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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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바닥 저 끝까지 내려갔다. 그 바닥은 단단하다.” 영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통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바닥만이 단단하다는 것이다.(246쪽)


얼마 전 고등학생 하나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그 아이는 이른바 목동 맘이 키운 목동 키드입니다. 실은 몇 년 전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아이는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전교1등이었던 아이가 어느 순간 공부를 내려놓았습니다. 당연히 꼴등짜리 '쓰레기'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어머니는 폭력과 회유를 번갈아 행하며 도로 올라올 것을 촉구했습니다. 사실은 그 목적을 위해 아이를 제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몇 번 상담하던 중 그 내용의 요약을 문서로 요구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의도에 부역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저는 직감으로 그 아이가 훗날 스스로 저를 찾아올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상담 첫날 나눈 대화 한 토막 때문입니다.


“너 지금 바닥인 거 맞니?”

“예.”

“다시 올라올 거니?”

“아뇨!”

“왜?”

“여기서 이전 나와 다른 나를 찾을 거예요.”

“그러면 됐다. 그 바닥이 네 ‘바닥’이다.”


분명히 바닥입니다. 하지만 도로 올라올 것이 아니라면 바닥이 아닙니다. 도로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전 기준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다른데 어찌 꼭대기와 바닥이라는 수직관계가 있을 것입니까. 바닥은 그 바닥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 것이기에 삶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삶의 차원을 바꾸는 “단단”한 “오직” 하나의 근거, 그것이 그 아이의 바닥이었습니다.


그대여, 하얀 눈뭉치를 창가 접시 위에 올려놓고 눈뭉치가 물이 되어 드러눕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뭉치는 하얗게 몸을 부수었습니다 스스로 부수면서 반쯤 허물어진 얼굴을 들어 마지막으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내게 웅얼웅얼 무어라 말을 했으나 풀어져버렸습니다 나를 가엾게 바라보던 눈초리도 이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한 접시 물로 돌아간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이제 내겐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눈뭉치이며 물의 유골인 나와도 이제 헤어지려 합니다


문태준의 <조춘早春> 전문입니다. 수직의 영역을 지녔던 그대가 오직 수평의 물, 그러니까 바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그대를 껴안고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물의 유골인 나와도 결별입니다. 결별을 가능하게 하는 곳이 바닥입니다. 자기가 처한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 가르는 유일한 기준은 결별 여부입니다. 결별은 깨침입니다. 깨침은 바닥에서만 일어납니다. 바닥에 닿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다시, 문태준입니다.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전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몸을 굽혀야만 합니다. 몸을 굽히지 않으면, 옛 자신과 결별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자신을 주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자신은 바닥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한사코 높이 올라가려고만 하는 이 세상에서 몸을 굽혀 바닥에 닿으려는 것은 바보짓임에 틀림없습니다. 바보로 살라 가르치는 큰 스승 없으니 저 같은 무명의 의자라도 나서서 이리 주절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 꽃별들이 물 되어 바닥에 누워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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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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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필멸을 공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공통적인 필멸을 드러내는 것이다.·······“내가 한 때 죽음을 삶의 과정으로 직면했다면, 내게 두려워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내게 다시 한 번 권력을 행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237쪽)


가수 윤선애의 노래 <하산> 후반부 가사는 이렇습니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입니다. 필멸하기 때문에 삶이 간절해집니다. 간절하게 살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필멸의 존재들이 더불어 살아갑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들은 하나하나 특별합니다. 하나하나 특별하므로 서로서로 각별합니다. 서로서로 각별한 존재는 서로서로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드러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맞서야 할 것은 “권력”입니다. 권력은 필멸에 대한 두려움을 복원하려고 은폐를 통치 프레임으로 세웁니다. 은폐는 각별한 존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갈라진 각별한 존재는 서로의 특별함을 공격합니다. 특별함이 파괴된 존재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뿔뿔이 흩어진 존재들이 나뒹구는 세상이 아름다울 리 없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누가 간절함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간절함 잃은 세상은 필멸공포 초일극의 질곡 아래 신음할 것입니다.


시인 김소연은 신문 글 <청맹과니>에서 11.14집회를 철저히 은폐하는 권력과 그 주구인 관제 언론이 촉발시키는 무서움, 그 느낌인 두려움을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집회가 왜 열렸는지, 집회의 중요한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지 않는 언론들이 무서웠다. 집회에 참가한 농부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게 됐다는 사실도 내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지만, 그가 왜 집회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그 절박한 이유를 꼭 알고 싶다. 알고 싶고, 알아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도록, 정보에 차벽을 치는 언론이 무섭다. 광장에 차벽을 치고 시민에게 물대포를 쏘는 공권력만큼이나 무섭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이 일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티브이와 신문이라는 사실이, 이미 그런 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무서워진다.


