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의 비밀 - 코로나19부터 유전자 치료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비한 바이러스 이야기
다케무라 마사하루 지음, 위정훈 옮김, 강석기 감수 / 파피에(딱정벌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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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행병을 일으키는 것은 요괴 짓이며 초자연적 힘이라고 믿었던 시대가, 적어도 대중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요괴와 바이러스는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점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이러스와 요괴는 접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 사람 심정이 되어본다면 병원체는 그야말로 요괴였습니다.

  생물 몸속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괴 짓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해명되지 않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103~104)

 

본 리뷰<3-이름이 문제다>에서 간단히 말한 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는 시시한 존재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다. 작은 생명은 하찮은 나부랭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다.

  이 진실에 터하면 인간은 야훼든 알라든 인간 관지에서 붙인 신명 앞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 그런 신관은 마치 소아마비를 요괴가 가져다주는 병이라 믿은 몽매와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참된 신은 박테리아며 바이러스다.”

 

이를 좀 더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코로나19는 사탄세력 음모라 백신 맞으면 안 된다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하나님 심판이니, 구원받은 사람은 대면예배 나와도 병에 걸리지 않으며, 걸렸던 병도 낫는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여전히 옛날 사람 심정을 지니고 있다. 사탄이라 하든 하나님이라 하든, “요괴와 다른 점이 전혀 없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을 미신 아니라 뻐기지만 그야말로 근자감일 뿐이다.

 

저들이 몽매하다고 비웃는 일은 쉽다. 저들이 매판수구세력 핵심으로서 무시 못 할 사회정치적 힘을 구사한다는 사실에 대응하는 일은 어렵다. 이 어려움 때문에 우리사회가 저들을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다. 저들을 이용해 권력과 부를 불리는 지배층에게 먹잇감 던져주는 꼴이니 말이다. 정치, 사법, 언론, 재계 과두엘리트가 저들을 조종해 공동체 파괴행위를 계속하는 한, 진실을 천명하고 기억하며 지키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아 불가사의하다고 해서 요괴나 신에게로 건너뛰는함정에 빠져 우리는 잃을 만큼 충분히 잃었다. 그 상실을 대가로 지불하고 얻은 지식과 지혜로 해명되지 않는진실을 향해 우리는 곤두박질쳐 다가간다. 우리 곤두박질은 낭/풀에서 지의류를 거쳐 곰팡이와 박테리아, 그리고 마침내 바이러스에 가 닿는다. 바이러스 전방위정삼각형 20개가 그려내는 얼기설기entangled 세계 진실에 요괴는 없다. 요괴 동급 하나님은 더욱 없다.

 

얼기설기 세계가 빚는 창발이 참 신이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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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의 비밀 - 코로나19부터 유전자 치료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비한 바이러스 이야기
다케무라 마사하루 지음, 위정훈 옮김, 강석기 감수 / 파피에(딱정벌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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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이지 않습니다.......감염되어도 죽지 않고 바이러스와 공존 공영하는존재가 숙주입니다.......높은 치사율은 원래 숙주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80~8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오리 같은 물새에 깃들어 사는 바이러스며, 에볼라 바이러스는 박쥐에 깃들어 사는 바이러스다. 코로나19 역시 인간이 숙주가 아니다. 이들이 인간 몸으로 들어오게 된 일 자체가 괴이한 사건이다. 괴이한 사건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인간이다. 원래 숙주를 식용으로 해서건 그들의 서식지를 파괴함으로써 인간 가까이 노출시켰건 인간이 그들을 숙주 삼은 바이러스에 감염되도록 한 인과 사슬은 인간 자신이 만들었다. 그래 놓고는 바이러스와 그 공포를 희생양 삼아 떠들고 또 떠든다. 권력은 그 쇼로 민중 명줄을 조이고, 자본은 그 사이 민중 호주머니를 턴다. 진실을 비틀어 바이러스가 소비되는 현 상황에 대한 간결한 소묘다.

 

악마적으로까지 묘사되는 영리함을 지닌 바이러스가 바이러스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어찌 자신이 깃들어 사는 숙주를 죽인단 말인가. 그러면 저도 죽는데. 그런 짓은 인간만 저지른다. 인간 또한 기생생물이다. 심지어 숲은 원래 인간 숙주다. 제 원래 숙주인 숲을 잔혹하게 죽이는 주제에 바이러스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바이러스를 악마로 만들수록 인간은 깊숙한 투사로써 중증 정신병에 침륜될 뿐이다. 인류는 종적으로 이미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가 일으킨 국가, 문명, 과학이 지구를 엎어버리고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팬데믹이다. 팬데믹을 두고 하느님 코로나19에게 사탄 바이러스인간이 내기를 거는 중이다. 이 내기에 욥은 있는 걸까.

