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신민경 지음 / 책구름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런데이'라는 어플을 이용해서 달리기를 한 적이 있다. 헬스장을 끊어 놓고 도통 가지를 않아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1분을 시작으로 30분 연속 달리기까지 총 8주 코스로 되어 있었다. 한 회를 진행할 때마다 도장을 찍어주는데, 비어있던 칸에 하나씩 채워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 코로나 시국 이후로는 가지 못했지만. 


처음 시작 할 때는 30초 달리기도 힘들었다. 심장이 펌프질 하며 뿜어내는 혈액이 근육으로 스며드는 감각이 느껴졌다. 숨이 차올라 들이 쉬는 숨보다 내쉬는 숨이 더 커지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몸이 가벼워 졌다.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당연한 듯 찾아오는 휴식 때문이었다. 이 어플은 연속해서 오랜 시간을 뛰기 보다 30초 뛰고 1분 휴식, 이런 형태로 짜여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달릴 수 있었다. 휴식이 달고 달아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지만 당근은 채찍과 공존해야 더 달콤한 법. 달려야 할 시간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인생은 이처럼 달리기와 멈춤을 반복한다. 멋지고 설레는 하루가 있으면 초라하고 어려운 하루가 있다. 그렇게 매일을 쌓아가던 중, 강제로 멈춰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을 읽다가 잠시 덮었다. 방대한 내용이나 복잡한 설정 탓에 잠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일렁이는 감정이 손을 붙들었다.


"통증은 나의 신념을 약하게 만들고, 나를 불안하게 흔들어 놓는다.(47쪽)"


인생에 이겨낼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세상이 참 공평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맘 편히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온갖 아픔과 부조리함과 불공평을 다 겪는 사람도 있으니까. 양 극단의 평균은 중간이 되니까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에게 물어봐 주세요. 뭘 좋아하고,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은지. 그리고 거기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세요. 저는 그게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 같아요.(107쪽)"


열심히 산다는 건,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건지 생각했다. 요즘의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있다. 잘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목표를 세우고, 조금씩 다가가도 있다. 다난 했던 20대를 돌아보면 지금이 더 행복하다. 이렇게 매일의 행복을 찾으며 사는 것이 좋다. 


나의 경우 오히려 성인이 된 후 했던 공부들이 재미 있기도 했는데, "거의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게 정말 좋았다.(126쪽)" 는 것에서 저자의 생에 대한 노력과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요리하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 열정이 얼마나 컸을까. 아프고 난 이후 "요리라는 일련의 작업이 너무도 귀하게 느껴진다.(135쪽)"에서 생각이 바뀐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나는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 생활 전반적인 부분에서 많은 것을 느꼈는데, 그 중 식사 부분이 가장 컸다. 세끼를 차려 먹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먹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정성이 더 크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자 감히 위로할 수 없는 고통을 재단하기보다 그녀가 소망한 일을 이루기를 바라게 됐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만큼 바라는 결말을 맺을 수 있기를.


고맙고, 미안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는 밤. 가만히 누워 행복에 대해 생각해 봤다. 내게는 손톱 만한 행복도 행복이었다. 


※ 책구름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판타지는 결국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입니다.(46쪽)"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행복함을 중독적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동감한다. 검은 활자 사이를 누비다 보면 얇아지는 뒷 페이지가 야속하다. 읽었던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없는 내 머리에 그나마 단편적인 감상이라도 쌓아둘 수 있는 방법이 글쓰기인데, 나는 종종 읽는 것은 쓰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읽고 쓸 수 있는 서평 활동이 참 좋다. 읽을 기회와 쓸 기회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다.


나는 특히 판타지 장르가 좋았다. 태생부터 비범한 능력을 지녔건, 아니건 그 세계는 나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오롯한 나만의 세계였고 그들의 도덕은 나의 도덕이 되었다. 선명한 이미지들이 살아 숨 쉬었다.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 풍성하게 만들(192쪽)" 어 주었다. 과거와 미래의 틈새인 현재를 사는 나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사람들은 '다 지어낸 이야기라서' 판타지를 읽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판타지의 재료는 리얼리즘이 다루는 사회 관습보다 훨씬 영구적이고 보편적이에요. 판타지의 바탕은 정신적인 요소, 불변하는 인간의 정수, 우리가 아는 심상들이거든요. 설령 만나 본 적이 없다 해도 어디에 있는 누구든 드래곤은 알아보는 게 사실이잖아요.(47쪽)" 


처음 읽어본 판타지 소설은 학교 도서관이나 책방에서 발견한 것들이었다. 내게 소설은 친구였고 시간이었고 세상이었다. (영상 시대로 접어들며 가장 아쉬운 점이 동네마다 있었던 책방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퇴마록, 드래곤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룬의 아이들. 그리고 어스시 이야기. 세월에 곰삭은 두뇌는 내용을 잊었지만 특이했던 작가의 이름 만큼은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슐러 르 귄의 삶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뻤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1장, 강연과 에세이, 어쩌다 내놓은 조각글들.


