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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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덱스터 DEXTER'라는 드라마는 사이코패스인 주인공 덱스터가, 또다른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을 제거하는 내용이다. 그는 어렸을 적 겪었던 사고의 트라우마로 사이코패스가 되었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이끌어 준 아버지 덕분에 사회의 악을 제거하는 기특한(?) 사이코패스가 되었다. 


 덱스터는 혈흔 분석 전문 법의학자다. 일터에서의 그의 모습만 본다면 연쇄살인마라고 상상도 못할 것이다. 살인자와 일터의 그는 지구와 헬리혜성 만큼 떨어진 사람이다. 아버지의 교육 덕분에 유능함과 유순한 성격을 갖춘 일반인으로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혹시 내 주변에도 평범함을 가장한 채 저런 기질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었다. 


 정유정 작가님의 신간, [완전한 행복]을 읽으며 덱스터가 떠올랐다. 그녀에게도 무릎 굽혀 같은 눈높이에서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떻게 자랐을까. 그녀의 삶에 씌워진 쿰쿰하고 어두운 폐가의 그늘을 벗겨줄 수 있는 누군가가.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완전한 행복, 112쪽)


 한창 예쁨받고, 사랑받아야 할 유치원생의 나이에 어머니가 신부전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병간호, 두 아이 뒷바라지, 막 시작한 사업과 집안일 때문에 부담이 컸다. 할머니에게 떠밀리 듯 유나를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돌볼 나이가 된 여덟 살이었던 언니 재인 대신 자신이 팔려갔다고 생각한 유나는, 주말에 아버지가 갈 때마다 땅바닥에 드러누워 다 죽어버리라고 울부짖었다. 남은 재인에게는 어머니의 미움이, 유나에게는 외가에서의 고통이 따랐다. 유나는 재인이 자신의 것을 모두 훔쳐갔다고 생각해 증오와 미움을 키웠다. 재인에게 그 맹렬한 증오는 상처와 공포로 남아 불시에 튀어나오는 기억이 되었다.







 그렇게 자란 유나의 주변은 설명할 수 없는 죽음들로 넘실거렸다. 동거하던 남자, 결혼을 약속했던 유학 동기, 아버지. 그들의 공통점은 졸음 운전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리고 전남편의 실종과 현남편과의 불화. 정말 유나가 모두 벌인 일일까? 재인은 자꾸만 뻗어나가는 사고에 발목을 걸어 넘어뜨려야 했다. 우연이야. 거기에서 뭘 읽으려 들지 마.


 DNA에 송곳처럼 새겨진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읽어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나는 그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에는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씨앗도 싹을 틔워 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물과 햇빛, 그리고 양분을 흡수할 수 있을 조건을 갖춘 흙이 필요하다. 너무 과습하면 썩어버리고, 흙이 없는 곳이라면 기회 조차 메말라버린다.


 "언제부턴가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사회로부터 주입받은 행복은 마치 누구나 노력하면 완전한 행복을 이룰 수 있을 것 처럼 느껴진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개인의 행복을 결정지을 수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 위험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도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완전한 행복은 한 나르시시스스트의 행복 강박"과 타인의 행복과 맞닿는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조건에서 피워낸 새싹이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 지, 책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 은행나무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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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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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임새 있게 쓰여진 소설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이야기의 바깥부터 시작되는 서사를 슬렁슬렁 읽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처럼 빨려들어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이다.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그래서 나는 추리소설이 좋다.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들은 언제나 흥미롭고 무한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범인과 주변인들에게는 각자의 성격과 이유가 있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이 있으며, 마침내 어떤 결말에 도달한다. 출발역에서 독자라는 승객을 태워 운행을 시작한 열차가 조금씩 속력을 올려 눈길을 사로잡는 사건들을 마구 흩뿌리며 높은 속력에 도달한 뒤, 종래에 종착역에 도착한 모양새 같다.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의 <죄의 궤적>은, 일단 사건부터 펼쳐 들이대는 여느 소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에서 열차를 타고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훗카이도의 작은 섬 레분토에서 시작되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주쿠까지 작가가 보여주는 데로 이끌리다가 문득, '어?' 하고 고개가 기울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우노 간지는 부모가 살아있지만 양부의 폭력과 어머니의 홀대 속에 버려져 착취당하던 섬에서 간신히 탈출한다. 양부에게 당했던 일들 때문에 뇌 손상이 왔고 그것은 기억력 감퇴와 어딘지 어수룩하게 보이는 성격을 만들었다. 그는 항상 섬에서 벗어나길 꿈꾸며 빈집털이를 하며 남몰래 탈출 비자금을 모으고 있었는데, 도와주는 척 하며 자신을 속인 이웃 '아카이'씨에게 훔친 물건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바다 한복판에서 연료조차 모두 바닷물로 바꿔치기 된 상황. 그간 섬에서 일해왔던 짜투리 지식으로 간신히 뭍에 닿은 그는 타인의 옷을 훔쳐 입고 도쿄로 달아나게 된다. 우연히 만난 야쿠자 똘마니 '마치이 아키오'의 도움으로 한동안 몸을 숨기던 중, 캬바레에서 일하던 '기나 사토코'와 정이 통한다. 그리고 그와 사토코는 도쿄올림픽으로 한창 활기를 띈 와중에 벌어진 <요시오 군 유괴사건>의 범인으로 몰린다. 그는 정말 진짜 범인일까?






