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선 수학 - 수학이 판결을 뒤바꾼 세기의 재판 10
레일라 슈넵스.코랄리 콜메즈 지음, 김일선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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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를 간 학생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수학을 좋아해서 왔던가, 차선책으로 왔던가. 나는 후자였다. 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수학은 나에게 암기였고, 공식이었고, 양자역학 같은 것이었다(이해의 범위를 자주 벗어났다). 고등학교 3년을 내내 괴롭히더니, 대학교에 들어가자 통계학으로 돌아왔다. 안그래도 무거운 교과서에 사용 방법조차 알 수 없는 공학용 계산기가 추가됐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교과서를 팔아버린 것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나의 소심한 복수였다.


그랬다. 수학과 나의 인연은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수학적 계산이 틀릴 수 있다는 이 책이 너무나 크게 매력적으로 들렸다. '숫자'는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라 그것이 장점이라고 했는데, "수학이 유죄 확률을 조작할 수 있다"니! 


숫자를 좋아하고, 수학에서 매력을 느끼는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수학의 아름다움은 '간결함', '명확함', '정확함' 이라고. 하지만 수학도 학문의 하나다. 그 학문을 이용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어떤' 관점이 씌워질 수 있다.


수학은 어떻게 이용당했을까?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는 '도덕 문제에 확률을 적용하는 것이 수학의 추문'이라고 했다. 수학이 재판에 사용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인가. 수학은 정말로 범죄의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까?


*


"이 책에서는 계산 착오 혹은 계산 결과의 오해, 정작 필요한 계산을 간과하는 등의 단순한 수학적 오류로 인한 매우 부당한 판결 때문에 인생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7쪽)


매일 터져나오는 기사만 들여다봐도, 숫자는 우리 생활과 너무나 밀접하다. 숫자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보는 확률과 통계, 다양한 수치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이 책은 10가지 사건을 통해, 19세기 말에 사용되었던 아주 간단한 필적 분석에서부터 오늘날 DNA 분석의 정확도에 이르기까지, 법정에서 사용된 다양한 수학적 내용을 보여준다. 


"확률은 본능적인 직관과 반대의 결과를 보여주기도 한다."(100쪽) 특히, 확률의 경우. 누구나 자주 하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기계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만큼 오류도 빈번하다. 흔히, 확률을 구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건이 독립적이라는 가정 하에,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곱한다. 


하지만, "관련 정보를 모두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각의 사건이 서로 독립적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171쪽) 확률은 때로 재판을 뒤집었고, 배심원들의 결정에 큰 역할을 했다. 


*


"현실을 완벽하게 수학적 모형으로 표현하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261쪽)


'찰스 폰지'의 사기 행각은(CASE 01 아메리칸 드림 다단계 사기의 실체) 겨우 몇 달을 버텼고, '헤티 그린'이 정말로 서명을 위조했느냐의 문제(CASE 09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여성의 상속 분쟁)는 서명을 할 때 사용하는 문자의 내려쓰는 획들 간의 유사성을 비교했다. 


경찰이나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의 선입견이 개입된 확률은 의도치 않은 피해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다섯 번이나 심폐소생술 현장에 있었던 '루시아'(CASE 03 간호사는 어떻게 살인범이 되었나)나, 환자를 죽인 간호사의 사례를 통해 명성을 얻은 로이 메도 박사의 증언 때문에 두 아이를 연달아 잃은 '샐리 클라크'의 경우(CASE 06 엄마가 아이를 죽인 살인범이 된 이유)가 그랬다.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수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단점은, 수학자가 아닌 사람들쁀만 아니라 심지어는 수학자들조차도 수학을 실생활에 적용해 본 경험이 없다면 수학을 오해하고 오용할 여지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333쪽) 


수치들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영국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세상에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그럴듯한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다”라고 말했듯 통계에는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통계의 오류는 현실을 조작한다. 


