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Mountain : The Quest for a Moral Life (Paperback) - 『두 번째 산』 원서
데이비드 브룩스 / Penguin Books Ltd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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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이맘 때에 이 작가의 The Social Animal을 읽고 크게 감동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책에서 뽑은 인용구가 책꽂이에 붙여있다. 어떤 삶을 살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큰 울림을 주었다. 온라인 서점을 둘러보다 높은 평점으로 이 책을 만났는데 같은 작가인지 모르고 샀다. 언어의 연금술사란 말을 이 작가를 두고 하는가? 세련되고 정제된 영어가 백미이고, 그 안에 담긴 큰 메세지가 찬란한 보석이 아닐 수 없다.

앞 부분 읽을 때에는 이 책 안에 있는 표현’ I was in the book, not in myself. ‘처럼 내가 책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작년 어디선가 COVID-19으로 인해 미국과 유럽이 무조건 옳다는 사대주의 사상이 깨졌다고 읽은 적이 있다. 영어 공부의 과열현상이 불었던 적이 있고 지금도 영어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나도 한국의 보수적 문화 및 공동체 문화로 인해 나의 사적인 부분이 침해받음에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와 개인의 자유가 존중됨이 무척 부러웠던 적이 있다.

그런데, 서양의 지식인에 의하여 초개인주의(hyper-individualism)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읽으며 다시 세상의 중심이 동양으로 움직이는가하는 착각을 했다. 이성(reason), 사생활 존중, 자아실현, 자아, 자기애 등을 부르짖으며 세상의 중심에 ‘나’가 있었다. 지난 번 읽었던 The tyranny of Meritocracy(업적주의의 횡포)도 왜 현재 미국사회에서 업적주의가 비난받는지를 설명했었다.

우리는 그렇게 나를 사랑해야 한다, 자아실현이 중요하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며 첫번째 높은 산(The First Mountain)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실패와 좌절이 불가피한 인생길에서 한번씩은 계곡(valley)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런 실패를 failing upward, bright sadness, fortunate fall 등의 아름다운 표현을 사용한다. 즉, 더 높이 오르기 위한 실패이자 밝은 슬픔이며, 행운의 실패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계곡에서 일어나 우리는 두 번째 산(The Second Mountain)에 올라 유의미한 목적있는 삶을 살 수 있기때문이다.

자기애와 개인주의만을 위해 달려온 우리는 단절된 삶이 부른 외로움, 우울증, 높은 자살률, 공허감 등의 셀 수 없는 병폐와 폐단을 부산물로 얻었다. 도덕적 생태학을 추구하는 삶을 위한 4가지 헌신(commitment)을 하며, 서로 공생하는 관계주의의 삶을 살라고 촉구한다. 매력적 다양성과 활력이 존재하는 서로가 연결되고 얽혀있는 정글같은 도덕적 생태계!!

두 번째 산에서 헌신해야 하는 4가지는 vocation/calling(소명의식/소명으로 받은 분야), family(가족), philosophy/faith(철학이나 종교), community(지역사회)이다. 나도 작년에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 현재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나의 길이 맞는지 고민했기에 첫번째 소명의식에 빠져 읽었고, 결국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의미할 수 있다는 생각과 어깨 위의 짐같은 오랜 숙원 사업으로 지역사회 NGO단체에 후원도 시작했다. 봉사 참여는 COVID-19로 인해 얼마큼 실천으로 옮길지 모르나 작년 상황에서도 지역 봉사를 한 사진을 둘러 보며 반성을 했다.

자아(self)를 위한 산에서 봉사/나눔(service)을 위한 두 번째 산으로 옮겨가며, 내가 아닌 타인을 전인격적 시선, 관심, 사랑으로 바라보며, 융합(fusion), 두려움을 넘어선 친밀감(intimacy beyond fear), 상호의존(interdependence), 관계주의(relationalism)의 삶을 살기를 권고한다. 유의미한 목적있는 삶을 얼마나 갈구했는가? 나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살아왔는데도 공백과 허무감은 불가피하다. 결국 나를 찾기위해 나를 잃고(I lose myself to find myself), 나 자신(ego)의 기본값을 벗고 나아가는, 우리(we)라는 공생의 삶 속에 정서적으로 풍요하고 영적으로 깊은 삶이 있다고 했다.

돌봄(Care)마저 아웃소싱을 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말이 허를 찌른다. 가족과 지역사회의 유대와 연대가 무너져서 이제는 정신건강은 치료사가, 육체건강은 병원이, 교육은 학교가 책임지고 있다. 일상의 사소한 결정에는 오랜 시간 고민을 하면서도 정작 유의미하고 목적있는 삶을 위한 숙고를 게을리했다는데 삶의 역설이 있다.