 

원래 인간은 숲을 죽이지 않는다. 아무리 불태우며 베어내도 죽지 않고 인간과 공존 공영하는 존재가 숲이다. 수많은 숲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원래 인간 숙주가 아니라는 증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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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의 비밀 - 코로나19부터 유전자 치료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비한 바이러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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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생산 설비는 갖지 않고 단지 설계도만 가지고 다니는.......‘최고 미니멀리스트’........(73~74)

 

20대 법학 공부할 때 각별히 좋아한 과목은 헌법학이었다. 통치구조와 기본권으로 이루어진 비대칭 대칭 구조가 주는 단단한 형식미와 예컨대 인간의 존엄’ ‘민주적 기본질서같은 큰 개념이 주는 역동적 내용미 때문이었다. 이 형식미와 내용미가 한 국가에 헌정된 설계도여서 지니는 장엄미로 수렴될 때 청년 초기 나로서는 웅숭깊이 감응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이 감응은 유신헌법 해석인 사시 공부를 그만두게 한 한 요인으로 작동했지만, 유신헌법에 대한 반감이 헌법학 자체에 대한 내 애정을 흔들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내가 사시를 전격적으로 그만두기 직전 2차 시험 헌법학 점수는 합격자 평균보다 무려 15점이나 높았다.

 

헌법은 국가 설계도다. 모든 설계도가 완벽하지는 않으나, 예컨대 비정상국가가 돌출시킨 기괴한 조항 따위 잡스러움이 제거된 최고 미니멀리스트로서 설계도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존중받을 만한 권위를 스스로 지닌다. 어떤 특정 설계도가 악을 구조화한다고 해서 설계도 전체를 악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바이러스가 혹시 현존하는 생명 네트워킹 전체 설계도는 아닐까? 바이러스가 혹시 현존하는 생명 네트워킹 전체 창조자는 아닐까? 저자가 도발적으로 던지는 질문이자 가설이다. 바이러스가 점한 생명과 비생명 사이 경계 위치도 그렇고, 무색투명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지니는 결곡한 정이십면체 구조도 그렇게 이 질문이자 가설을 향해 눈길 주고 있다. 바이러스 하면 질병과 죽음부터 떠올리는 의료 매몰 인간이나 창조주 신앙 지닌 미신 매몰 인간에게는 어림없는 일이겠지만 이보다 더 꼭 똑 맞아떨어지는 설계도도 창조자도 있을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허구가 아니며, 낱낱이 특수한 개체지만 온이 보편적인 전체다. 그러하다.


바이러스는 생명 설계도다. 모든 설계도가 완벽하지는 않으나, 예컨대 질병을 유발하는 기괴한 유전자 따위 잡스러움이 제거된 최고 미니멀리스트로서 설계도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존중받을 만한 권위를 스스로 지닌다. 어떤 특정 설계도가 질병을 유발한다고 해서 설계도 자체를 악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40년 훨씬 지난 지금도 곡진한 공부로 단권 텍스트화해 지니고 있었던 김철수 교수 헌법학 책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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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의 비밀 - 코로나19부터 유전자 치료까지, 우리가 알아야 할 신비한 바이러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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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어디에나 있습니다.(21)

 

 

테리 이글턴 유머란 무엇인가주해리뷰5. <가면 벗기 또는 벗기기>(2020. 4. 8.)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시시 프란치스코가 예수를 본받아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간다. 얼마쯤 지났을까, 제자 중 하나가 허기를 견디다 못해 몰래 밥을 먹는다. 스승에게 그 광경을 들킨다. 당사자 포함, 모든 제자들이 숨죽이며 처분을 기다린다. 스승은 성큼성큼 다가간다. 그리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가면을 벗고 약점의 희극적 연대가 시작되면 유쾌하다.”


가면을 벗으면 된다. 아시시 프란치스코는 예수를 본받아 가면을 벗었다. 예수는 신의 가면을 벗고 인간이 되었다. 죄 없는 인간의 가면을 벗고 사형수로 죽었다. 죽음의 가면을 벗고 무덤을 비웠다. 부활의 가면을 벗고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거점마저 지웠다. “나를 만지지 마라!” 우주 최강의 유쾌한 우스개다.


이리도 유쾌한 우스개가 바로 예수의 구원이다. 예수 장사꾼 집단인 기독교는 예수의 우스개를 따라 유쾌하게 웃지 않는다. 너무도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진지함·······점잖은 허구·······가면에 집착한다. 이 집착을 벗겨낸다면 코로나19야말로 전지전능한 하느님 아닐까.

 


인간이 쓰고 있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진지함·······점잖은 허구·······가면은 자신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전제하는 망상이다. 신에게 투사했던 시대에는 그나마 겸손이라도 떨었는데, 과학 주술에 사로잡힌 뒤부터 가면을 제 얼굴과 일치시키는 병증이 급격히 악화돼 비가역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휘두른 주먹 단 한 방에 넉 아웃이 되었다.