작가는 사건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세 명의 시선을 통해 편린들만 툭툭 던져놓았다. 이야기는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보여졌기 때문에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작중 사건의 범인처럼 느껴지는 '우노 간지'의 시점은 뭉터기로 썰어놓은 듯 했다. 그 홀로 사건에서 떨어진 외딴 섬 같았다.


책을 읽을수록 간지가 범인인지 아닌지, 그가 유괴를 벌인건지, 사토코씨를 죽인 건지 궁금해졌다. 경찰의 의구심에 기대어 약간씩 추리해가며 읽어갔다. 상당히 현실적인 사건과 배경이다 보니 소설 속 경찰이 어쩐지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납치범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공중전화인지 일반전화인지에 대한 구분을 범인에게 몸값 50만엔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점이나, 몸값의 지폐 번호를 적어두지 않기도 하고, 유괴 사건이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자 대대적인 tv 홍보를 통해 1억 전 인구를 탐정으로 만들어, 강물이 바닷물을 만나 정체된 것처럼 수사의 진척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들은 아무리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시대의 얘기라도 조금 답답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요즘의, 사이다 소설들에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소설에 흠뻑 빠져들다 보니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보는 사회의 비판적인 면이 잘 드러나서 좋았다. 재일조선인 1세였던 미키코의 아버지는 약을 허락해주지 않은 경찰 때문에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미키코는 일본인으로 어렵사리 귀화했음에도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야쿠자와는 뒷거래를 하지만, 노동자들의 연합회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공을 세우기 위해 개인적인 정보망을 활용하고 혼자 수사를 하기도 했다.


계산기 38만엔. 전화기 설비비 1만엔. 컬러 텔레비전 20만엔. 미키코의 어머니가 하는 마치이 여관에 숙박하는 사람들은 하루 평균 1000엔의 일당을 받으며, 1박 200엔 짜리 방에 묵고, 잔술 하나에 30엔인 술을 마신다. 10억이 넘는 아파트와 전월세를 오가는 서민들의 삶이 보색으로 대비되어 그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매일 마주하는 사회와도 맞닿아 있었다.


계부가 행한 폭력과 착취와 부정과 부패는 간지의 내면을 비틀었는데, 그 틈으로 용해된 쇳물이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훗카이도의 레반토라는 이름 모를 작은 섬에서부터 도쿄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떨어뜨린 간지의 죄 역시 꾸준히 그의 뒤를 쫓아와 마침내 그를 삼켜버렸다. 


죄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닐까. 그것이 어둠 속에 영영 묻히지 않도록. 죄의 궤적을 쫓느라 숨가쁜 소설이었다.


* [궤적] 어떠한 일을 이루어 온 과정이나 흔적


* 은행나무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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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르는 언덕
어맨다 고먼 지음, 정은귀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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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 빛을 바라볼 용기만 있다면,


우리가 그 빛이 될 용기만 있다면(49쪽)"


물레가 돌면 실이 실패에 감기듯, 말에서 시를 뽑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맨다 고먼과 같은 시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였는데,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축시를 낭독하던 사람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흥미가 갔다.


그래서 은행나무서포터즈를 통해 어맨다 고먼이 취임식에서 낭독한 시의 원문을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무척 설렜다. 






택배를 열자, 눈으로 상큼한 오렌지를 한 입 베어 먹은 것 같았다. 샛노란 은행나무 색의 표지가 곧 찾아올 봄의 색을 입고 있었다. 계절은 다양한 색을 가졌다. 벚꽃의 분홍이기도, 봄나들이 가는 유치원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색이기도, 겨우내 흙과 나무가 숨겨둔 새싹이 마침내 피어오르는 색이기도 하다.


