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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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로 옮긴 직장내에서 같이 하는 북클럽 도서라 몇 년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몇 년 전에도 북클럽 지정 도서이긴 했으나 엄청난 분량에 눌린 탓인지 나 혼자 읽었기에 그 당시 토론은 불가했다. 이번을 계기로 두 번 읽게 되는 호사를 누림에 감사한다. 사실 읽어야 할 새 책들의 중압감 때문에 두 번씩 읽기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기에 나중에 또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13000년에 걸친 대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인문학 서적에 ‘우연, 행운, 혜택’이란 말이 자주 반복된다면 믿겠는가?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인간의 역사도 과학적 연구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낙관하고 있으며 과학으로서의 인류학이 현대세계 형성 원인도 밝히고 미래 형성 원인도 조명해 볼 수 있다고 했다.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고 하면 ‘우연이나 행운’은 어울리지 않을 법 들린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세계의 불평등의 시작은 지리적 입지라는 역사적 우연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윤리적 공백과 간극을 메우기 위함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지리와 역사를 배우긴 했으나 누구의 관점과 시점에서 규명하고 바라보았느냐도 중요하다. 차이에 대한 궁극적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환경이 아닌 생물학적 원인이라 단정 지어왔다. 문명/비문명, 우수/열등의 이분법적 단정은 윤리적, 도덕적 공백을 만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게 했기에, 잘못된 인과관계의 사슬을 끊고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우리에게 편견을 벗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백인과 흑인을 논할 때 기본값으로 우수와 열등이 떠오름은, 마치 도시와 시골을 논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시골의 삶이 반드시 부족함이 많은 것이 아니듯이 흑인이 더 열등하고 지능이 낮지 않지만 우리는 어쩌면 오랫동안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어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명인과 원주민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무슨 근거로 문명인의 삶의 질이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오랫동안 자리잡힌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유라시아 대륙이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보다 먼저 발달할 수 있었던 궁극적 원인은 지능적으로 더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생태학적 우연이었으며 결국은 지리와 환경이 발달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는 야생 동식물이 풍부했기에 식물의 작물화와 동물의 가축화가 먼저 이루어 지면서 식량생산도입이 가능했고 이는 인구밀도를 높이고 정주형 생활, 기술발달, 중앙집권화를 가능하게 했다. 결국 식량생산과 기술의 역사는 자가촉매작용을 일으키며 총기, 해양기술, 문자, 군사기술 등의 발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로 인한 병원균이 대량 살상력을 일으키며 많은 원주민들을 죽이게 되었고 유럽인들의 정복과 탐험을 가능하게 했다.

반대로 지협이나 사막으로 인해 격리나 고립 상태에 있거나 생태적 지리적 장애물이 많았던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수렵 채집민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병원균에 속수무책으로 전염되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콜롬버스는 신대륙 발견의 영웅으로 역사책에서 찬양되고 있지만, 한 번도 원주민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못했다. 결국 그로 인해 구유럽인들의 탐험과 정복이 가속화 되고 많은 원주민들이 총기와 병원균으로인해 죽게 되었으니 원주민 입장에서 그는 테러범이 된다.

문자의 발견도 비옥한 유라시아 대륙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니 역사도 백인의 입장에서 조명되어 온 것이다. 결국 백인들의 정복욕에 의해 대부분의 원주민은 영토를 빼앗기고 말라리아나 척박한 토양으로 인해 백인이 접근하기 힘든 극한 지역에 살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도 원주민의 삶은 미개하고 열등하기에 문명의 손길이 닿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수와 열등, 문명과 비문명도 누가 규정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인종차별문제로 시끄럽다. 흑인과 백인의 차별 논란은 뿌리 깊은 고질병 같은 문제로 수많은 문학책의 소재로 자리했고, 현재도 늘 잠재적 위협성을 안고 있는 문제이다. 작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소재로 한 책을 몇 권 읽으며 슬펐던 적이 있었다. 이 책에도 유럽인들이 희망봉 일대의 코이산족을 평정하기까지 9차례 전쟁으로 175년의 세월이 걸린 것으로 나온다. 지리적 생물학적 우연으로 유산자가 된 지배계층의 정복 욕심, 문명화 또는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전쟁, 학살, 파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리적 결정론과 환경 결정론이 절대적이고 문화 차이나 개인의 특성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문화나 거대 영웅이론이 인류의 발달사에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그런 요소로 설명되지 못하는 수수께끼 같은 역사가 너무 많았고 결국 그 궁극적 원인으로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그간 놓치고 있었다.

