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당한 전옥서 터(종각 맞은편)에 세워진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상. 관군에게 잡혀 압송되는 장면을 찍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형형한 눈빛이 압도적이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듯하다. 여전히 준동하는 친일파 자유당 떨거지들 꿈에 밤마다 나타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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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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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어찌 산야에 매일까 보냐.

한의원 건물 뒷벽을 타고 올라

화장실 창문 틈에서 손을 흔드는 담쟁이가

참으로 사랑스럽다.

춘풍마저 남실남실 낮술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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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만 정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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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남짓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정치를 업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능력도 인격도 모자라니 어쩌겠나. 게다가 내가 지닌 정치적 시선이 거개 제도권 밖의 비판적 이론에 터 잡은 것이어서 더욱 아득한 길이었다. 현실 정치인을 깊고 길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일종의 가차 없음에서 오는 오만이었다. 가차 없는 말에 깃든 나이브함을 깨달으면서 내 생각은 가파르게 낭창낭창해졌다.


내 깨달음은 물론 내 직업에서 비롯하였다. 마음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 가차 없는 진단·처방이 어떻게 정답을 오답으로 작동하게 하는지 여실히 보아왔다. 아픈 사람의 현실은 대단히 복잡다단하다. 모호 무인지경이다. 이를 전방위·전천후로 끌어안지 않은 채, 격자 이론 틀에 맞추어 단호하게 들이미는 말은 맞는 만큼 그대로 공격일 따름이다. 치유의 말은 아픈 사람의 모호한 현실을 진실하게 담아내야만 한다.


시인 이영광은 『시는 어떻게 오는가』 속 <진실에 불과하지 않은>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오류지만,

부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정확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부정확한 것을 부정확하게 정확히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초능력일 것이다.


어디 시뿐이랴. 어찌 마음 치유만이겠는가. 정치야말로 초능력을 향해 가는 지난한 여정일 것이다. 4월 27일, 우리는 그 여정의 드라마틱한 풍경 앞에 있었다. 나라의 명운을 걸머진 두 사람이 도보다리에 앉아, 부정확하고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현실을, 부정확하고 불확실하고 불확정하게, 정확하고 확실하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모습을 우리는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 목소리 아닌 새소리만 낭랑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도저한 초능력이었다.



망발의 탐욕 아닌 명징한 비원 하나가 비수처럼 심장을 뚫고 지나간다. 아, 저 자리라면 꼭 한 번은 앉아볼만하겠구나! 이영광은 꼭 저렇게 시를 써서 시의 문재인이 된다. 나는 그러므로 꼭 저렇게 숙의 치유를 해서 마음치유의 문재인이 된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능력과 폭력과 오류가 적폐로 엄존하는 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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