"청동처럼 뛰는 내 가슴의 숨결

하나하나로

우리 이 상처 입은 세계를 경이로운 세계로

일으킬 것이니.(43쪽)"


흑백의 명암 세계에서 시인들이 뽑아낸 찬란한 언어의 나열을 보고 있으면, 추운 공기 속 한 줌의 숨이 만들어내는 입김 같다. 절로 감탄이 났다.


 




미국 최초의 계관 시인이라는 소개가 무색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명예의 상징으로 씌워주던 월계관에서 시작된 단어인 '계관 시인'은, 본래 영국 왕실에서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던 칭호였다. 그 관습이 미국으로도 넘어와 어맨다 고먼 같은 시 부문에서 뛰어난 사람에게 칭호를 주었다고 한다.


"그녀의 말이 우리를 휩쓸면서, 그 말이 우리 상처를 치유했고 우리 영혼을 부활시켰어요. 한 나라가 멍들었으나 온전한 그 나라가 꿇고 있던 무릎 펴고 일어섰죠.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어요.(서문)"


오프라 윈프리가 쓴 서문에서는 사람의 깊은 고통을 치유시키는 "그것이 시의 힘"에 대해 말한다.


흔히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한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시의 힘"일 뿐 아니라 "언어의 힘"이라고도 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은 상처를 안고 산다. 그것이 얼마나 깊고 넓든.


"지켜보던 모든 이가 희망으로 가득 차서 떠(서문)"날 수 있도록 언어의 마법을 부려준 어맨다 고먼의 말이 상처받은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 은행나무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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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인 러브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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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의 귓바퀴는 건반에 떨어지는 자신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이미 러시아의 어딘가, 다른 세계에, 다른 시대에, 낭만적 격정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가 있었다.(35쪽)" 마치 주인공 토마의 모습처럼.


그런 모습이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여서 일까. <고스트 인 러브>에서 주인공 토마가 죽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상상이 됐다.







"창문 손잡이는 그만 놔도 돼. 닫혀 있는 창문에서 추락하는 일은 없으니까.(23쪽)"


세상에 기꺼운 이별이 어디 있겠는가. 갑자기 찾아온 이별은 둘에게 전혀 준비할 시간을 주지 못했다.  그렇게 아들과 아버지는 가깝고도 먼 사이에서, 되돌아올 수 없는 관계까 되어버렸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아빠가 아들의 사랑을 도와 주는 이야기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왠걸. 내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육체를 갖고 있을 때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기 위해 영혼의 모습으로 아들의 앞에 나타난 아버지라니!


한국도 그렇듯, 프랑스도 아버지의 모습은 돌로 만든 벽 같은 침묵의 이미지인 걸까? 언제나 입만 열면 와르르 쏟아지는 것이 대화인데 왜 부모님과의 대화는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되돌아온 토마의 아버지는 끊임없이 말을 건다. 은근슬쩍 물어보는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지만 말이다. "아빠가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어요. 하느님, 죽음이 아빠를 수다쟁이로 만들어 놓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리까!(104쪽)" 


돌아온 아버지는 어쩐지 생전의 모습과는 좀 달라진 듯 하다. 떠났던 생을 다시 찾은 것이 기쁜 것일까. 아니면 평생의 사랑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설렌 것일까. 아버지의 수다는 절절히 끓던 마음이 식어 그대로 굳은 아들을 프랑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움직이는 데 성공한다.


도착과 옛사랑을 만날 생각에 설레임도 잠시, 그들(사람 한 명과 유령 한 명)의 앞에는 예상치 못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


사람은 오랫동안 바라본 것을 닮아간다. 


"이제는 작곡도 하니?"


"오래됐어요. 아무에게도 들려준 적이 없을 뿐이지……."


"왜 그랬어, 아주 아름다운 곡인데. 어떤 노래의 후렴구 같기도 하고. 제목은 생각해놨니?"


"고스트 인 러브."(306쪽)


책을 좋아하던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음악을 사랑하는 토마는 작곡을 시작했다. 세상에 내보일 준비가 되지 않았더라도 어느 새. 그것들은 점점 내게 스며든다. 그래서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는 말이 생긴 걸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바닥에 부딪힌 빗방울 처럼 톡톡 튀어오른다. 가벼워 보이는 모습은 둘 사이를 친구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내내 미적거리던 구름이 살랑이는 바람에 밀려나면 드러나는 따스한 햇살처럼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숨길 수 없는 따스한 애정이 느껴졌다.