앉은 자리를 바꾸어야 풍경이 달라진다고 했다. 관점과 시선을 바꾸지 않으면 편견은 벗을 수 없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의 원인이 환경인지도 모른 채 유전적 요인으로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내 안의 편견으로 쉽게 평가와 판단을 내려왔다. 인종차별 아니어도 내 안의 편견은 수 없이 많음을 인정해야 한다. 날마다 점검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윤리적 공백을 크게 만들어 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걸 생각하며 정신적으로 깨어 있는 연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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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ntethered Soul: The Journey Beyond Yourself (Paperback) - 『상처받지 않는 영혼』 원서
Singer, michael A. / New Harbinger Pubns Inc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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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번역은 ‘상처받지 않은 영혼’인듯하나 원서를 직역하면 ‘구속받지 않는 영혼’, ‘묶여 있지 않는 영혼’, ‘자유로운 영혼’ 정도이다. 물론 책을 끝내고 나니 어떻게 번역되어도 전체 책 내용과는 의미는 통한다. 그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인가? 내가 만든 생각과 감정의 벽으로 만든 감옥에서 벗어나 내적인 자유로움을 얻음으로써 무조건적 행복을 찾으라는 내용이다. 스토아 학파의 이론도 떠오르고 ‘명상록(Meditations)’ 내용도 생각났다.

내 안에 살고 있는 내적 룸메이트(inner roommate)가 보내는 정신적 목소리 즉 내 안의 목소리는 쉬지를 않는다.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내가 누구인지 알아감과 내 안에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가 있음을 인지하고 항상 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문을 열어 두었을 때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고통과 상처일 수 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let go/letting go/let go of이다. 자유로움의 대가로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있지 말고 놓아 주라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어도 절대적 만족은 없을 것이고 나를 힘들고 불편하게 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은 없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이 내 성장의 자극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내 생각이 키운 구속으로부터 자아를 해방시킴로써 영혼으로부터 자유를 훔쳐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라 한다. 또한 내적 고통과 혼란을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익숙해지고 공존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비로소 영적 성장을 갖게 된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책 제목 ‘구속받지 않은 상태’를 12장에서 플라톤이 사용했던 ‘동굴의 알레고리(Allegory of the Cave)’와 유사한 내용으로 설명을 한다. 자연경관이 너무나 멋진 공터에 아름다운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 탁 트인 벌판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했으나 집 자체의 매력에 홀딱 빠져서 완벽한 요새처럼 짓고 그 안에서 독서와 쓰기에 빠져 산다. 그 누구와의 접촉도 없이 완전한 고립 상태로 살다가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켜고 살게 된다. 인공조명이 언제 떨어져서 암흑의 세계에 빠질지 몰라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다. 사실 한 발만 내딛고 나가면 너무나 찬란한 빛이 쏟아지지만 내가 만든 생각과 감정의 벽 때문에 벽을 헐지 못해 외부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 벽은 물론 과거의 경험이 만든 상처와 아픔으로 점철된 것이기에 더 이상의 상처를 막기위해 방어기제로 쌓은 것이다. 그러나 그 안식처는 나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는 것이다.

빗장을 풀고 벽을 헐고 나와 무조건적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그 어떤 조건도 행복을 제한하게 된다. If, and, but등의 조건은 상황이나 사람이 바뀌면 또 달라지고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집착(cling)없이 저항(resistance)없이 수용하고 아픔과 상처를 보내기(let go)를 해야하는 것은 죽음(death) 때문이라 한다. 죽음이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우주의 역설이다. 서양 문학에서 자주 토론되고 다루어지는 화제이다. 죽음을 잘 인지해야 하며 죽음과 건강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한다.

연령, 시간, 그리고 장소에 상관없이 언제나 죽음이 우리를 도사리고 있다. 죽음의 불가피성과 예측불허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게 되고 부질 없는 저항과 집착을 내려놓게 될지도. 죽음은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하고 의미있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유한한 삶은 죽음이 소유하고 있으며, 죽음이 세 놓은 땅에서 시간을 빌려 살아가는 세입자인 인간이 무조건적 행복을 선택하지 아니할 이유가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작가는 요가와 명상을 통해 이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의식(consciousness)이란 단어도 수 없이 반복되는데, 자아의식의 탐구과정을 통해 변화된 내 모습을 갖게 된 나는 양 극단의 추가 아닌 균형을 맞추는 삶과 판단과 평가를 보류하고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신의 경지에 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유발 하라리도 하루에 2시간씩 명상을 한다고 했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느낌은 우리가 그 만큼 불필요한 소음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외부가 너무 시끄러워 내 안의 룸메이트가 아픔을 토로해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어쩌면 들려 오지만 애써 부인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인정하기 싫어서 내 안에서 나가기 싫어서 말이다.