2장, 책 서문과 작가들에 대한 글 모음.


3장, 서평.


소설 작가들의 에세이는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소설에 대한 글을 읽어보는 일은 서문에 소개글이 대부분이었다. 작가가 바라보는 장르 문학과 다른 소설에 대한 글들이 너무 궁금해서 나는 서평 부분 부터 읽었다.


책 속 책들의 이야기는 세헤라자데가 그의 왕에게 살기 위해 바친 천일야화를 떠오르게 했다. 그 이야기들은 연애, 범죄, 여행 등 여러가지 주제를 품고 있었고, 마치 천 권의 책을 읽는 것 같기도 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과 같다. 한 작가가 쓴 책이어도 다 같지 않다. 그러다보니 같은 작가에 대한 다른 소설의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녀는 번뜩이는 재치와 날카로운 이성으로 책에 대한 비평을 썼다. 평가를 부탁 받는다면 냉정한 비판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그녀는 그런 내용도 솜씨 있게 적어 놓아 감탄했다. 행간을 읽을 뿐 아니라 작가까지 깊게 탐구하는 열정에 탐복했다. 나도 앞으로 책을 읽을 때 문자 아래에 깔아 놓은 작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평 파트가 끝난 뒤에 그녀가 작가들의 공간에서 생활한 일주일의 기록이 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컴퓨터 화면으로 작업할 때와 다르게, 작업에 완전히 몰두하면서도 주위 세계에 열려 있는(508쪽)" 체험을 한 점이 부럽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장소에서의 일주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안온한 시간 속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기회가 아닐까. 나는 고요한 시간을 참 좋아해서 집에서 TV를 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있는 곳의 층간 소음과 벽간 소음이 적응되지 않아 꽤 힘들었다. 그녀의 일주일을 함께 하면서 잠시나마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인간 공동체의 핵심 기능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삶이란 어때야 하는지,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으면 하는지에 어느 정도 합의하고, 그다음에는 우리와 그들이 우리 생각에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25쪽)"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진정한 목적은, 이전 세대로부터 전승되는 것을 익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읽고 사유함으로써 산란했던 정신을 모아, 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그들이 건네는 따뜻한 손을 맞잡는 것이다. 



※ 황금가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을 감았다 뜨니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해를 넘어도 여전히 날 선 하루를 매만지다 보니 금방 이었다. 시간은 줄곧 조용히 흐르다가, 심통이 나면 괜히 내 몸을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정상과 감기의 경계에서 옷깃을 여몄다. 퇴근 길 가로등 밑을 지날 때, 뒤를 밟는 어둠이 무서워지는 계절이었다.







작가정신에서 [겨울장면]이라는 이 계절과 어울리는 책이 도착했다. R의 시점으로 단편적인 이야기를 훑어보다가 버지니아 울프가 떠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초반의 인물로,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썼다. 그녀의 독특한 전개는 현재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국내의 여러 작품에도 이 기법이 등장한다. 


나는 독서 모임에서 [자기만의 방]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간 꾸준히 책을 읽어왔음에도 문장들이 눈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 들어 어지럽기도 했다. 자기만의 방을 읽는 방법으로 결론을 먼저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서 읽으라는 조언이 있었는데 상당히 유효했다.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이 책의 뒷 부분을 먼저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저 어두운 윤곽이 네모는 아니라고, R은 생각한다.(9쪽)" 소설은 R의 생각으로 시작된다.


R은 8개월 전 5미터 바닥으로 추락해 기억을 잃은 사람이다. 플랑크톤 처럼 부유 하던 생각들 사이로가끔, 어떤 기억이 선명해 지기도 있다. 짤게 토막 난 이야기들이 제대로 반죽 되지 않아 툭툭 끊어지는 R의 의식 같았다.


"R은 한순간, 단 한 번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겹쳐지는 시간. R은 갑자기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지고.(29쪽)"


잠들기 전 몽롱한 시간이 되면 흘러가는 것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내일인 지 모를 때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난건지, 아니 사실은 하루 동안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난 것은 아닐까, 아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마치 R이 된 것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마음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고. 기억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다.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R은 생각했다.(75쪽)"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요소중에 가장 큰 것은 뭘까. 내가 나로서 살아온 기억이 없다면 나의 모든 것을 잃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일주일은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다.(79쪽)"


성인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지루함이다. 이 지루함은 반복에서 온다.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금요일의 퇴근으로 끝나고, 주말을 침대에서 보내다 보면 어느 새 월요일이다. 매일을 달라지게 만드려고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 활동을 하지만 결국 그것들도 반복되는 일주일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지루함이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지루함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계속 읽었고, 독서 모임에 나가게 되었으며, 사이드 프로젝트들도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원동력이 되어 준 셈이다.