이 책에서 4가지 답을 제시하며 실제로 두 번째 산에서 나누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무수히 많은 예시를 제시한다. 물론 작가도 WEAVE라는 단체를 만들어 봉사하고 있다. 15명의 소외된 아이들을 데려다 저녁을 제공하는 한 여성에게 어떻게 이런 대단한 일을 하느냐 묻자 ‘How is it you don’t?(어떻게 안 할 수 있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아프리카 관련 소설 읽을 때에도 이런 답변이 있었다.

어떻게 안 할 수 있는가? 나는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삶만을 위해 달려와서 이리 큰 외로움과 공허감에 시달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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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Reasons Why (Paperback) - 넷플릭스 미드 '루머의 루머의 루머' 원작 소설
제이 아셰르 / Razorbill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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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아픈 내용이었으나 너무나 읽고 싶어 늦게까지 읽다가 직장에 지각까지 했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청소년 소설은 읽기도 쉽고 흡입력도 강한데 감동도 있다. 어른 소설이나 고전에서는 쓰이지 않는 신세대 영어 표현을 배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나의 중고 시절을 되짚어 보게 하는 묘미도 있다. 세상은 온통 배움터인것 같다.

What you do affects others(당신이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즉, 루머의 무서운 파급 효과(repercussions/ after-effect)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의 독특한 전개도 이 책의 묘미이다. 자살한 여고생 Hanna Baker의 목서리가 이탤릭체로 되어있다. 그녀에게 너무나 완벽했던 그러나 가까워지지 못했던 남학생 Clay Jensen이 1인칭 화자로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Clay와 Hanna의 목소리가 번갈아 나타나고 정자체와 이탤릭체로 목소리를 구별하게 한다.

사실이 아닌 소문으로 인해 왕따로 살아온 Hanna가 자살하기 전 녹음한 7개의 테이프 안에 13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이 테이프가 Clay에게 익명으로 전달되고, 이 테이프를 다 들으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친구들이 쓴 메모지까지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했다. 누군가 그녀를 아껴주긴 했으나 자살을 막아줄만큼은 아니었다.(A lot of you cared, just not enough.)

그녀가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며 자살을 준비한다는 사인은 도처에 있었다.(The signs were all there.) 긴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과 같은 갑작스런 외모 변화등 외적 신호가 많았으나 관심이 충분치 못해, 외로움과 아픔을 읽어낼 만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외로운 소녀가 외로움을 달래는 지적 수단은 시를 써서 암기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연결(connection)을 찾지 못한 Hanna는, 그녀를 사랑하는 Clay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Clay는 그녀에 대한 무성한 소문때문에 그녀에게 다가서길 주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테이프를 녹음하여 13명의 친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은 그녀와 같이 근거없는 소문의 희생양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래는 것이었을까?

어른도 마음 속에 외로운 섬 하나씩 안고 있어 끊임없이 밖으로 신호를 보낸다. 마음을 읽어달라 애원하며 서로와 연결되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밖으로 신호를 보내면서도, 신호의 유의미한 답은 얻지도 못한 채, 하루종일 비대면 인터넷과 연결이 되어 있다. 연결은 연결인데 따뜻함이 없는 비인간적 24시간 연결이다. 그래서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을 갈구하고, 다시 누군가와 연결이 되고 나면 진정한 의미의 만남이 되지 못한 채, 거짓 소문의 제물이 되거나 무의미한 소음에 피로감을 느낀 채, 다시 인터넷 연결에 의존한다.

전자기기이든 따뜻한 사람이든 그 무엇과의 연결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며 죽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는 우리은 왜 그리 서로의 손을 잡아주기가 이리도 힘든가? 너무 늦은 때가 있고, ~만큼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 충분한 관심을 누군가에 주어야 할 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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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풍경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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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작가의 글을 다시 만났다. 일과 코로나 블루를 핑계로 올해 독서조차 슬럼프를 겪고 있어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통해 힘을 얻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의지하고 싶을 때 만나고 싶은 작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일요일 하루를 다 바쳐 순식간에 읽었다. 역시나 글 속에 작가가 지향하는 삶이 있고, 독자에게 원하는 숙제 같은 것이 있다.

70년, 71년대에 문예지에 당선되었던 단편을 모은 책이었다. 늘 작가의 10권 정도 되는 장편에 길들여진 나라서, 단편에 약간 실망했으나 일단 책을 펴니 여느 때 처럼 순식간에 지루함 없이 읽었다. 오랜만에 만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제목에서 암시하는 상실의 아픔, 슬픈 우리의 역사 등을 읽으며 작가가 왜 글을 끊임없이 쓰는지 알 것 같았다. 목적있는 작가의 삶이 전해진다고 할까?