이 책은 쉬운 영어로 쓰여졌고 같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된다. Be open no matter what도 많았다. 무조건 열어야 한다고 했다. 닫지 않아야 구속하지 않아야 내적인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반성의 시간이 되었다. 새로운 바쁨이 지난 몇 개월의 나의 상처를 치료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책 읽는 내내 그 상처가 나를 따라 왔으니 난 완전한 자유함을 얻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나의 생존 본능은 구속과 미움을 벗게 했다 생각했는데 더 시간이 필요하리라.

지금은 그 때 상황만큼 우울하지 않은 상태로 이런 책을 접하니 객관적인 내가 보이는데, 막상 내 마음이 상처로 점철된 당시에도 이런 책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시험해 보고 싶다. 사실 책이 치유책이라는거 알지만 슬픈 당시에는 책이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며 슬픔의 옷을 벗을 수 있는 경지가 올지 도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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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as Therapy (Paperback)
Alain Botton / Phaidon Press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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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이 작가의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철학의 위안)”을 읽고 얼마나 감동이 컸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읽은 4권의 그의 작품은 늘 날 기쁘게 했다. 제목 “Art as a Therapy”가 전체 내용을 대변한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책 속에 다양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눈의 호사도 또 다른 선물이었다. 책 장을 넘겼을 때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그림이 보물처럼 담겨 있었다.

왜 요즘 현대인은 Therapy란 말에 집착하는가? Healing이란 말도 연령 상관없이 많이 사용한다. 그 만큼 상처가 많다는 반증일까? 아님 치료나 힐링에 자꾸 안기려는 나약함은 아닐까? 정말 내 마음이 치유가 필요한만큼 곪아 있는지 아니면 삶의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고단함을 피하고자하는 나약함인지 가끔은 혼동스럽다. 그렇게 나도 그 단어에 익숙해져서 이 책에 끌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겐 작가 Botton의 매력적인 언어를 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정신적 피로감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는 psychological frailty(심리적 나약함), inner frailty(내적 나약함), appalling fragility(끔찍한 연약함), native defects(선천적 결함) 등의 유사한 표현들이다. 이런 인간의 부족한 면을 보상하는 기능을 미술작품이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추함과 연약함을 증류시키고 농축시켜서 고요하나 지쳐 보이지 않고 평온하나 무기력하지 않은 세련된 작품을 감상하게 한다.

슬픔까지도 위엄있고 품격있게 묘사된 작품을(dignify our sorrows)감상하며 그 속에 보이는 나의 슬픔을 읽게 되고 결국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런면에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예술은 사랑을 지속시키는 기능도 한다. 주변의 좋은 것들은 진부함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금방 익숙해지기에 내재화는 힘들게 된다. 그렇다면 수시로 인식을 새롭게 하며 이를 습관처럼 자리잡게 해야 한다. 즉 사랑에 지루해지기 쉬운 보편적 경향이 있는 우리는 그림을 감상하며 익숙한 것과 평범한 것들에 새롭게 눈을 뜨고 재평가하여 열정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통해 작가는 과연 무엇이 하나의 직업을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더 유의미한 그 무엇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기쁨, 이해, 위안을 이끌어 내며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첫째 조건이고, 둘째는 자신의 깊은 재능과 흥미에 잘 맞는 일로서 내재되어 있는 귀중한 능력을 표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유의미한 일을 하는 예술가들이 순간 스쳤던 직관과 통찰력을 하나의 창의성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내었던 원동력은 집념과 인내심이리라. 요즘 회의감에 싸여 출근하는 나는 어떻게 노력해야 유의미한 나의 직업이 될지 생각해 본다.

예술은 결국,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능력을 고양시키고,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도 계몽시키고, 자연과의 대처 능력도 도와주며, 정치에 있어서 야망과 이상도 형성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술의 진정한 목적과 기능은 예술이 덜 필요한 세상을 만드는 것, 예술작품이 약간만 필요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 했다. 삶이 곧 아름다운 예술이 되고, 삶 속에서 슬픔과 연약함의 언식처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미술작품에서 치유를 덜 찾게 되리라.

나의 거실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밤의 까페 테라스’를 보며 그 동안 나의 외로움과 만성적 피로감이 얼마큼 위안을 얻었는지 생각해 본다. 사실 칸딘스키 그림에 빠진적이 있었는데 나의 거실을 지키는건 고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배경으로 늘 거기 있었으나 나의 심리적 나약함을 읽어주며 감싸준 것에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 같다.