작가는 겨울 낙엽처럼 바싹 마른 문체로, 덤덤하게 R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상처 입었고 멈춰 있는 것이 최선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계속 시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R이 성공 했으면 좋겠다. 기억과 망각 사이의 유영을 끝내고, 아내와의 관계를 끝 맺고, 파도 위를 떠다니는 유리병 같은 삶에서 벗어 나기를 바란다.



※ 작정단 6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택트시대 여행처방전 - 지금은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시간
이화자 지음 / 책구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은 내가 떠나던 것이었다. 복잡하고 산란한 도시를 떠나 힐링을 위해. 맘 맞는 사람과 함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양한 면을 발견하기 위해.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나의 첫 해외여행이 떠올랐다. 들썩 하고 북적대는 공항에서 처음으로 면세품을 수령하던 순간의 설레임. 첫 여행이자 4개월의 인턴 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어린 날의 치기라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도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떠난 것이었다. 한국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먼저 와 닿은 것은 다른 언어로 적힌 간판을 보기 전, 비행기에서 내리며 폐부로 스며든 눅눅한 공기를 느꼈을 때가 아닐까 싶다. 눈으로 보고, 냄새로 맡기보다 먼저, 숨을 들이켰다. 올라탈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낯선 얼굴의 승무원들이 환영 인사를 했다.


그 후 10년. 사람이 운전하지 않는 자동차가 다니고, 내 방 침대 위에서 전 세계 사람과 소통하고, 내 목소리에 대답하는 AI가 있고, 드론으로 배달을 하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방에서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뜻밖의 재난災難이 찾아왔다.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는 상황은 타인의 온기를 쥐는 것이 죄처럼 느껴지게 했다. 사람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자라나고,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도 2주라는 시간적인 거리가 생겼다. 방역 수칙이 강조됐다. 그래서 여행은 우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치명적인 전염병에 의해, 혈연은 찢어 지거나 송진처럼 굳었다. 대면하는 자리에는 손소독제와 마스크가 예의가 되었다. 언제든 보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마음이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이 생겨났다. 그런 장면을 볼 때면 목에서 울음이 끓었다. 몰아내도 밀려오는 파도처럼, 우리는 언택트 시대로 내밀려졌다.


여담이지만, 이 '언택트(untact)'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생긴 신조어라고 한다. 컨택트(contact)의 반대어로 통용된다. 너무 자주 쓰이고, 굳어져 버려 당연한 듯 사용되어 이 말이 콩글리쉬라는 것을 우연히 듣고 더 놀랐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공항장애(공항에 못 가서 생긴 병)' 치료차 떠난 국내 여행"


밖으로 떠날 수 없다면, 우리 나라 안에서 색다른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은 어떨까?


이 책에는 저자가 탐구하고 발견한 우리나라의 수많은 명소가 실려있다. 지금 당장 떠나라는 말이 아니다. 비대면, 비접촉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언젠가 끝나기를 바라며, '공항장애'가 발병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준비해 보자는 것이다.


웅진, 통영, 신안, 강화, 연천, 한탄강, 제주, 속초, 인제, 고성, 양주, 양평, 안양, 양양, 속초, 부산, 고창, 진안, 안주, 영주, 파주, 춘천 등. 24가지 장소에서 우리나라에서 만나보지 못했던 장소를 만날 수 있다.


저자는 걷고, 빠져들고, 감상한다. '미인도'라는 이름이 붙은 비진도, 한국의 '섬티아고' 소악도, 소금꽃이 피어나는 섬 '신의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호로고루성', 유네스코에서 세계지질공원에 선정된 '한탄강', 치유의 공간이 된 박물관을 거닐었다. 지명들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고 적확한지. 섬 뿐만 아니라 산, 강, 공원, 사찰, 축제 그리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비롯한 카페와 건축물. 나만 알고 싶은 장소들을 숨김없이 모두 내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의 사진은 사진집을 보는 것처럼 풍광명미가 실린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찍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연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지 않고 저자 본인이 직접 걸으며 하나씩 사진을 담아온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언젠가 내가 저곳에 간다면 눈 앞에 마주할 것 같은 경치가 선연했다.


