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7장 본문입니다.
大哉. 聖人之道. 洋洋乎發育萬物 峻極于天.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待其人而後行. 故 曰苟不至德 至道不凝焉. 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是故 居上不驕 居下不倍. 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크도다. 성인의 도여. 양양하게 만물을 발육하여 그 높음이 하늘에 닿았다.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 삼백 가지와 위의 삼천 가지가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 행해진다.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으로 하지 아니하면 지극한 도는 실행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 이 때문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2. 전체적으로 대구(對句)를 통해 속뜻을 전달하려는 형식을 취한 장입니다. 하지만 對句가 그리 치밀하지 않고 일관성을 잃은 듯한 메시지가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많은 해석이 두루뭉술한 순접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對句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문맥에 일관된 흐름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3. 우선 성인의 도와 예의, 위의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仁과 禮의 관계와 같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군자의 도는 이상형으로서 어떤 실체(substance)처럼 인식되고 예의, 위의는 실천 과정처럼 인식됩니다. 이는 후대 주희의 체용(體用) 대비와 맞물리는 것이겠지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무리 위대한 성인의 도라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실천 없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4. 이런 빛에서 그 아래 문장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며 광대함을 이루어 정미함을 다하고 고명함을 극도로 하여 중용을 실천하며 옛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며 돈후함으로써 예를 숭앙한다(故 君子 尊德性而道問學 致廣大而盡精微 極高明而道中庸 溫故而知新 敦厚而崇禮)."
하지만 어조사 이(而)를 앞뒤로 해서 배치된 말의 내용이 누가 봐도 상반된 것인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접으로 처리해서 대구를 통한 강조 의도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덕성이 존귀하게 되고, 넓고 큰 경지에 이르고, 높고 빛남이 극에 달하고, 이미 갖추어진 옛것을 익히고, 돈후한 것은 이상적이고 당위적인 경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고 배우며,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며,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알아 나아가며, 예법을 지키는 것은 부단한 닦음, 깨어 있는 실천 감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도란 찰나찰나 치열한 실천 과정으로 증명되는 것이지 관념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상반적 대구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각 而 뒤에 오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溫故而知新! 이 말은 이미 溫故에 무게가 실린 채 그 의미가 정착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순접으로 읽은 데서 비롯한 오류입니다.
성인의 도가 과거 어느 시점에 이미 완성된 실체적 존재로 관념화, 박제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 바로 溫故而知新입니다. 물론 순 임금과 같은 성인의 이상형이 실존했다는 전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순 임금은 순 임금 자신의 실천을 한 것뿐입니다. 그 예를 본받되 우리는 우리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게 知新입니다. 바로 그 知新이 관건입니다. 성인은 각자 자신의 성인입니다!
그러므로 늘 묻고(問) 배우고(學) 사소한 것까지 곡진히 살피고(盡精微) 평범함에서 어긋나지 않고(中庸) 세세한 예법 하나까지 지키는(崇禮) 치열함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기도 하고 자긍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도를 적확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면서도 자랑하지 않으니 겸손이요, 비록 성인이란 자의식은 한사코 내려놓지만 당당하게 평범함에 깃드니 자긍입니다.
5.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배반하지 아니한다(居上不驕 居下不倍)"는 말이 바로 겸손과 자긍을 역설의 연금술로 달여 낸 것입니다. 다만 저는 배(倍)의 뜻을 달리 새깁니다. 윗사람의 교만과 아랫사람의 배반은 썩 어울리는 대칭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倍는 비속하다, 더 나아가 비굴하다는 뜻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만과 대립항이 될 수 있습니다.
6. 국유도(國有道) 이하 문장 역시 종래의 읽기를 답습하면 전체 문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그 말로써 그 몸을 일으킬 수 있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그 침묵이 그 몸을 보존할 수 있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이미 밝고 또한 어진 것으로써 그 몸을 보존한다."고 하였으니 아마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國有道 其言 足以興 國無道 其默 足以容. 詩曰 旣明且哲 以保其身 其此之謂與)."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이리 읽으면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제10장에서 말한 바,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드러내어 말함으로써 더욱 분발하게(興)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알고 있음에도 덮어주어(容) 장차 바른 길로 나올 여지를 남겨둔다."
이런 해석은 제6장에 나온 순 임금의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는(隱惡而揚善)" 실천과 일치하기 때문에 타당성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 문장이 제26장 말미에 오기에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7. 정국이 혼미할 때 흔히 원로들에게 자문(諮問)합니다. 원로란 무엇입니까? 중용 텍스트 안에서 순 임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순 임금이라는 사표를 통해 공자의 중용 실천이 현안이 되듯 원로들은 오늘 우리 현안에서 중용을 실천하는 사표가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우리 현대 정치사에 등장한 원로들 면면을 보면 대개 이와는 동떨어진 인사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권력자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불러들인 까닭이지요. 그들을 어찌 순이라 할 것입니까?
그러면 누가 순 임금입니까? 정녕 이 나라에 원로다운 원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의 눈에 그 원로들은 불순세력 아니면 사탄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니 모셔질 리 없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보면 이 땅에 살아 있는 순 임금은 오직 백성뿐입니다. 무슨 욕을 먹어도 묵묵히 제 삶을 지키는 이름 없는 백성, 그 숭고한 익명성이야말로 중용 실천의 사표이자 실현입니다. 안타깝고 또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도리 없는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