10개의 단편 모두 아픔이 들어 있다. 반공, 공산주의, 빨갱이, 연좌제 등등으로 아픔을 겪었던 서민들의 삶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반공 교육이란 이름으로 세뇌처럼 주입된 교육의 위험성, 무고한 시민들이 몇 대에 걸쳐 겪어야 했던 아픔을 난 책으로 읽는데 실제로 겪었던 삶은 어떠할지 상상이 안되었다.

분단의 아픔으로 주한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던 카투사로 자원했던 군인들이 겪어야 했던 서러움과 아픔도 읽기만 해도 화가 났다. 작가가 글을 쓴지 40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여전히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단 상태에서 작년 트럼프로부터 주한 미군 비용에 대해 터무니 없는 비용인상을 요구받은 상태였다.

잊고 살았던 서민들의 아픈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의 처절했던 과거를 상기시키고 현재 분단의 상황을 일깨운다. 또한 의식의 변화와 적극적 행동의 실천을 요구하는 작가의 글을 만날 때면 나의 문제가 너무 사소하게 느껴진다. 역동적인 필력 속에 잠들지 못하는 민족혼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있다.

작가는 나로 하여금 나는 어떤 한국인으로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일상 속에서 노력을 하면서도 매일 매일 지치고 좌절을 겪으며 나 하나로 무엇이 달라질지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평생을 시대와 사회를 향한 뜨거운 애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생각하는 지성인, 실천하는 행동인으로 인해, COVID-19에도 우리의 삶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가?

슬프고 척박한 땅에 태어나 애환으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삶을 살았던 선조들의 민족혼을 정기로 받은 우리가 2020년의 어려움을 잘 딛고, 2021년에는 가장 ‘한국적인 모습’으로 세계의 무대에서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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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om Of One's Own And Three Guineas (Vintage Classics Woolf Series) (Paperback) - 『자기만의 방』 원서 Vintage Classics Woolf Series 1
Virginia Woolf / Vintage Publishing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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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문학책에 감동을 받고 감상에 젖어 습작을 하면서 언젠가 작가가 되는 꿈을 꾸어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하면서 하루를 돌아보며 나 자신을 다독거리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

중학교 때, 작가와 현재의 직업을 놓고 고민할 때, 부모님이 작가는 가난하게 산다고 현재의 직업을 권하셨다. 진짜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가지라 했던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인지, 취미로 책을 읽고 쓰기를 해서인지 여전히 작가에 대한 매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1929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여성과 소설에 대하여 현실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즉 글을 쓸 수 있는 지적 자유함도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다고 했다. 최소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돈(500 Pound)과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자기만의 방(One’s own room)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500 파운드는 사색할 수 있은 힘, 걸어 잠글 수 있은 방은 자신을 위한 사고의 힘을 상징한다고 했다.

거실이 하나밖에 없는 집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19세기 초기의 중산층 여성들은 시를 쓸 수 있는 기반이 없었고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으며 Jane Austen도 그녀만의 서재가 없었다고 했다. 12명의 남성 시인 중 9명이 대학 교육을 받았고, 영국의 가난한 아이는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 더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적다고 했다.

가부장적인 사회, 여성에겐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시절에 다른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기죽지 않으며 여성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Jane Austen이나 Emily Bronte정도 아니고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라 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적,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교수의 글을 필두로, 남성적 우월감으로 가득찬 그래서 침투력이 약한 남성 작가의 글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남녀가 택시안으로 나란히 같이 들어 가는걸 보면서 두 성이 서로 협력하며 살아감이 당연함을 이야기한다. 의식적인 편견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고 협력과 반대의 결합이 서로 아름답다고 한다. 즉, 사람은 여성이되 남성적이고, 남성이되 여성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One must be woman-manly or man-womanly.)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실망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그런 차별을 받고 자라지 않았고 현재 직장에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이 없다고 생각해서 공감이 덜 되었던가? 19세기에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슬프긴 한데 작가가 되기 위해 물질적 조건이 전제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아 더 불편하다.

Money talks라고 했던가? 작가라는 직업이 아니어도,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어도, 21세기를 살아감에 있어서 물질적 기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물질에서 자유함을 얻고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 본다. 물론 물질적 어려움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지적 자유함이나 행복을 얻을 수도 없다.

이 글이 쓰여진 시기와 달리 이제는 균등한 교육적 기회가 성에 관계 없이 주어지지만 부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가난때문에 역시 기회조차 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내가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받는 차별에 상관없이, 해결책에 힘도 보태지 못하면서 갈수록 커져가는 부의 불평등때문에 내 마음 한켠이 매우 불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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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yranny of Merit :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Paperback)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원서
Penguin Books Ltd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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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신간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 정도로 고여 있던 내 생각에 큰 파문을 일으킨 책이다. 재미있게 읽던 중 이 책을 주말에 직장에 두고 오면서, 중간에 다른 책이 끼어 들어 그걸 끝내고 다시 이 책을 읽느라, 오랫동안 읽었으나 그 만큼 꼼꼼하게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물론 오래 읽어서 중간에 흐름이 끊겨서 리뷰를 쓰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ㅜ.ㅜ