인간의 미묘함을 수학적으로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수학이 너무나 단순한 나머지, 너무나 많은 상황의 수를 가지는 실제 세계에 적용하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매일 보는 숫자들을 들여다 보자. 그래프나 관계에 치우쳐 객관성을 잃은 숫자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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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 블랙
나나 크와메 아제-브레냐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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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편견이 스며든다. 나이가 들수록, 겪는 일들이 많아질 수록 의식은 확장되어야 하는데 편협한 사고에 갇혀버린다. 


문학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킨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을 비판하는 글인 '해서파관'이 발단이 되어 일어나게 되었다. 문화는 혁명이라는 큰 흐름이 되기도 한다.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BLM사건과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핀켈스틴의 5인]

"그는 고함치고 소리지르고 방망이를 땅에 내리치면서, 이번만은 진정한 본모습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어떤 폭력은 말 대신 의미를 전달하기도 한다. 울며 애원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들은 어떤 덩어리가 되어 공격성을 띄게 되는 것일까? 자신의 흑색도를 조절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 하는 삶은 "바드득거리고 딸깍대는, 가슴속을 휘젓는 열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손에서 적당한 크기가 된, 알루미늄 방망이를 손에 들려주었다.


폭력에는 폭력으로, 목숨에는 목숨으로. 인간은 당한만큼 갚아주어야지만 알아듣는걸까? 



[그 시대]

"너 귀먹은 남자 이야기 들어봤어?


성공적인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스피드리드 칩을 장착하고 완벽한 삶을 산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은 언제나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패하거나, 잘못되어 태어난 아이들은 어떨까? 


회색 바닥을 보고 '울고 있는' 땅바라기들. 매일 아침 '유쾌'를 주입받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당당하고 진실하게 행동할 수가 없는 벤. 그리고 그들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자신은 더 낫다는 안도감과 저렇게 되지 않아야 한다고 압박감을 느낀다.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시선이라서 더 잔인한 것 같다. 



[지머랜드]

"사람들은 영혼을 판다고 쉽게도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각자의 것이지 파는 물건이 아니다.


사람마다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은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 대부분은 자신이 겪은 부당함에 대해 화를 표출하거나, 폭력적인 방법으로라도 해결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이루어주는 놀이공원이 있다면 어떨까. 합법적인 방법으로 타인을 죽이지 않고, 마치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는 기분을 지머랜드가 선사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제, 어린아이들이다. 



[프라이데이 블랙]

"블랙 프라이데이는 특수한 경우입니다. 우리 쇼핑몰은 여전히 고객 서비스와 개인 간 화합의 중심지 입니다.


중국에서 커다란 대형 마트가 처음 문을 열 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줄, 한 장. 발 디딜 틈은 커녕 저 속에서 숨은 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밀려든 사람들 모습이 한 장. 짐승처럼 진열된 음식을 뜯어먹으며 마치 카트 안에서 며칠은 지낸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던 모습, 한 장. 


홉스는 그의 저서에서, 근대적 현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여 <리바이어던>이라는 괴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 괴물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현재에도 존재한다. 프라이데이의 암흑에 정신을 거의 빼앗긴 사람들은 마치 짐승처럼 제대로 된 인간의 언어조차 사용하지 못한다. 


돈, 하나만을 보고 그것만을 쫓는 사람들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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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집이 있다
지유라 지음 / 메이트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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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따뜻한 집.

음식과 가족들이 있는, 또는 돌아갈 곳이 되어주는 장소. 나의 최소한의 안전망. 보금자리.







집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떤 '냄새'다. 사람마다 체취가 있듯이, 집에도 냄새가 있다. 우리집이나 친구집, 초대받아 우연히 가게 된 직장 동료의 집에서는 저마다 냄새가 난다. 


