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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 사랑의 과학화 - 자연주의 출산의 거장이 전하는 21세기 사랑의 의미
미셀 오당 지음, 장 재키 옮김 / 마더북스(마더커뮤니케이션) / 2014년 5월
평점 :
용서하는 능력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용서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159쪽)
용서만큼 인간에게 신랄한 중요성을 지닌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쉽게 입에 올립니다. 용서의 역설입니다.
용서의 한자는 容恕입니다. 容은 물이 흐르는 깊은 골짜기(수로)와 집을 결합한 글자로서 전체 이미지는 근본에서 여성적입니다. 아기를 낳고 젖 먹여 기르는 어머니의 너른 품을 떠올리게 하는 글자입니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포용의 뉘앙스가 강합니다. 특히 谷은 성·출산·육아를 압축한 그림 글자로 상상하기에 충분한 모양입니다.
恕는 보시는 대로 如와 心을 결합한 글자입니다. 마음은 다 아시는 바 췌사를 더할 이유가 없으므로 如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如는 늦추어 푼다는 의미인데 女와 口로 구성한 것은 여성(엄마)이 타인(아기)의 말에 귀 기울여 잘 받아들인다, 따른다는 내용을 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恕 또한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글자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연유를 눈치 채셨는지요. 어느 누가 타인에게 어머니 마음을 쉽게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잘못 또는 죄를 저지른 사람을 엄마가 갓난아기에게 건네는 무조건적 포용으로 어찌 쉽게 감쌀 수 있단 말입니까. 어렵디어렵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기에 누구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누구든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 잘못과 죄가 모두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남아날 인간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용서는 공동체 존속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러나 용서 또한 누락시킬 수 없는“전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이나 죄를 저지른 자가 자복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자복하고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 베푸는 용서는 용서가 아닙니다. 야합입니다. 그 야합은 야합의 당사자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야합으로 파멸하지 않으려면 값싼 용서 아닌 징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징치는커녕, 아니 야합의 용서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서 나라 전체가 들끓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통령이라는 자가 개인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비선의 실세를 통해 국정 전반을 유린한 죄가 만천하에 드러난 판임에도 본인은 물론 그 주위에 포진한 매판독재분단세력이 적반하장으로 나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정변의 당사자 두 사람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용서의 여성성을 말하는 이 자리에서 매우 중대한 논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론이 더 나쁘게 돌아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으나 문제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이런 기억을 떠올려야 합니다. 박근혜가 이른바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제법 많은 사람들이 여성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저 뜨르르한 김지하가 대표 주자입니다. 개벽을 운운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 한 사람, 신학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현경. 그는 박근혜에게 “큰, 어머니와 같은 리더십”을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박근혜가 어머니 마음을 털끝만큼이라도 지녔다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는커녕 여성도 아닙니다.
용서는 잘못이나 죄를 끌어안는 마음이라는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지녀야 할 가장 근원적인 드넓음, 그러니까 어머니로서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 그리고 사태를 품어 들이는 영성이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장엄입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도정은 숭고합니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이 숭고를 가장 눈물겹게 살아내고 있는 분들은 세월호 아이들 엄마일 것입니다. 그 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정변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저로서는 가늠이 안 됩니다. 차마 가늠해보려 하지 못합니다. 그저 멀찌막이 그 분들 뒤에서 함께 행진하려 합니다. 2016년 11월 12일, 942번째 2014년 4월 16일 오후에 말입니다. 사퇴하고 처벌받는 것이 용서를 구하는 유일한 길임을 박근혜가 깨닫게 하려면 우리 모두 숭고의 길섶에라도 서서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