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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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나무가 어디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 - p.167

 

 

난 길을 걸을 때 주로 시선을 나무에 둔다. 집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는 전나무, 아파트 진입로의 단풍나무, 자주 가던 카페 앞의 벚나무, 건물 높이만큼 기다란 메타세콰이어. 그리고 우리 집 베란다 해피트리와 컬러 벤저민 등.

이처럼 사계절을 지나는 나무들의 변화를 지켜본 이라면 나무가 주는 위안의 고마움을 잘 알 것이다.

 

최근 나무와 숲이 그리워 산이나 식물원을 자주 찾고 나무에 관련된 책도 즐긴다. 예전에 읽은 [나무의 언어]와 [숨은 골짜기의 단풍나무 한 그루]도 정말 재미있게 보았었지만 이 책은 내가 읽은 책 중에 단연코 최고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많은 이야기 중 자연이 주가 되는 소재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깨닫는 바가 많다. 늘 주위에 있어서 무신경했던 나무와 풀들이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공기 한 줌의 소중함까지도 떠올리게 된다. 더불어 지금처럼 신선해야 할 공기가 미세먼지로 가득 찬 것에 미안한 마음도 가져야 한다.

 

나무들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닿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에는 너무 낮은 주파수로 말을 한다. - p.597

 

‘오버스토리’의 사전적 의미는 숲 상층부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뜻하는 단어이다. 작가는 거대한 삼나무를 보며 영감을 떠올렸으며 '아무도 숲과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한다. 내가 이전에 본 책들도 모두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긴 하나 인간이 직접적으로 숲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이 책은 현실적으로 더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책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보았으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보며 자연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것만이 희망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는 뿌리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뿌리라는 타이틀 속에 등장하는 아홉 남녀의 이야기를 읽을 때만 해도 이야기의 유기성을 연관 짓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테가 늘어나듯 그들의 이야기는 거대해지고 치밀해진다. 가족의 역사를 품은 수백 장의 나무 사진을 지닌 남자와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나무를 가졌던 남자, 그리고 운명의 나무 반지를 지니게 된 여자도 있다. 나무들의 삶에 자신의 생을 바친 여인도 있으며 나무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꾼 여자도 있다. 또한 애초에 나무 따윈 관심 없던 남녀와 인간 외에 모든 생명을 사랑한 남자도 있다. 그리고 나무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 삶의 방향이 바뀐 이들도 있다. 이처럼 각자의 삶 속에 나름의 이유로 존재하는 나무였으나 그들은 하나둘 이어지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게다가 1200년 된 왕유의 시가 누군가에겐 절망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위안이 되는 이중적인 순간도 이해가 된다.

 

나무의 가치를 알던 시절, 그들은 밤나무가 내어준 밤의 향기에도 취해 청혼도 하고 나무를 기점으로 가족을 이룬다. 호엘가에 밤나무가 두꺼워지는 동안 가족의 삶은 필름처럼 돌아간다. 산자와 죽은 자에게 똑같이 관대한 그늘을 내어주던 밤나무. 그들은 밤나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그 작업은 대를 이어 진행되고 엄청난 양의 사진이 남는다. 비록 프레임안은 밤나무만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지만 그곳에는 호엘가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한 대가 지나고 또 다른 대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을 기억하게 해 준 밤나무. 더 이상의 농장은 없지만 세월의 변화를 느끼고 있자니 울컥함이 밀려온다. 잘 익은 군밤 하나 입에 넣으며 위안을 얻고 싶어졌다.

 

나무에 관한 전설은 미신이 되고 곧 믿음이 되어 운명과 함께하기도 한다. 중국 이민자의 딸 미미는 아버지가 소중히 여긴 나무 반지와 두루마리를 물려받는다. 그녀의 아버지 삶에 운명과도 같았던 뽕나무와 그녀의 손가락에 운명처럼 끼워진 반지. 그런 과거를 지닌 그녀에게 어느 날 시청 앞 광장이 휑해진 모습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글러스를 만난다.