The Tyranny of Merit(업적주의의 독재/능력주의의 독재)라는 제목도 도발적이다. 능력위주, 업적주의라는 표현에는 연공서열이나 인종 차별 등이 배제된다는 공정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능력위주의 정치가 폭군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Yuval Noah Harari 책을 읽을 때 만큼 너무나 뛰어난 필력에 감동하며 읽었고, 이와 같은 진정한 지식인의 자성의 목소리가 많이 출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만함(hubris, conceit), 당연히 자격이 되는(deserve, entitled)이란 단어에, 경종을 빈번하게 울리며 민주주의와 겸손(democracy and humility)으로 책이 끝이 난다. 나도 즐겨 쓰던 속담 ‘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란 표현이, 노력하지 못하여, 노력을 덜하여 승자가 되지 못한 자들과는 신이 함께 하지못할 것이다라는 표현으로 해석될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패자의 입장에선 그 속담이 신의 응징으로 들릴 것 아닌가?

시장 주도형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수입과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었다. 이 불평등을 없애는 마법의 주문으로 ‘노력하면 된다(You can make it if you try)’라는 표현이 양날의 검으로 작용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노력하여 승자가 된 자들은 자신의 성공을 노력한 자신이 당연히 받을만한 것이다로 해석한다. 상대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자는 자신의 무능함만을 탓하게 되며 패배의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내가 존경했던 오바마 대통령까지 노력하면 그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능력/업적 위주의 정치와 기술주의 정치(meritocracy and technocracy)의 칼날을 서슴없이 휘두르며, 세계화의 물결에 발맞추어 가지 못한 약자들의 마음을 보듬지 못하고 불평등을 가속화시켰다고 생각하니 혼란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오바마가 한국의 뜨거운 교육열을 예시로 들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다. 그 만큼 그 역시 교육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대학이 불평등 해소의 열쇠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상류계층 자녀들이 입학했던 하버드 대학의 입학 전형을 SAT도입, 소수 인종, 여성, 유대인등 다양하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였으나 역시나 헬리콥터 부모, 개인과외, 입시 컨설팅 등의 과열로 IVY 리그의 대학이나 국립대학들은 여전히 부유층 자녀들이 주로 입학하는 것이 통계로 드러났고 가난한 자들의 수직 상승은 교육으로 일어나지 못했다. 부유층 자녀들 역시 어린 나이부터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낮은 자존감과 독립심이 약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업적주의/ 능력주의로 인해 계층간에 깊어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숙고해야할 문제점으로 교육 외에 ‘노동의 존엄성(dignity of work)’을 들고 있다. 불평등 해소 방안으로 대학 교육을 강조했고, 자격증이 또 하나의 무기이고 편견으로 작용하게 되었고, 대학 자격증이 없는 고졸 계층의 백인들은, 세계화의 물결과 AI의 등장으로 일자리를 더욱 잃으며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해 정체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경제적 박탈감을 떠나, 일을 함으로써 공공 선에 기여함으로써 본인이 하고 있는 일의 존엄성을 인정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좌절감과 분노로 가득찼던 백인 노동 계층은 업적주의와 능력주의를 부르짖는 오만한 앨리트 계층인 Hilary Clinton에게 등을 돌리고 Trump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Michael Young은 2034년에 하류계층의 반란이 일어날걸 예상했는데, 2016년에 Brexit, Trump의 당선이 일어났으니 18년이나 일찍 반란이 도착했다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선민사상처럼 승자들이 자신의 결과를 재능과 노력의 당연과 결과로 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인지 책 전반에서 반복하고 있다. talent라는 재능은 신의 선물이나 행운으로 받은 것이기에 당연하게 받거나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 생각하면 아니되고 effort라는 것도 혼자하는 노력이 없고 과정에서 좋은 부모, 공동체 등의 도움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즉, 채무감을 가져야지 당연하게 받는 오만함은 오히려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약자나 패배자들의 분노와 좌절을 아우르지 못하기에 사회는 양극화의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스스로 혼자 자수성가 한것이 아니기에 겸손함을 갖고, 성공의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고 능력주의의 독재를 넘어 공공 선에 기여하는 삶을 살기를 촉구한다. 재능이라는 것도 절대적 평등으로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노력도 혼자하는 것이 아니기에, 뒤에 남겨져 뒤처진 이들을 향해 오만한 시선이나 비하의 눈초리가 아닌 그들을 향한 의무감과 채무감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한다.

옳은 것과 선한 것(between the right and the good)사이에서 또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노력하지 않은 자는 적게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시시비비도 누구의 입장에서 가려지는냐에 따라 오만과 겸손의 다른 색깔로 드러남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또 다시 배우며, 공공 선에 기여하는 삶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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