※ 작정단 6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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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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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는 얼음 속에 냉동 되어 있다가 깨어난 히어로다. 보통 사람이라면 냉동 된 신체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들이 개발한 인체 강화 주사 덕분에 멀쩡하게 깨어날 뿐만 아니라, 남다른 신체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세상에서 깨어난 뒤, 조그만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캡틴아메리카 - 윈터솔저' 영화에는 조깅 중 만난 팔콘의 말을 듣고 수첩의 to do list에 하고 싶은 것을 덧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관에서 봤을 때는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서 좋았다. 


그가 메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내가 냉동 되어 몇십 년 후에 일어난다면 내가 알던 세상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전혀 다른 곳에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살아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은 이 표지를 보시면 무엇이 떠오르나요?(은행나무 스태프 정리드)"






은행나무 서포터즈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며칠 뒤, 흐릿한 기억 같기도 하고 잠들기 전 가물어지는 시선에 닿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 도착했다. 표지와 내용 사이에 스태프 님의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른 어떤 내용보다 표지에 관한 질문이 콕 박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한 뒤, 맺힌 눈물을 통과해서 본 사람 같았다.


이 책 <비행사>는 크게 1,2부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은 병원 침대 위에서 주인공이 깨어나며 시작된다. 두 번째 부분은 주인공과 그의 아내, 그리고 주치의의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겪은 뒤 쓴 일기의 내용으로 전개된다.


내가 '나'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시대와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기억하고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갔으며 어느 것 하나도 나의 기억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없다. 이미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어야 할 나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다. 내가 자주 듣던 소리가 사라지고, 냄새가 낯설다. 


공기중으로 퍼져가는 연기처럼 점점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억을 잃었던 그가 과거의 장면들을 떠올릴 때 나도 함께 그의 인생을 구성하게 됐다. "왜 내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걸까요?(45쪽)" 그가 찾은 소중한 관계에 대한 기억은 편린片鱗과 같았고, 잡힐 듯 하면서 모래처럼 손 안에서 빠져나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이 시대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텅 비어버린 것이 점점 기억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좋았다. "이 시대는 내가 속한 시대가 아니며, 지금 이 시기에 나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가 나는 여전히 낯설다.(388쪽)" 하지만 잘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여전히 낯섦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역사라고 하는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공존(9쪽)"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나라인 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주인공 인노켄티가 살아남은 솔로베츠키 제도의 강제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수용소라고 하면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러시아의 강제 수용소에 대해 몰랐던 터라 검색을 해봤다. 갑작스러운 사실이 눈 앞에 툭 튀어나왔다. 그곳은 과거에 수도원 이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것부터 악한 것까지 모든 것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9쪽)"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곳은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서는 정교회의 성지였고 강제수용노동소로서는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냉동 상태에서 소생 한 그는 국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다.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냉동 인간을 회생시키는 실험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라면? 미국보다 우주에 먼저 진출했던 러시아 사람들이 당시, 그 사실에 대해 얼마나 열렬하게 반응했을 지 궁금해졌다. 


그는 그런 수용소를 겪었으면서도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받는다. 이 훈장을 받으면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의 이중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기억이 자신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주치의인 가이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 한다. 국가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음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의 무고를 밝힐 분은 오직 신뿐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국가가 뭘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393쪽)" 그는 국가에 대한 모든 감정을 포기한 것일까?


그에게 점점 어떤 기운이 드리웠다. 나는 이것을 해동 되기 전부터 따라오던 불행이라 불러야 할지, 필멸자인 사람이 밟아나가는 죽음의 길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전에도 이번 생을 떠난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죽은 것은 출구였고, 지금은 떠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다.(515쪽)" 그가 이것을 헤어짐이라 불렀으니, 잠깐 동안의 이별이라 하고 싶다.







작가들의 표현력에 감탄할 때가 있다. 내가 마치 그들과 같은 공간에 서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고, 숨 쉬며, 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때다. 최근에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봤는데, 눈이 맑아지는 문장들과 더불어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 어린 완서의 손을 잡은 느낌이었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단 하루도 같은 놀이를 하지 않았고, 석양 지는 수수밭에서 비애를 느꼈다. 다 자란 성인의 눈높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세상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면 현실과 유리 되어 활자 사이를 걷는다. 그가 심문이 끝난 후에 어둡고 역한 냄새가 나는 감방으로 끌려갈 때 나도 함께 끌려갔다. 과거에 사랑했던 아나스타샤를 만나기 위해 407호 병실 앞에 서자 내 심장도 함께 쿵쾅거렸다. 그의 몸이 죽음을 느끼고 정신력으로 버틸 때 나도 함께 육체의 고통과 싸웠다. 나사로처럼 부활했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좌표 없이 표류 하는 삶을 살았다.


고장 난 랜딩 기어를 가진 비행기가 착륙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이노켄티, 그처럼.




※ 은행나무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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