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하반기, 오페라에 미쳐 있었다. 세어보니 56개 작품, 101개 프로덕션. 세계 공연 스탠다드라는 150개에는 한참 못 미치고, 마니아과 비교하면 많은 수가 아닐 수도 있다. 실 관림은 없이 모두 DVD, 유투브, 올레tv 등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독서 등 다른 모든 생활을 거의 포기하고 여기에 몰입하여 이룬 것이다.
가장 좋았던 공연물들은 지난번 포스팅을 한번 쓴 적 있고, 2020년을 마감하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 연출들을 정리해보고 싶다. 처음에는 평범하다고 생각했으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프로덕션들, 이를테면 네이버스토어 1개월 리뷰 같은 거라고 보면 된다.
라 트라비아타 / 페터 콘비츠니
처음 봤을 때 예산을 너무 아꼈다고 생각했다. 2막을 상당히 잘라먹어서 이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등장인물 중 알프레도의 캐릭터 설정이 이 연출을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모솔로 의심되는 책벌레, 복수심에 불타서 타짜로 변신, 마지막에서는 순정남으로... 한번쯤은 꼭 봐야 하는 프로덕션이다.
토스카 / 필리프 히델라만
토스카의 현대적 연출은 이번에 처음으로 접했다. 나폴레옹 전쟁시기 교황파 대 보나파르트파의 대립을 개인에 대한 국가의 감시 문제로 치환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오폴라이스가 토스카에 딱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마도) 거대한 백스크린에 비치는 토스카의 아름다운 외모가 필요했던 이 연출에는 맞았던 것 같다.
베르테르 / 안드레이 세르반
마스네의 작품들은 솔직히 좀 지루한데, 이 연출은 가히 훌륭하다.아름드리 나무를 중심으로 계절의 변화를 묘사했고, TV 등 소품은 60-70년대임을 암시하는데, 음악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마치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니시리즈의 OST처럼.
리골레토 / 그레이엄 비크
처음 봤을 때는 낚은 여자들을 벽에 진열하고 웃통을 벗은 리골레토의 징그러운 몸을 보는 게 혐오스러웠다. 일부 장면은 무대가 기울어 있어 보기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거북함이야말로 비틀어진 인물들과 살아가는 비틀어진 세계를 몸으로 느끼게 하기 위한 연출자가 의도한 게 아닐까 한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의 고통을 관객들이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처럼.
나열하고 보니까 넷 중 세 개가 마르첼로 알바레스 주연이네. 맞다. 알바레스의 미성이 나를 사로잡아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소프라노와 바리톤은 '이 사람이다'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을 아직 못 찾았다. 메조 소프라노는 '아이다'와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아니타 라흐벨리쉬빌리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굉장히 강렬한 게 인상적이었다.
12월에는 베르디 후기 작품들을 차례로 보았고 엊그제 '팔스타프'로 마무리했다. 새해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몰입해서 보느라 지치기도 했다. 내가 오페라에 접근하는 방법이 맞는 것인지, 내가 정말 좋아해서 보는 건지, 얼마나 더 보게 될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아주 잘 된 연출에 내 돈과 시간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이 장바구니와 유투브에서 폴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