냄새가 난다고 해서 꼭 안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집마다의 향취로 그 집을 기억하고는 한다. 자취를 시작하게 되면서 나도 집에서 나는 냄새에 더욱 민감하게 신경쓰게 됐다. 누군가 초대할때 현관에서 부터 이게 무슨 좋은 냄새야~?, 라는 이야기를 가끔 들을때면 어떤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학생때 처음 들어가 본 친구의 기숙사에서는 아카시아와 민트가 섞인 향기가 났다. 그 뒤로, 어느샌가 나도 내 집의 첫 냄새가 깔끔하고 상큼한 향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됐다. 


*


저자는 디자이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고 하니,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받았던 최초의 칭찬 한 조각은, 크면서 삶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다. 수채화를 배우고, 사생대회에 나가고는 했던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저자의 어린시절에 들었던 첫 칭찬이 궁금해졌다.







우리집


나만 냄새로 집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큰삼촌네 집으로 어렸을 적을 추억하는 모습을 보니, 익숙하고 친근해서 좋았다.







친구네 집


막창을 좋아하는 창식이가 하는 막창식이네.

"잘하는 일을 하고 사느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느냐?"

"돈 버는 일을 해야 하느냐?"

저자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고 했다.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지금 돈 버는 일을 하고 있다. (직장인으로써)

언젠가 하고 싶은 일과 좋아하는 일, 그리고 잘하는 일이 모두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하고 싶다.


미래를 위해 알고 싶으면 먼저 지나간 일들을 살피라, 는 동의보감의 격언이 있다.


나의 미래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을 위한 투자는 지금부터다.







봄에 만난 집


삼척의 봄.

삼척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벚꽃 그림이 예뻐서 꽤나 오래 눈길이 갔다.

가로등 아래의 벚꽃은 핀 것이 아니라 터져 있는 것 같다, 는 저자의 말에 알맞듯, 팝콘이 튀듯 터져나와 담벽을 감싸는 벚꽃의 빛깔은 봄 그 자체다.



*


우리집으로 시작한 집에 대한 그림들은 친구의 집과, 길에서 만난 집을 지나 봄에 만난 집으로 향한다. 


저자가 만난, 또는 다른사람들이 사진으로 보내주기도 한 집들은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다. 사연 없는 가족 없듯이, 사연 없는 집이 있을까.


요즘은 널뛰는 부동산 때문에, 집이 또 다른 의미로도 다가온다. 나의 안전망이나 보호막 뿐만 아니라, 투자나 재테크의 수단으로서도. 또,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니, 집에 대한 의미가 확대와 재생산되고 있다. 


저자의 그림을 통해, 그리고 따뜻한 글을 통해 함께 되새기는 집에 대한 의미는 그저 거주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물질로서 채워지지 않는 감정적인 정서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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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체인
에이드리언 매킨티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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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세상이 뒤집히는 것과 같다. 


카뮈는 말했다, 한겨울에야 나는 내 안에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여름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살아남는다는 건 언제나 인내한다는 것이다. 체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체인을 절대로 깨서는 안된다. 그 것은 비밀을 언제나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 비밀이 너무 깊고 어두워서 늪처럼 빨려들어가게 될지라도.






"네가 처음도 아니고 분명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명심해라, 이건 돈 때문이 아니라 체인 때문이라는 걸.


레이철은 이제 겨우, 삶의 밧줄을 다시 잡은 엄마다. 전 남편인 마티는 암에 걸린 자신을 버리고 젊은 여자인 태미와 달아나 버렸고, 딸인 카일리와 바닷가 근처 낡은 집에서 살았다. 어느 날, 딸인 카일리가 납치를 당하기 전까지는. 


그 납치는 레이철을 통째로 바꿔놓는 일이 된다. 






계획에서 벗어난 상황에서도 레이철은 체인을 바로 잡는다. 겨우 다시 붙은 가족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 검고 긴 밤은 그들 중 누구에게도 평안을 안겨주지 못한다. 레이첼은 다시 혈관에 독을 넣는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결심한다. 체인을 끊어야 내 가족이 살 수 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레이첼은 쓰던 강의계획서를 삭제한 뒤, 블로그를 하나 만든다.