내겐 책 자체가 해독제인데 책과 미술이라는 치료제를 양손에 들고 2주를 보냈으니 당연 감사해야 했지만, 문제는 단숨에 책을 읽었어야 하는데 결정적으로 주말에 직장에 책을 두고 오면서 흐름이 끊긴 것이 아쉽다. 책의 흐름이 끊기면서 진한 감동이 희석되었다.

나의 직업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일 중의 하나가 쉬지 않는 독서인걸 안다. 앎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예술가들이 보여 준 집념과 인내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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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ight Diary (Paperback, Digest) - 『밤의 일기』원서, 2019 Newbery
Veera Hiranandani / Puffin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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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던 책을 직장에 두고 온 것을 집에 도착해서야 알고서 돌아가서 가져오고 싶었다. 그러나 금요일 중요한 약속이 있었고 비도 내리고 있어 시간이 허락치 않음에 안타까움을 금할길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책에 중독되어 있었다. 금요일 늦은 밤 귀가였지만 소중한 만남으로 다시 생활의 활력을 찾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 하루 만에 끝낼 생각으로 가벼운 책을 선택했는데 역시나 책이 주는 선물은 늘 다양하고 신선하며 매력적이다.

2019년 Newbery Honor Book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12세 인도 소녀(Nisha)가 돌아가신 엄마에게 밤마다 쓴 일기를 묶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과 상처를 보듬기에 글보다, 비밀이 보장되는 일기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이 책은 어린 소녀의 엄마 잃은 상처보다 더 큰 아픔이 숨어 있다.

200년 동안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인도가 마침내 독립을 하게 된다. 그렇게 기다리던 독립인데 결국 국민들은 새로운 종교전쟁으로 인해 신인도와 파키스탄로 나누어 지게 되면서 겪었던 아픔이 역사적 배경으로 되어 있다. 허구이지만 작가의 부모님이 실제로 Mirpur 지방에서 Jodhpur 지역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많은 것을 잃고 낯선 지역에 정착했던 내용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순수한 Nisha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종교전쟁에 대한 잔혹사를 아프게 그리고 있다. Hindus, Muslims, Sikhs 등의 종교는 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는가?

그 당시 종교상의 이유로 천사백만명이 국경을 넘고 그 와중에 백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추정된다고 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평화로운 공존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이 쓰여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도 세계 각국에서 여전히 종교 분쟁은 일어나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도 글로벌 이슈로서 우리의 커다란 도전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COVID-19을 물리치는 것 만큼이나 크나큰 난제로 남을지도 모른다. 생각과 의식의 전환을 갖는다는 것은 이리도 어려운가?

인도가 둘로 나누어 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합을 위해 단식을 하며 탄식했던 Gandhi의 노력도 책 속에 많이 나온다. Nisha를 죽이려 했던 이슬람 청년을 힌두교도인 Nisha의 아빠는 용서하며 보낸다. 누군가 (종교의 고리) 끊지 않으면 결국 끊나지 않을거라고 하면서. 빗물을 기쁨으로 먹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결국 새로운 땅에서 Nisha는 힌두교인 할머니의 기도 소리와 이슬람교도인 요리사 Kiza의 기도소리가 공존하는 집에서 평화를 느끼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실화를 읽으면, 나를 괴롭히는 정신적 고민들이 사치로 느껴진다.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상의 문제들이 아무리 크다한들 생사를 넘나드는 의식주 문제 만큼 크지 않으리라.
I couldn’t think of anything more beautiful than buckets of cool, clean water to drink. 마실 물 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주인공이 말하고 있다. 그 귀한 물을 훔치다가 칼에 찔린 사람이 있고, 그런 상처를 치료해준 아빠에게도 물 한방을 주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이 있다. 보상으로 몇 방울 줄만도 한데 당장 생사가 달린 물이기에 최소한의 인사치레도 없이 떠나간다. 이해가 전혀 안되지 않는다.

물질적 풍요가 낳은 감사함을 잊게 하는 정신적 빈곤함으로 이 책을 읽으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만 있어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상황, 마실 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상황을 가끔씩 책으로라도 만나면 현재의 불평이 줄어들지 않을까? 또한 종교의 다른 색깔 아니어도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다양성이 주변에 너무 많다. 나 역시 나와 다름에 짜증을 내며 색안경을 쓰고 보는건 아닌지 점검을 해야 한다. 아니 점검을 넘어 다양성을 인정함이 꼭 해결해야할 과제임을 상기하게 된다.