 

교도소 실험에 참가했다가 도중에 나와 자원입대하여 전쟁터로 간 더글러스는 비행기 폭격으로 가까스로 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의 생명을 구한 나무가 마구잡이로 벌목되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분노한다. 세상을 눈을 피해 조용히 벌목이 진행되고 있는 모습에 가증스러움을 느낀다. 국유림의 목적은 싸게 잘라내는 거예요. 그걸 산 사람을 위해서. - p.127

세상의 잘못된 계산 앞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심는 것뿐이다. 심고 또 심고 그리고 주문을 건다.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그리고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난 미미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다.

 

엉망인 삶을 살다 감전사후 다시 살아난 올리비아는 그 뒤 숲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에서 호엘가의 닉을 만나게 되고 파수꾼과 메이든헤어라는 별칭으로 평화 시위대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다 미마스를 지키기 위해 나무 위에서 시위를 이어가지만 공권력과 거대 자본가들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들의 분노가 좋은 시너지를 만들었으나 결국 충돌로 희생과 좌절만 남게 된다.

 

오래된 나무들은 우리의 부모이고, 어쩌면 우리의 부모의 부모일 것이다.

자연의 비밀을 배우려 한다면 더 많은 인류애를 키워야 할 것이다. ······ p.15

 

작가의 생각과 신념을 가장 많이 드러내고 있는 인물이라면 패티가 아닐까 한다. 어린 시절 청각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녀는 인간의 소리보다 나무 세상을 이해하는 촉이 더 발달한다.

확실한 사실이라는 것은 없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겸손함과 관찰뿐이다. - p.167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정확한 데이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녀는 끊임없는 관찰의 결과로 나무들이 사회적 생물이라는 데 확신감을 갖지만 그녀의 의견은 학계로부터 비난과 무시를 당한다. 그러나 과거의 일들이 미래에 더 명확해지듯 시간이 지나 서서히 그녀의 이론이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좁은 식견을 비판하고 있다. 더불어 미국의 잘못된 산림산업과 무분별한 목재산업에 경종을 울린다. 무엇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지식을 바로잡으며 생태계의 흐름을 이해시킨다. 죽은 나무도, 늙은 나무도 각자 존재의 이유가 있으며 생명체에서 불필요한 요소 따위는 없음을 강조한다. 인간과 나무와의 관계에서 인간은 절대 상위계층이 아니다. 상호보완하는 관계임을 깨달아 지구 생태계를 보존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더 이상 멋지고 환상적인 오버스토리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인류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면 밤나무, 뽕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린덴 나무, 무화과나무, 반얀나무, 전나무, 삼나무, 사시나무...... 등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식물원에서 놓친듯한 나무들을 찾아보느라 잠시 지체하기도 했다.

 

반얀나무는 태양을 공유하려고 싸우는 백여 개의 서로 분리된 몸통들 때문에 숲 전체처럼 풍성하다. - p.139

 

반얀나무의 묘사를 보며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괴기스럽고 어떻게 보면 신비스러운 그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인도에서 꽤 신성시되고 있는 나무로 많은 이들이 소원을 빌기도 한다는데 맹골 보리수 나무 또는 아바타 나무라고도 한단다. 국내에서 볼 수 없지만 식물원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반가울 따름이다. 또한 자연을 묘사한 멋진 문장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나무가 햇살을 조각조각 부순다. 신의 손가락. 그녀와 동생들은 그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

언덕은 건강함의 바늘꽂이처럼 보인다. - p.338

 

인류는 지구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 살고 있지만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어떤 이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며 또 다른 이들은 환경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낸다. 나무의 성장 기간뿐 아니라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환경운동가들을 급진적이라고 몰아붙이며 비난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나지 않기에 우리는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이미 많은 생명체를 잃었고 죽어가고 있다. 환경학자들 중 몇몇은 이미 지구가 회생 불가능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고백한 기사를 본적도 있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나무의 세계에 발을 들여 나무를 이해하고 숲은 지켜나가야 한다.