블로그를 만드시겠습니까? 구글이 묻는다. 레이철은 예를 클릭한다.






체인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이 굉장히 신선했다. 서로가 서로를 인질로 잡고, 내 자식이 풀어졌으니 너도 풀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받기도 한다. 체인을 만든 사람은 분명 무척 똑똑한 사람일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 굴러가는 조직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만 다녀봐도, 어떻게 이런 조직이 운영되는거지? 하고 살펴보면, 소수의 엘리트 들이나 가끔 존재하는 능력있는 사장덕분이기도 하다. 


결국, 체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레이첼은 다시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애써 만난 가족은 겪었던 일에서 회복할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든다면 꼭 읽어보기 바란다. 한순간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는 긴박감과 서스펜스가 있으니까. 


여름밤에 읽기 좋은, 날카롭게 잘 벼려진 귀기어린 칼날 처럼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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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타자기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황희 지음 / 들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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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도피하던 상상속 세상이 있었다. 백일몽 세상은 자기 최면과 상상력의 도움으로 어느샌가 단어 하나로 빠져들 수 있는 탄탄한 곳이 되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도피란 임시대피소일 뿐이었다.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 꿈은 그대로 꿈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지하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로 했다.


벗어나고 싶은 현실과 맞닥뜨려야 하는 현재는 지하에게 잔인하다. 






"집으로 돌아온 우탁은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농아인데다 걸핏하면 현실을 잊고 상상속에 빠져 사는 딸 지하. 그리고 남편과 시부모의 폭력과 냉대 속에 갖혀 살아야 하는 엄마, 서영은 원인제공자인 시어머니를 원망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곳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지하는 아버지의 폭력에 이기지 못하고 찾지 말라는 편지를 남긴 채 가출한다. 6년 뒤, 그 뒤로 소식조차 듣지 못하던 어느 날, 서영은 입주도우미가 몰래 전해준 소포로 지하가 출판한 소설책을 얻게 된다. 몰래 화장실로 가지고 와서 심상치 않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서영은 흠칫 떨고 만다. 


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였다.







소설속의 서영은 탈출했다. 


소설 밖의 서영도 탈출에 성공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할까? 친가를 인질로 붙잡던 시가를 탈출하면서 서영은 남편에게 똑똑히 일렀다. 그녀는 아직 남편의 아내였다. 남편은 현직 서울시의원이자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교회의 목사다. 가진것이 많은 사람은 잃을 것도 많다. 그녀는 지하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단단히 박아둔 채 그 집에서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



백일몽 속에서만 산 줄 알았던 지하는 어느 새 꿈을 이루고자 달려나가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꿈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 자신과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지하의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매일매일 써내려가는 일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올곧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에는 방해가 많다. 걸리는 것도 많다.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붙잡는 것들도 있다.


나는 지하가 매일매일을 쓸 수 있었던 힘은, 힘들 때 빠져들었던 백일몽 속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대고 싶었던 사람과 갖고 싶었던 강아지, 그리고 초현실적인 능력까지. 그곳에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하는 어머니와 갇혔던 지하 와인 창고에서 발견한 '타자기'에 적혔던 이름을 찾아나섰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데에는 조력자인 친구의 도움도 컸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공모전에 도전하는 일은 지하 스스로 해 낸 일이다. 


나도 좀 더 잘쓰고 싶다. 나를 갈고 닦고 싶다. 지하가 되어 보지 않아서 모를 수도 있다. 폭력의 잔인함을. 하지만 누군가 어디에 가둬놓고 밥이랑 책이랑 종이랑 연필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타자기나 노트북 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써내려 갈 수만 있으면 된다. 나는 항상 쓰고 읽는 것에 목말라 있으니까. 때로는 나를 재촉하는 커서가 없는 곳에 놓이고 싶다.


지하는 도피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았다. 현실을 대비하고, 고통도 스스로 이겨냈다.


"문제가 생기면 풀면 된다. 문제를 똑바로 보기도 전에 두려워한다면 그 문제를 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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