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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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뜨니 1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해를 넘어도 여전히 날 선 하루를 매만지다 보니 금방 이었다. 시간은 줄곧 조용히 흐르다가, 심통이 나면 괜히 내 몸을 물고 늘어지는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정상과 감기의 경계에서 옷깃을 여몄다. 퇴근 길 가로등 밑을 지날 때, 뒤를 밟는 어둠이 무서워지는 계절이었다.







작가정신에서 [겨울장면]이라는 이 계절과 어울리는 책이 도착했다. R의 시점으로 단편적인 이야기를 훑어보다가 버지니아 울프가 떠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초반의 인물로, 특별한 줄거리가 없고 등장인물의 의식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썼다. 그녀의 독특한 전개는 현재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서 국내의 여러 작품에도 이 기법이 등장한다. 


나는 독서 모임에서 [자기만의 방]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간 꾸준히 책을 읽어왔음에도 문장들이 눈 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좁고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 들어 어지럽기도 했다. 자기만의 방을 읽는 방법으로 결론을 먼저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서 읽으라는 조언이 있었는데 상당히 유효했다.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며 이 책의 뒷 부분을 먼저 읽은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저 어두운 윤곽이 네모는 아니라고, R은 생각한다.(9쪽)" 소설은 R의 생각으로 시작된다.


R은 8개월 전 5미터 바닥으로 추락해 기억을 잃은 사람이다. 플랑크톤 처럼 부유 하던 생각들 사이로가끔, 어떤 기억이 선명해 지기도 있다. 짤게 토막 난 이야기들이 제대로 반죽 되지 않아 툭툭 끊어지는 R의 의식 같았다.


"R은 한순간, 단 한 번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겹쳐지는 시간. R은 갑자기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지고.(29쪽)"


잠들기 전 몽롱한 시간이 되면 흘러가는 것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내일인 지 모를 때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난건지, 아니 사실은 하루 동안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난 것은 아닐까, 아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마치 R이 된 것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마음은 단순히 기억이 아니고. 기억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모든 것이다.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R은 생각했다.(75쪽)"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 요소중에 가장 큰 것은 뭘까. 내가 나로서 살아온 기억이 없다면 나의 모든 것을 잃은 게 아닐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이 기억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일주일은 반복을 암시하는 속임수다.(79쪽)"


성인이 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지루함이다. 이 지루함은 반복에서 온다.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금요일의 퇴근으로 끝나고, 주말을 침대에서 보내다 보면 어느 새 월요일이다. 매일을 달라지게 만드려고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 활동을 하지만 결국 그것들도 반복되는 일주일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지루함이 부정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지루함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계속 읽었고, 독서 모임에 나가게 되었으며, 사이드 프로젝트들도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는 원동력이 되어 준 셈이다.


작가는 겨울 낙엽처럼 바싹 마른 문체로, 덤덤하게 R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상처 입었고 멈춰 있는 것이 최선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계속 시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나는 언젠가 R이 성공 했으면 좋겠다. 기억과 망각 사이의 유영을 끝내고, 아내와의 관계를 끝 맺고, 파도 위를 떠다니는 유리병 같은 삶에서 벗어 나기를 바란다.



※ 작정단 6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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