 

네 마음이 조금만 푸르렀어도 우리가 너를 의미로 가득 채울 수 있었을 텐데.- p.14

 

 

겨울은 나무의 영혼을 보는 계절이라고 한다. 겨울나무를 보며 이 말을 전하니 남편은 영혼이 아닌 알몸을 보는 계절이 맞는다며 우긴다. 겨우내 내린 눈이 땅속 양분이 되고 겨울을 이겨낸 나무는 그만큼 더 단단하고 강해진다고 한다. 그 단단함을 뚫고 새잎들이 반짝이며 돋아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R로 시작하는 여섯 글자. 위로가 되는 싹의 귀환. 새잎 (releaf) - p.527

 

문득 어피치가의 모습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게 한다면 어떨까. 나무의 소중함을 느끼는 이들의 수가 9명에서 90명으로 90명에서 900명으로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패티가 나무에게 드러난 고마움을 나도 대신 속삭여본다.

 

우리가 미안해. 우린 네가 다시 자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랐어.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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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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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최초 우주인 선발과정을 다루고 있다. 2008년 4월, 대한민국은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씨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고 그걸 지켜보는 나도 뿌듯한 마음을 지녔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260억 원짜리 이벤트성 항공 우주 사업'이라는 타이틀의 제목과 함께 엄청난 비난을 불러왔다. 그 당시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대중들은 무능한 정부의 혈세 낭비에 화를 풀 수밖에 없었으리라.

 

저자는 한때 우주인 선발 과정을 지켜보았고 어느 탈락자의 퇴장에서 사람들의 살아가는 과정을 그려낼 힘을 얻게 된다. 패배의 눈물에 마음이 쓰이듯 저자는 소설을 통해 삶에 숨을 불어넣고자 했다.

 

생태보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진우는 우연히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 공고를 발견한다. 그가 늘 동경하던 우주, 그리고 우주에서 해 볼 실험 리스트는 그가 반드시 우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였다. 그렇게 지원하고 여러 테스트 과정을 넘나들며 최종 후보에 들게 된다. 러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최종 일인이 될 자를 선발하는 과정은 더 처절하다. 이진우 외 다른 세 명의 후보자들은 저마다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 자리까지 왔고 그렇게 꿈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열정의 최고치를 갱신하고자 하는 이들은 오직 한 번뿐인 기회들을 두고 때론 동지로, 때론 경쟁자로 돌변하면서 한 단계씩 뚫고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이진우의 갈등과 고뇌의 무게를 같이 떠안고 있자니 이런 경쟁 따위는 벗어던지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결과보다 선발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올라선 그들이 진정한 우주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 되는 관문이 너무나 험난해 보인다. 테스트하는 장면이 너무나 생생해서 작가가 진짜 해 보신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으니 말이다. 네 명의 후보들은 타지에서 의지하고 믿음도 드러내며 동료애를 만들어 가다가도 어느 순간 예민해지며 경쟁심으로 인한 불안감과 질투로 인해 무력감과 씁쓸함에 빠지기도 한다. 각자가 지닌 능력만큼이나 꿈의 이유도 간절해 보여 과연 누가 될지 예측할 수 없다. 들었다 놨다 하는 상황에 승자보다 나머지 탈락자들의 아픔이 더 신경 쓰였다. 연민이 발동하자 승자보다 승자의 됨됨이를 지닌 우주 같은 마음 씀씀이에 울컥한다. 그렇듯 작가는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두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 일인자들의 삶만 부각되는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그만큼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순간일지라도 넘치는 자만심을 밀어두고 뒤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끌어안거나 품어주는 힘이요. 중력 같은 힘 말이에요. 늘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차츰차츰 강해졌어요. 우리는 그런 힘이 너무 없는 곳에서 살고 있잖아요.······ 밀치는 힘, 내쫓는 힘, 책임지지 않는 힘 ······ 그런 게 많잖아요.