바다에서 짭쪼름한 냄새가 느껴지고, 녹음에서 시원한 산바람이 살랑였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동네 책방을 이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통영 '봄날의 책방'사진을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나무 냄새가 났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내는 소리가 부서졌다. 통영은 다른 어느 곳보다 내가 있는 도시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절로 몸이 근질거렸다.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건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존재한다는 것. 행복이란 비 일상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 있다는 것(Epilogue)"


[지금은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시간] 이라는 부제목이 참 와 닿는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꿈은 가장 어두운 한밤에 꾸는 것이다.




※ 책구름 출판사 서포터즈, 「책구름지기」 1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월은 신기한 달이다. 한 해의 마무리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것들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새롭게 맞이할 다음 해를 위해 목욕제계를 한다. SNS나 유튜브, 이웃들의 블로그를 둘러보면 저물어가는 올해에 대한 여러가지 감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올해는 더더욱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은 가까이, 몸은 멀리 두어야 했고 급격하게 일어났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바깥 나들이를 즐기는 편이 아닌, 집순이인 나도 때때로 몰아치는 현실이 힘들어 속으로 조용히 침잠했다. 이럴 땐 따뜻하게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가슴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 줄 소설을 읽는 것이 딱이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를 읽으니 마음이 속닥거렸다.







나는 영화로 먼저 들어 본 작품이었는데, 소설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작정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잘 데워진 조약돌이 모여있는 것처럼 몽글몽글하면서도 은근한 느낌이 드는 9가지의 이야기들이 모여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이 싫지 않다. 누구나 일탈은 꿈꾸니까.


"나이에 걸맞게 세상물정 잘 아는 여자로 처신하려 노력(11쪽)"하지만, 현실에서는 꿈꾸며 혼자 노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고즈에('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와 "현실과 다른 차원으로 가슴속에 존재하는(51쪽)"말들을 하는 조제('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와 "상냥함 뒤에 언제나 공갈과 위협의 칼날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87쪽)"알 것 같은 기분이 된 우네('사랑의 관')와 좋기는 하지만 평범한 청년인 호리 씨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유부녀 가오리('그 정도 일이야'), 혼란스럽지만 "다른 차원에서 온 연체동물 같은(146쪽)" 온기를 가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 교토까지 온 이와코('눈이 내릴 때까지'), 목적이 있어 칠년만에 찾아온 옛 애인을 만난 아구리('차가 너무 뜨거워'), "감미로운 생활이 거품 같은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224쪽)"이 들어버린 에리코('짐은 벌써 다 쌌어'), "가슴을 새카만 먹물로 만들어버(240쪽)"린 이야기를 털어놓은 남편과 이혼하는 리에('사로잡혀서'), 바쁜 남자 렌을 기다리다 그의 조카인 시몬과 함께 떠나버리는 미미('남자들은 머핀을 싫어해') 까지.


인생에 달관한 듯 하면서도 사랑에 휩쓸리기도 하고 떠나가는 관계에 미련을 보이기도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산뜻하게 느껴졌다. 인생에서 지켜야 할 선을 아슬하게 넘어다니며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 없이 표현한다. 


나는 특히 '그 정도 일이야'의 가오리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일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115쪽)"인 남편을 불만과 짜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 자신의 일을 찾아나섰다. 그녀가 비즈니스를 취미로 삼아 일에 몰두하게 된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거래처 관계로 만나게 된 호리 씨에 대해 "늘 내 곁을 오가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109쪽)"하면서도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단지, "내가 좋아하는 호리 씨를 확보해두고(108쪽)"자 하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남편과는 "무대 흥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배우들의 뒤출이 같은 감각(118쪽)"을 두면서도, 호리 씨와는 심술궂은 농담을 하면서 손가락 인형인 '치키'를 이용해 갓 빠져든 연인의 서먹함을 걷어내는 노련미가 있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관계들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 애인 처럼 나에게 가까이 스며들어 내 나이테를 구성하는 관계들이 있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경계 안으로 들어와 정립 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정리되지 않지만 어쩐지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괜찮은 관계들도 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샅샅이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흔적만 남기도 하고,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놓치 못할 강렬한 것들도 있다.


첫사랑처럼 강렬하고 새침하면서 통통 튀는 것들을 지나니 점점 원숙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리고 무척 좋았던 점은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가 대부분 여자이고, 탄탄한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밤하늘을 볼 때 반짝이는 별 처럼 제 한몸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좋다. 캄캄하고 긴 겨울 속, 발 아래를 밝혀주는 촛불 하나를 들고 어딘가에서 부딪힐 지도 모르는 관계에 마음을 한껏 열어두어야 겠다.


※ 작정단 6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