무서움, 그 느낌인 두려움은 은밀하게 필멸로 스며들 것입니다. 차벽을 부수고 필멸을 가차 없이 드러내야 합니다. 필멸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순간, 두려움의 에너지는 혁명의 타격으로 전화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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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아서 프랭크 지음, 최은경 옮김 / 갈무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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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사회적 진단보다 의학적 진단을 선호한다. 의학적 진단은 치료를 승인하는 반면, 사회적 진단은 그 사회체제가 자신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것의 전제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변화를 요구한다.(223쪽)


서구 전통에서는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을 3대 신성학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정점은 신학입니다.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는 공식 업무 중에 가운을 입습니다. 신을 대리한다는 상징적 표시입니다. 신성을 담는다는 것은 불변한다는 것입니다. 3대 신성학문의 패러다임은 일단 확립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이 기본적으로 체계의 단단함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해할만합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근본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에 말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대로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의 정치적 보수성과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근본성radicality은 급진성radicality과 같은 말입니다. 문제의 근본을 참으로 깨달았다면 급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타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가가 그러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의 정치적 보수성은 협잡의 산물임이 분명합니다.


협잡의 근원은 돈과 권력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치상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는 권력과 돈에서 가장 멀리 있어야 하는 직업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특히 우리 현실은 정반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에 눈멀고 권력의 개 노릇하는 사제, 법관, 그리고 의사가 대박 나는 일을 너무나 자주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제, 법관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말씀드리기로 하고 의사 이야기만 부연하려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의사, 정확히는 양의사 집단은 가히 최고의 주류 집단입니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단 한 번도 핍박받지 않고 특권을 누려온 매판독재세력의 고급 부역 집단입니다. 대부분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바뀌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금 세상 아래서 더 많은 권력으로 환자 위에 군림하고, 더 많은 돈으로 호사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들에게 치료란 바로 그 탐욕을 채우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득권체제를 유지하고 확산하기 위한 관리 방식이자 재생산 메커니즘입니다.


지금, 집권 세력은 의료 민영화나 중독법 등을 통해 의사와 아픈 사람들을 장악하듯, 역사교과서 단일화를 통해 교사와 아이들을 장악하려 합니다. 교육과 의료는 시민을 건강하고 성숙하게 길러내는 과정으로서 양육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집권 세력은 이 문제의 결정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독수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 소용돌이는 분명 의학계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의학적 진단에 매몰되어 매판독재 세력의 주구 노릇하는 죄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됩니다. 가운을 벗고 시민으로 문제 한가운데 서야 합니다. 국가라는 이름의 도적떼가 무슨 짓을 하는지, 그 짓으로 망가진 사회를 어찌 변화시켜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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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마음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저는 다양한 인연의 결을 따라 상담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30년 이상 이런 경험이 쌓이는 동안 크게 3단계로 상담은 숙성되었습니다.

 

 

1. 상담, 평범한 일방성으로서

 

이것은 평범하고 통속한 바로 그 상담입니다. 누구나 접하고 누구나 할 법한 그런 상담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담자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누군가를 변화시키고 치유한다는 의식을 지닙니다. 아무리 내담자가 많은 발을 하더라도 치유의 이니셔티브는 상담자가 쥐고 있습니다. 진실 여부와 무관함은 물론입니다. 여기서 나누는 이야기는 정신의학이나 임상심리학의 내용이 압도적 우위를 점합니다.

 

 

2. 숙담, 평범한 쌍방성으로서

 

이것은 평범하지만 통속하지 않은 상담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담자는 내담자를 더 이상 객체로 다루지 않습니다. 동등한 서로 주체로 대합니다. 내담자도 치유의 주체임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이야기 속으로 정신의학이나 임상심리학 이외의 내용이 들어옵니다. 이를테면 인문상담의 성격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요. 함께 마음병과 그 조건인 일상을 가로지르며 폭넓은 치유연대를 형성합니다. 

 

 

3. 숙론, 비범한 쌍방성으로서

 

이것은 비범한 상담입니다. 아니 상담을 넘어선 무엇입니다. 치유 너머의 땅에 발을 내디디는 숭고한 작업입니다. 정신의학, 임상심리학, 그리고 인문학의 영역이 융해됩니다. 상담의 두 당사자가 함께 삶을 깊이 의논합니다. 더불어 새로운 삶을  빚어가는 창조연대를 형성합니다. 그 창조는 기품 있는 양육행위입니다. 인간은 끊임없는 상호 양육으로 공공선을 이룹니다. 그것만이 지복입니다.