 

우리는 한때 대단한 것처럼 주목받을 수는 있지만 비범한 듯이 오래 남을 수는 없어요. 때가 되면 평범으로 돌아와야 해요.······ 그러려면 연민을 지녀야 해요. 간발의 차이로 저의 뒤에 서야 했던 사람들에게 ······ 그들은 더 헌신적이어서, 그리고 어쩌면 운이 없어서 뒤에 섰을 수도 있으니까요. -p.424~425

그리고 어쩌면 소설은 우주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그들의 꿈을 애도하고 논란의 중심에 선 그녀도 위로하며 무능한 정부와 무지한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한 것으로 비쳤다. 무능한 정부가 보이는 타이틀에 의존해 강대국에 놀아난 느낌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자네들은 화물은 아니지만······이라며 쉽게 떠벌리는 강대국의 태도에 분노가 일었다.

 

자연의 변화와 모든 생명체의 존재도 늘 신비롭다고 느꼈는데 중력의 대단함과 원자부터 우주까지 존재하는 힘의 균형이 놀라워서 지구에 더 빠져들 것 같다. 읽으려고 사두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지구의 속삭임]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에 구름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적인가. -p.305

 

어찌 되었든 중력이란 소설은 내게 있어 이 우주와 하늘과 별과 달과 태양과 공기와 그리고 중력 같은 관계를 이어온 주변 사람들까지도 소중하게 느끼게 해 준 작품이다. 그 어떤 소설보다도 도덕적 삶의 진정한 가치,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임을, 알게 해준 따뜻한 작품이었다.

 

그나저나 우주산업이고 뭐고 지금은 지구환경을 걱정해야 할 때가 아닐까.

 

아아 아름답구나.

뭐라고 말할 수도 없구나.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구나.-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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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아는 법 -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대한민국까지, 재판으로 보는 세계사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콜라보 3
권재원 지음 / 서유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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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큰 사건들을 들여다보며 그러한 사건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짚어보는 것도 흐름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에도 좋을 것 같고 자꾸 퇴화하는 기억을 살리는데도 한몫해서 좋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대한민국까지 굵직한 재판을 들여다보며 사회질서가 어떻게 지켜져 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판결을 계기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또는 세계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유추해보며 역사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재판이라 하기에 모호한 사건도 있으며 권력자들의 자리다툼으로 그 의의를 상실한 사건도 있다. 무엇보다도 시대가 변하고 시민의식이 커져감에 따라 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법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있고 개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전제조건은 필수다. 하지만 때론 법은 권력자들을 위해 존재하거나 악법도 지켜야만 하는 억울한 순간도 있고 잘못된 판결에 목숨을 잃는 이도 있다. 책에 소개된 여러 재판은 그러한 재판뿐 아니라 법이 법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경우도 소개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재판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억울한 재판이었다. 그 당시의 재판 절차는 주로 배심원단의 판단 결과를 따랐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과정을 보면서 이런 배심원 제도의 허점을 볼 수 있다. 그가 철학자로서의 심지를 내려놓고 자신을 변론했더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를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악법의 결말을 볼 수 있었다.

 

탄핵이라는 큰 시건을 접한 우리에게 고대 아테네의 탄핵제도도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의 도편추방이 그 비슷한 예로 지금보다 더 강력했다. 이는 독재자의 권력남용을 막기에 좋았지만 경쟁자들의 대결구도에 이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들의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였기에 제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권력을 쥐고 흔들 수는 없었다. 무지한 시민보다 정치에 눈을 떼지 않은 시민들 덕에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권력자라도 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러한 예로 브루투스의 재판은 그 과정이 참혹하고 눈물겹다. 그러한 확고함 때문에 반역을 괸 두 아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보내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느껴볼 수 있었다. 후대에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던 올곧은 권력자의 모습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세우는데 이바지했다고 보았다.

