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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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은 신기한 달이다. 한 해의 마무리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것들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새롭게 맞이할 다음 해를 위해 목욕제계를 한다. SNS나 유튜브, 이웃들의 블로그를 둘러보면 저물어가는 올해에 대한 여러가지 감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올해는 더더욱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은 가까이, 몸은 멀리 두어야 했고 급격하게 일어났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이 됐다. 바깥 나들이를 즐기는 편이 아닌, 집순이인 나도 때때로 몰아치는 현실이 힘들어 속으로 조용히 침잠했다. 이럴 땐 따뜻하게 보일러를 틀어놓은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가슴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 줄 소설을 읽는 것이 딱이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를 읽으니 마음이 속닥거렸다.







나는 영화로 먼저 들어 본 작품이었는데, 소설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작정단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잘 데워진 조약돌이 모여있는 것처럼 몽글몽글하면서도 은근한 느낌이 드는 9가지의 이야기들이 모여있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이 싫지 않다. 누구나 일탈은 꿈꾸니까.


"나이에 걸맞게 세상물정 잘 아는 여자로 처신하려 노력(11쪽)"하지만, 현실에서는 꿈꾸며 혼자 노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고즈에('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와 "현실과 다른 차원으로 가슴속에 존재하는(51쪽)"말들을 하는 조제('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와 "상냥함 뒤에 언제나 공갈과 위협의 칼날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87쪽)"알 것 같은 기분이 된 우네('사랑의 관')와 좋기는 하지만 평범한 청년인 호리 씨와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유부녀 가오리('그 정도 일이야'), 혼란스럽지만 "다른 차원에서 온 연체동물 같은(146쪽)" 온기를 가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 교토까지 온 이와코('눈이 내릴 때까지'), 목적이 있어 칠년만에 찾아온 옛 애인을 만난 아구리('차가 너무 뜨거워'), "감미로운 생활이 거품 같은 인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224쪽)"이 들어버린 에리코('짐은 벌써 다 쌌어'), "가슴을 새카만 먹물로 만들어버(240쪽)"린 이야기를 털어놓은 남편과 이혼하는 리에('사로잡혀서'), 바쁜 남자 렌을 기다리다 그의 조카인 시몬과 함께 떠나버리는 미미('남자들은 머핀을 싫어해') 까지.


인생에 달관한 듯 하면서도 사랑에 휩쓸리기도 하고 떠나가는 관계에 미련을 보이기도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산뜻하게 느껴졌다. 인생에서 지켜야 할 선을 아슬하게 넘어다니며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 없이 표현한다. 


나는 특히 '그 정도 일이야'의 가오리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일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115쪽)"인 남편을 불만과 짜증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 자신의 일을 찾아나섰다. 그녀가 비즈니스를 취미로 삼아 일에 몰두하게 된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거래처 관계로 만나게 된 호리 씨에 대해 "늘 내 곁을 오가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109쪽)"하면서도 터무니 없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단지, "내가 좋아하는 호리 씨를 확보해두고(108쪽)"자 하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남편과는 "무대 흥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배우들의 뒤출이 같은 감각(118쪽)"을 두면서도, 호리 씨와는 심술궂은 농담을 하면서 손가락 인형인 '치키'를 이용해 갓 빠져든 연인의 서먹함을 걷어내는 노련미가 있었다.


나이를 점점 먹어가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관계들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 애인 처럼 나에게 가까이 스며들어 내 나이테를 구성하는 관계들이 있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경계 안으로 들어와 정립 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정리되지 않지만 어쩐지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괜찮은 관계들도 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샅샅이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흔적만 남기도 하고, 지금 당장 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놓치 못할 강렬한 것들도 있다.


첫사랑처럼 강렬하고 새침하면서 통통 튀는 것들을 지나니 점점 원숙함과 여유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리고 무척 좋았던 점은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가 대부분 여자이고, 탄탄한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밤하늘을 볼 때 반짝이는 별 처럼 제 한몸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이 좋다. 캄캄하고 긴 겨울 속, 발 아래를 밝혀주는 촛불 하나를 들고 어딘가에서 부딪힐 지도 모르는 관계에 마음을 한껏 열어두어야 겠다.


※ 작정단 6기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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