Variety is a spice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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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ian (Paperback) - 『데미안』영문판
헤르만 헤세 지음 / HarperPerennial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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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로 하여금 데미안을 읽게 했는지 정확히 모르나, 출판사의 마케팅이나 온라인 서점의 과도한 홍보 등에 빚이 있는 듯하다. 가끔은 귀가 얇은 것도 뜻하지 않은 행운을 던져 주는구나. 똑같은 책이라도 언제 어떤 심정으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을 시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 데미안을 내가 예전에 읽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새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어린 학창 시절에 한글 버전으로 읽었을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나의 고통스런 부분은, 읽는 내내 너무나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에 감동하고 또 감동했는데 리뷰를 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얇은 분량이나 결코 쉽지 않은 책이고, 누가 언제 읽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고 시대적 배경과 작가의 철학을 배제하고 읽으면 쉬울 수도 있는 책이다. 내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책이나 쉽게 정리되지 않는 책이라 책 앞 뒤 서평까지 모두 읽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 중인 1916년에 시작해서 대전이 끝난 1919년에 출간된 책이고 반전운동을 했던 헤세의 작품이지만 과도한 상징적 표현으로 인해 예민한 시대적 문제 즉, 반전에 관한 내용이 묻혔다는 비난도 있다는걸 이번에 알았다. 반전활동 캠페인을 벌인 평화주의자 Romain Rolland 작가와의 관계가 Demian에 끼친 영향, 책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꿈이야기는 헤세가 Carl Jung의 제자와 시작했던 정신분석 연구의 산실이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위 배경을 배제해도 한 가지 선명한 그림은 보인다. 헤세는 서문에서, 자신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추구하는 사람(seeker)이라고 시작한다. 무엇을 추구하는가?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그 누구도 완전히 철저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서문을 지나 첫 장을 열기 전에도 왜 그리 진실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짜 나로 사는 것이 그리 힘든가로 시작한다. 책 전반에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 유일한 삶의 소명이라고 몇 번씩 반복하고 있다.

왜 그렇게 우리 자신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까? Sinclair가 대학생이 되어 Demian과 나눴던 군중심리/ 무리 본능(herd instinct) 때문이 아닐까? 남들 처럼 살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러나 군중 속에 있다는 것은 기존의 관습을 인정해야 하기에 자유와 사랑을 찾아보기 힘들며 진정한 교감이 어렵다. 자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만 두려워해야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불안해 한다. 더불어 사는 삶과 순응하며 같이 가는 삶을 얼마나 많이 강조하는가?

너무나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했던 Sinclair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빛과 어둠의 두 영역사이에서 고뇌했다.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를 동경하다가 의도치 않게 Franz Kromer의 폭력에 눌려 힘겨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 Sinclair에게 구세주로 Demian이 나타났고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다.

따뜻하고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랐으나 예민하고 조숙한 청년 Sinclair에게는 외로움과 내적 갈등이 너무나 익숙했고 혼자있는 시간을 더 편안하게 느꼈다. 그 스스로 자꾸만 안으로 들어가 빗장을 걸고자 자처했으나,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삶이 아니던가? 어쩌면 거의 선천적 심약한 우울증을 앓던 Sinclair라 할지라도 그가 걸어가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를 아름다운 청년으로 살아가게 하는 양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당연 Demian, Alfons Beck(반 친구), Pictorius(오르간 연주가), Knauer(그를 따랐던 반 친구), Frau Eva(데니안의 엄마) 등. 물론 철학자 니체, 그림, 음악도 그의 자양분이었다.

Demian의 각 챕터 제목도 반드시 사람 이름은 아니지만 요지는 누가 Sinclair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는 정말 중요하며 가치관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 사색적이고 우울하던 지적인 청년 Sinclair가 Demian을 만나 자신 본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성장 스토리 그 이상의 깊이와 무게가 있는데 그걸 여기에 다 담아내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그저 Demian을 만난 Sinclair가 부러울 뿐이다. 나의 데미안, 나만의 데미안을 어른은 가질 수 없는가? 누구의 데미안이 되어줄 수도 없는데 청소년이 아닌 어른들은 어디서 데미안을 찾아야 하는가? 이런 의존적 사고로는 진실한 나로 원래의 내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늘 가면을 쓰고, 군중에 묻혀 그저 살 수밖에 없다고 책 속의 데미안이 걸어 나와 비난할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아니 나는 타인의 해석과 판단에 길들어져 있다. 말이 아닌 내 머리 속 생각조차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염두해 두는 나에게 놀란다.

미래 언젠가 다시 Demian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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