 

중국도 약 3000년 전에 왕을 탄핵시킨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3년 동안만 통치를 못하게 해 완전한 탄핵은 아니었으나 왕도 잘못하면 물러날 수 있다는 의의를 남겼다고 한다. 물론 그 뒤 일어난 탄핵은 내치고 갈아치우는 권력싸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이야기도 잘 알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사기를 완성해야 했기에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것도 안타깝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일생 동안 사기 완성에 온 힘을 쏟은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뿐이다.

 

조선시대 재판 중 노비 다물사리의 민사재판을 보며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물사리가 거짓을 꾸민 정황을 보면서 그 당시 양인과 노비의 차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노비의 재산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근대의 전환점이 된 여러 사건 중 소개된 갈릴레오 재판을 제대로 읽어볼 수 있어 좋았다. 과학과 종교의 싸움이었던 만큼 그 의의가 크다. 비록 갈릴레오가 꼬리를 내리긴 하였지만 교회의 위상도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비운의 여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읽었을 땐 그녀의 생이 참 안타까워 그녀의 처형에 역사적 의의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왕도 잘못을 하면 시민의 힘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사건이라니...

 

어떠한 시대든 잘못된 판결 결과에 싸우는 이들이 있었는데 드레퓌스 사건과 사코와 반제티의 재판 경우 에밀 졸라와 같은 지식인이나 정의를 부르짖는 대중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법이 이만큼 정의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격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억울한 사건들은 비일비재했다. 간첩조작 사건이나 박정희 정권의 사법 살인들을 보며 조선시대 고문과 자백이라는 몹쓸 과정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음에 분통이 터졌다. 이러한 억울한 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하며 더 이상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국민을 대변한다는 자들이 역사를 부정하고 헛소리를 남발하는 꼴을 보면 너무나 한심하다. 과연 저들에게서 논리라는 걸 기대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런 자들을 옹호하는 이들에게라도 올바른 역사교육이 절실히 필요하겠다. 제발 현대사 부분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았으면.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살펴보면서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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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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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처음 오는 곳인데 온 것 같고, 지금이 꼭 이전에 존재했던 순간 같고, 분명 처음 본 사람임에도 낯익은 것 같은 경험. 누구에게나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 마치 꿈에서 본 듯이 아니면 전생의 어디쯤인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모호한 순간 말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나도 사신 아르바이트를 한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이 소설은 최근 일본 문학에서 라이트노벨이라고 칭하며 젊은 층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분야의 작품 중 하나다. 소설과 애니 중간의 경계쯤 되는 느낌이랄까. 주인공들은 당연히 감성 풍부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십 대들이다. 그래서 조금 유치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독특한 설정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환상의 세계와 현실 공간을 삶과 죽음이라는 코드로 매끄럽게 연결 지으며 그럴싸하게 납득시킨다. 그 누구도 모르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이승의 시간에 충실하자라는 취지의 교훈을 들고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초반의 유치하단 생각들이 흐름에 익숙해지자 이런 시간 영역 대가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갔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싶었기 때문에.

 

언제 떠날지 모를 삶이지만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승에 미련이 남는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허나 소설 속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영혼들이 한을 풀고 떠날 수 있는 시간대를 부여한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줄 사신들과 함께 할 수 있다. 사자들에게는 미련을 짐작할 수 있는 초능력이 주어지긴 하지만 사신이 없으면 저승으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런 미련도 욕심인 걸까. 그런 시간조차도 솔직하지 못하기에 쉬이 떠나지 못한다.

 

 

 

사쿠라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지금이 힘든 친구다. 그런 그에게 동급생 하나모리는 사신 역할을 제안한다. 일명 사신 알바. 시급은 더럽게 박하고 사신알바가 끝나면 기억도 사라져버리지만 6개월의 할당 시간을 채우면 어떤 소원이든 하나를 들어준다는 말에 일단 시작하고 본다. 램프의 지니처럼 소원을 들어준다는데 그깟 짠 내 나는 시급 정도야 어떠하리.

하지만 그의 첫 알바 대상은 사쿠라의 첫사랑이었다. 아마 그녀못지않게 사쿠라에게도 그녀와 풀어낼 이야기가 남아 있었던것이었기에 이루어진 만남이 아니었을까.

