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위대한 화학자 - 잃어버린 식물의 언어 속에 숨어 있는 생태적 의미
스티븐 해로드 뷔흐너 지음, 박윤정 옮김 / 양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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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수압을 이용해 물을 빨아올리는 작용은 쉼 없이 계속된다. 기공이 닫히는 밤이 되면, 나무처럼 뿌리 깊은 식물은 빨아올린 물을 지표면 아래에 저장한다. 이 중 일부는 다음날 증발되고, 2/3는 인근 식물들의 주요 급수원이 된다. 나무가 자신의 군락에 식수를 공급해준다는 말이다.(199~200)

 

인간의 본성을 놓고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하는 오랜 논쟁이 있었다. 요즘은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느니 이타적이라느니 하는 버전으로 티격태격한다. 어려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로 무심코 그 논쟁의 존재중량을 받아들였다. 나이 들어 이치를 깨달으면서 부터는 그 논쟁이 매우 한심하거나 부질없는 것임을 간파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이런 질문부터 떠오른다.

 

과연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무가 자신의 군락에 식수를 공급해준다

 

이 사실에 입각해 나무를 이타적이라거나 본성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표현은 인간에게만 써야 한다는 오랜 인습에 따르면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엄연한 사실임에도 그런 표현을 쓸 수 없다면 어떤 표현을 써야 할까? 어떤 상상력으로도 마땅한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한다. 이치에 따른다면 인간 행위의 근원에 나무가 있다; 인간 정신의 근원에 나무가 있다.

 

나무는 행위와 정신 사이에 이반도 누락도 잉여도 없다. 인간이 나무에게서 멀어지면서 그럴수록 행위와 정신 사이에 이반도 누락도 잉여도 커졌다. 인간은 나무 본성을 분열, 왜곡, 편중시키면서 본성 아닌 본성 논쟁을 거듭했다. 본성이 본성인 한 선과 악, 이타와 이기를 놓고 선택을 강제하는 이분법에 빠질 수 없다. 본성논쟁은 선택 아닌 복원으로 향해야 한다.

 

나무는 본성 정신으로 자신의 군락에 식수를 공급해주는 본성 행위를 한다. 이것은 이타적이되 자기 파괴적 희생은 아니다. 이타가 이기와 반드시 모순되지는 않는다. 나무 생명의 네트워킹 본질이 그런 이분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네트워킹 본질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것을 되찾아가는 동사적 본성논쟁을 하는 과정 속에서 본성 정신과 본성 행위를 재구성한다.

 

내가 온전히 나이려면 온전히 너여야만 한다. 인간이 온전히 인간이려면 온전히 나무여야만 한다. 현존하는 많은 인문운동들이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곡진히 애써도 함량미달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로 된 인간의 고전과 사상을 꿰뚫고 나무 본성에 가 닿지 못하는 인문운동은 참된 본성을 따라 사는 신의 길을 결코 걷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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