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 동물이 인간이다. 그 권력의 다른 이름이 다름 아닌 인격이다. 인격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원형에 신을 앉힌다. 다시 그 인격신의 형상을 자신에게 입힌다. 이 순환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낭·풀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다. 인격이 인식하지 못하면 대뜸 없다고 한다.

  그 없는 대표적 존재가 이름 없는 잡초. 이름뿐 아니라 쓸모도 없는 풀이란 뜻이다. 인간이 이름을 모를 따름이고, 쓸모를 모를 따름이다. 내가 우울장애 치료 근간으로 삼는 시호라는 약초는 99%의 사람이 이름도 쓸모도 모르는 잡초다. 쓰는 나도 시호가 베푸는 화학의 향연 적은 일부만 알 뿐이다. 모르고도 누릴 때 감사나마 하면 그 아니 귀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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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수압을 이용해 물을 빨아올리는 작용은 쉼 없이 계속된다. 기공이 닫히는 밤이 되면, 나무처럼 뿌리 깊은 식물은 빨아올린 물을 지표면 아래에 저장한다. 이 중 일부는 다음날 증발되고, 2/3는 인근 식물들의 주요 급수원이 된다. 나무가 자신의 군락에 식수를 공급해준다는 말이다.(199~200)

 

인간의 본성을 놓고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하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요즘은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느니 이타적이라느니 하는 버전으로 티격태격한다. 어려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무심코 그 논쟁의 존재중량을 받아들였다. 나이 들어 이치를 깨달으면서 부터는 그 논쟁이 매우 한심하거나 부질없는 것임을 간파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이런 질문부터 떠오른다.

 

과연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무가 자신의 군락에 식수를 공급해준다

 

이 사실에 입각해 나무를 이타적이라거나 본성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표현은 인간에게만 써야 한다는 오랜 인습에 따르면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엄연한 사실임에도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면 어떤 표현을 써야 할까? 어떤 상상력으로도 마땅한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한다. 이치에 따른다면 인간 행위의 근원에 나무가 있다; 인간 정신의 근원에 나무가 있다.

 

나무는 행위와 정신 사이에 이반도 누락도 잉여도 없다. 인간이 나무에게서 멀어지면서 그럴수록 행위와 정신 사이에 이반도 누락도 잉여도 커졌다. 인간은 나무 본성을 분열, 왜곡, 편중시키면서 본성 아닌 본성 논쟁을 거듭했다. 본성이 본성인 한 선과 악, 이타와 이기를 놓고 선택을 강제하는 이분법에 빠질 수 없다. 본성논쟁은 선택 아닌 복원으로 향해야 한다.

 

나무는 본성 정신으로 자신의 군락에 식수를 공급해주는 본성 행위를 한다. 이것은 이타적이되 자기 파괴적 희생은 아니다. 이타가 이기와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는다. 나무 생명의 네트워킹 본질이 그런 이분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트워킹 본질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것을 되찾아가는 동사적 본성논쟁을 하는 과정 속에서 본성 정신과 본성 행위를 재구성한다.

 

내가 온전히 나이려면 온전히 너여야만 한다. 인간이 온전히 인간이려면 온전히 나무여야만 한다. 현존하는 많은 인문운동들이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곡진히 애써도 함량미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된 인간의 고전과 사상을 꿰뚫고 나무 본성에 가 닿지 못하는 인문운동은 참된 본성을 따라 사는 신의 길을 결코 걷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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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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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의 잎 윗면은 태양에게서 받은 에너지를 처리하고, 아랫면은 기공이라 불리는 작은 구멍을 통해 기체를 교환한다. 기공은 본질상 작은 폐다. 기공 주변은 인체의 횡격막처럼 수축과 이완으로 기공을 개폐하는 근육조직이 감싸고 있다. 식물도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일하게 호흡한다.......

  이 순환은 태양에 힘입어 이루어진다. 밤에는 식물도 휴식을 취하기 때문에, 광합성과 호흡 모두 멈춘다. 동물이나 박테리아의 호흡은 햇빛 없이 계속 이산화탄소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지구의 이산화탄소 수치는 밤에 높아지고 낮에 낮아진다. 24시간을 주기로 지구도 호흡한다.(198~199)

 

인간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인간도 도리 없이 동물이다. 동물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동물은 식물을 전제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존재다. 생명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생명은 비 생명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 하나의 발현양식이다. 모든 것을 거꾸로 보면, 인간은 동물의 극단화고, 동물은 식물의 극단화고, 궁극적으로 생명은 비 생명의 극단화다. 진화론도 창조론도 인간중심주의의 편협하고 아둔한 논리에 개칠을 거듭한 것이다. 이 각성에 이르지 못한 온갖 현학은 극단화의 끝판 왕 인간이 꾸며낸 BULLSHIT이다.

 

식물도 근본적으로 인간과 동일하게 호흡한다.에이,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24시간을 주기로 지구도 호흡한다.무슨, 공기 교환이면 다 호흡이야? 이렇게들 반응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하고 너하고도 다른 호흡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호흡이고 너는 대기 구성비 변화다. 식물의 생명원리가 더 고등하다고 하면 붉으락푸르락한다. 지구 전체가 유기적 생명체라고 하면 펄펄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름이 가이아라 하면 숫제 까무러친다.

 

한 걸음만 물러나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다. ‘이름은 강용원이다. 강용원에는 장 점막 바깥 미코박테리움 바케도 포함되고, 70% 물도 포함되고, 산소 라디칼도 포함된다. 박테리아와 비 생명 물질을 다 그러모은 이름이 강용원인 것은 문제 아니고 지구 이름이 가이아인 것은 문제라니. 지구가 호흡한다 하면 사람대접 하는 것 같아서 미신이나 애니미즘으로 몰아버리고 싶은 것인가. 아서~! 물론 우리는 강용원이란 이름 붙인 이 공동체의 강용원이란 이름이 일종의 폭력이라고 합의했다. 더불어 지구 이름을 가이아라고 부르는 것도 폭력일 수 있다고 합의했다. 우리가 가이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과학 쪽 사람들의 그것은 당최 격이 다르다. 우리는 환유인 이름을 반대하는 것이다.

 

욕망은 환유고 사랑은 은유라는 명제”(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658)를 따라 우리는 은유인 이름을 지녀야 한다. 은유인 이름은 우리에게 생명지식, 살아 숨 쉬는 앎, 그것의 매혹을 전해준다. 강용원이 환유의 이름이라면 싸리버들은 은유인 이름일 수 있다. 싸리버들 이야기는 아직 예고편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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