 

그렇듯 시작부터 혼란스런 만남이었고 그 뒤로 만나는 사자들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그나마 산소 같은 하나모리가 함께 해주었기에 하루 시급을 채워 나갈 수 있었지만 아동학대를 당하고 죽은 유라는 사자를 만나면서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비록 사쿠라가 300엔의 시급에 불만을 품고 시작한 알바지만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의 가치를 배워나간다. 허영과 오만으로 포장한 삶과 거짓으로 자신을 가두어 버린 삶과 학대와 고통 속에서도 목말라있는 사랑에 대한 아이러니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이면을 보고 느끼게 된 것이다. 게다가 초반에 사쿠라는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라는 이유로 시간만 때우려 한다. 그러나 점점 오히려 사라질 기억이기 때문에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도 깨달아간다.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라고 해서 대충 살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더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살아있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아가게 된다.

 

인간이기에 뒤늦은 후회와 깨달음이라는 인생 공식이 일상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다. 물론 타인의 삶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이라면 그들의 불행한 환경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긴하지만 말이다. 라이트노블이라고 방심하다 무거운 소재에 기분이 착잡하기도 했다. 서로가 인간의 도리만 하고 살아도 미련이 남은 채 떠나는 이들이 줄어들 텐데.

 

사쿠라의 6개월 알바인생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사쿠라는 나 자신을 사랑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사쿠라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대략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바란다.

그나저나 이런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면 아마도 일자리가 넘쳐나지 않을까. 세상에 미련이 남은 영혼들이 넘쳐날 테니까.~^^

 

"들어줘, 사쿠라. 내가 태어나고 죽은 이야기를." -p.285

이 문장이 왜 이리 가슴에 콕 박히는지...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건 그만큼 내 인생의 무게를 반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그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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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고백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런 고백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에겐 절실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없으면 도저히 못 살 것 같다는.

난 자존심이 센 여자였고 다치고 싶지도 않았다. 적당히 방어막을 치고 선도 빨리 긋고 정리도 빨리했다.

다른 이는 어떨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내겐 아픈 사랑의 기억이 없다.

 

사랑에 조금 건조해서일까. 어찌 되었든 난 처음에 이 글을 읽고는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한 여자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폴의 이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just의 느낌이었다.

선생과 학생 사이. 자주 만나 그냥 정든 사이.

그래서 무얼 써야 할는지도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읽다 보니 그녀가 덤덤히 말을 하고 있지만 얼마나 아팠을지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넌 미국을 선택하지 않았지. 나를 선택하지도 않았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생각은 자꾸만 한쪽으로 흘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들켰다가는 두 번 다시 폴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p.74

 

그녀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절실한 사연을 나는 진부하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그렇게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폴의 연민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인들의 정서인 '정'이 든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모성애까지 발동한 것인지도.

 

폴의 아버지도 폴도 유리꼬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연민.

그들 사이에 결코 끼어들 수 없음을 알았을 그녀.

누나라는 호칭으로 남아서 여전히 폴을 보고자 했던 그녀의 짝사랑에 가슴이 찌릿했다.

순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라는 단편이 떠올라 그런 생각까지 미친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보다

성공해서 돌아오고팠을 한국 땅 위에서

"그만 모든 게 참 달라졌구나"라는 말을 듣고 있자니 울컥했고

"미쓰 유리꼬. 유 러브 마이 썬?" 이란 물음에 또 울컥했다.

아마도 폴에 대한 미련을 폴이 들려준 아버지의 일화로 털어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처럼.

 

이젠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그러한 감정들이 빛을 잃어가서일까. 나는 여전히 추측만 할 뿐이다.

완벽한 발음만큼 완벽하게 아시아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폴은 그녀를 의지했을 뿐이었고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폴의 어눌한 한국식 이름뿐이다.

 

그나저나 나도 요즘 빠지긴 했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BTS에 빠져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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