 

 

0. 사람들이 묻습니다. 허구한날 아픈 사람들하고 사는데 아프지 않은가? 아픕니다, 심하게. 어찌 사는가? 아픈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깊이 의논하며 삽니다. 거기 경이가 깃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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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증언 - 상처 입은 스토리텔러를 통해 생각하는 질병의 윤리학 카이로스총서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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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다가오면, 그것을 반기는 만큼이나,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그것은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목적의식을 다시 만드는 문제다.(213쪽)


우리 모두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감기몸살로 몇 날 앓아누울라 치면 아파서 힘든 것, 쓰디쓴 약 먹어야 하는 것 빼놓고는 온갖 좋은 일이 생깁니다. 실컷 자도 누구 하나 잔소리 않지, 학교 안 가도 되지, 숙제도 없지, 엄마가 극진히 돌봐주지, 하루 종일 누워 뒹굴어도 되지, 평소 못 먹는 음식도 먹을 수 있지·······. 그러다 어느 날, 열이 내리고, 근육통이 사라지고, 기침이 멎고, 누런 콧물이 잡히면, 으레 엄마가 이마에 손 얹어보고는 “우리 아기, 인제 다 나았네.” 하십니다. 바로 이때 “네!” 하고 벌떡 일어나는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이럽니다. “엄마, 아직도 많이 아파!”


해방이 다가오면”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는 사실. 해방되기 이전의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목적의식을 다시 만드는” 일이 더 맹렬한 과제로 들이닥친다는 사실. “해방”이란 더 활짝 열린 구속의 문 앞에 서는 것이란 사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해방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해방되고 나면 우울합니다.


여기서 생긴 복합적인 마음의 병리 상태를 저는 ‘성공’직후증후군이라 이름 합니다. 특히 청년기 이전 학생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민사고·외고·과고 입학 직후, 서울대·카이스트와 그 대학원 입학 직후에 저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여태까지 왕으로 살았는데 가보니 황제, 심지어 신이 득시글거립니다.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만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작일 뿐입니다. 당최 이 새로운 조건에 적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들이닥치는 전천후 허무감, 정체 모를 두려움, 아득한 절망감·······우울과 불안이 삽시간에 동맹을 맺어 심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결박합니다. 그 이전 삶의 억압이 심할수록, 해방적 성취가 극적일수록 ‘성공’직후증후군은 엄중합니다.


성공이 종교가 된 세상에서 ‘성공’직증후군이 떠도는 것은 성공이 결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외고 가면 성공일까요? 서울대 가면 성공일까요? 검사 되면 성공일까요? 국회의원 되면 성공일까요?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이 우리사회를 어찌 만들었는지 돌아보면 ‘성공’은 ‘성공’한 개인에게든 공동체에게든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공이 아닙니다. 성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인간 성숙입니다. 인간 성숙이 수반되지 않는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그 성공 아닌 성공을 이른바 ‘성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생 ‘성공’을 위해 인간 성숙을 말아먹는 ‘성공’시대의 희생양이 다름 아닌 ‘성공’직후증후군입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은 ‘성공’직후증후군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있다.” 식으로 반응합니다. 나태하다고 꾸짖습니다. 여태까지 그들을 억압했던 바로 그 방식을 더욱 강화하여 다그칩니다. 서구의학은 우울이나 불안 증상을 완화하는 약물로 틀어막아 적응을 강요합니다.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갈 기회를 영구히 박탈하고 ‘성공’기계로 살아가도록 강제합니다. 우리사회가 ‘성공’ 한 자들의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성공’ 한 자들은 온갖 범죄와 패악을 통해 권력과 돈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탈체계를 영속화하기 위해 부정선거, 세월호사건, 국정교과서·······마침내 개헌으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성숙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각성과 행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인간이 성숙해 나아가는 과정의 변곡점에서 맺어지는 결실의 불연속적 연속체입니다. 각 변곡점이 품은 불연속성은 기존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목적의식을 다시 만드는 문제” 자체를 혁파해야 드러납니다. 혁파가 진정한 성공이며 “해방”입니다. 진정한 해방이 치유입니다. 치유는 양육입니다. 양육은 궁극적으로 성숙의 문제지 성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공이 빛나는 면류관이려면 성숙한 인간의 기품 위에 얹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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