 

코로나19야말로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다. 결코 은유나 반어가 아니다. 코로나19는 인간 과학이 끝내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어젠다를 지닌다. 코로나19는 단시간 내에 수십 억 인간에게 마스크를 씌우는 힘을 지닌다. 코로나19는 편재遍在한다. 코로나19 아니라도

 

바이러스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디에나, 모든 다른 생명체 개체 수 총합보다도 많이 존재하는 바이러스를 피할 길은 없다. “위드 코로나를 꺼림칙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위드 바이러스로 단도직입 나아가야 한다. 편재하는 바이러스 대부분이 코로나19와 달리 해를 끼치지 않으며 심지어 이롭다. 더군다나 인간 게놈 상당수가 바이러스에서 기원한다니 그야말로 운명이다. 운명 앞에서 곡진할 때 그 운명은 천명이 된다. 이제 인간 천명은 바이러스를 향한다. coram V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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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균, 나쁜 균, 이상한 균 - 똑똑한 식물과 영리한 미생물의 밀고 당기는 공생 이야기
류충민 지음 / 플루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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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구즉생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 久卽生

 

3000년 전 중국 현자들은 생명은 궁함을 극복하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변화하다 보니 통하고, 통하다 보니 오래 가고, 오래 간 것이 결국 생명 근본이라 생각했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식물은 궁함을 극복하기 위한 변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 식물은 오랫동안 지구에서 지내며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이 지녀야 할 중요한 특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 대부분은 미생물이나 곤충에서 비롯한 스트레스라는 궁함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식물이 변화한 이야기다. 반대로 식물에게 궁함이었으나 식물과 함께 적응해 식물에게 도움을 주는 변화가 된 미생물 이야기이기도 하다.......식물과 미생물, 그리고 곤충은 서로 궁함을 메워줄 대상으로 때로는 경쟁하며 때로는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많은 병의 원인이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미생물 불균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균형을 유지하면 병이 나지 않는다.......

 

지구를 잘못 사용한 대가로 인간은 다양한 궁함에 직면해 있다.......지구(자연)는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도 근본적인 변화를 말이다. 균형을 이루며 같이 사는 방법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다른 식물과 다른 생명체와 공존을 생각한다면 변화를 위한 재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제발 지구를 사랑하고 식물을 사랑해주기 바란다. 그 속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은 미생물, 나쁜 미생물, 이상한 미생물까지 함께···.(257~260)

 

窮卽變 變卽通 通卽久<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주역 사상 요약이다. 해석은 여기 저자처럼 궁함, 스트레스 정도가 보통이다. ‘질적 전환을 일으킬 만큼 양적으로 축적된 상황으로 읽는 견해가 더 주역 전체 맥락에 맞아 보인다. 은 궁박窮迫이기도 하지만 궁극窮極이기도 하다. 궁박과 궁극이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극에 달한공시적 지평, ‘때가 찬통시적 맥락이 결합된 상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면 협소함을 벗어날 수 있다.

 

사실 내가 개인적으로 일으키고 있는 최근 변화는 궁함에 처해서 극복하려고 그런다기보다 깨달음이 변곡점, 꼭 똑 그 카이로스에 도달해서 그러는 측면이 강하다. 예컨대 오랜 식사 습관을 바꾸는 일은 내 인간생물체의 어떤 궁함이 계기가 되지 않았다. 강용원이라는 인간생물체 이름으로 환유된 네트워킹생물체 전체는 물론 미소생물체에 온전히 감응하려고 홀연히 바꾸었다. 아내는 나더러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내 영혼은 오히려 덤덤하다.

 

인간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다양한 궁함맞은편에는 엄청난 누림이 있다. “다른 식물과 다른 생명체와 공존을 생각하지 않고 독차지한 풍요는 지구를 잘못 사용한결과물이다. 극에 달했다. 더는 안 된다. 때가 찼다. 다시는 안 된다. 그 잘못된 사용을 중단해 과잉된 누림을 거둬들여야 한다. 누림을 거둬들이면 상대적으로 궁함에 처한다. 그 궁함으로 흔연히 나아가야 한다. 이렇듯 벗어날 궁함과 끌어안을 궁함이 공존한다. 이치에 맞다.

 

이치에 부합한 사유와 실천은 이성이나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정서적 울림이 주는 감화와 일치가 없을 수 없다. 술을 하도 좋아해 아내가 술이 당신에게 뭐냐 물었을 때 엄마라고 대답했던 내가 식사 습관을 바꾸면서 실로 반세기만에 단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결기 세워 하는 일이 아니다. 인간생물체 너머 미소생물체와 네트워킹생물체를 아끼고 보듬는 감성이 흘러서 그리 되고 있다. 다 낭/풀 덕이다. 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 덕이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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