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죄의 궤적 1~2 - 전2권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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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임새 있게 쓰여진 소설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이야기의 바깥부터 시작되는 서사를 슬렁슬렁 읽다 보면, 어느 새 소용돌이처럼 빨려들어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이다.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그래서 나는 추리소설이 좋다. 사람들이 벌이는 사건들은 언제나 흥미롭고 무한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범인과 주변인들에게는 각자의 성격과 이유가 있고,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이 있으며, 마침내 어떤 결말에 도달한다. 출발역에서 독자라는 승객을 태워 운행을 시작한 열차가 조금씩 속력을 올려 눈길을 사로잡는 사건들을 마구 흩뿌리며 높은 속력에 도달한 뒤, 종래에 종착역에 도착한 모양새 같다.






그런데, 오쿠다 히데오의 <죄의 궤적>은, 일단 사건부터 펼쳐 들이대는 여느 소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에서 열차를 타고도 한참 들어가야 하는, 훗카이도의 작은 섬 레분토에서 시작되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주쿠까지 작가가 보여주는 데로 이끌리다가 문득, '어?' 하고 고개가 기울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우노 간지는 부모가 살아있지만 양부의 폭력과 어머니의 홀대 속에 버려져 착취당하던 섬에서 간신히 탈출한다. 양부에게 당했던 일들 때문에 뇌 손상이 왔고 그것은 기억력 감퇴와 어딘지 어수룩하게 보이는 성격을 만들었다. 그는 항상 섬에서 벗어나길 꿈꾸며 빈집털이를 하며 남몰래 탈출 비자금을 모으고 있었는데, 도와주는 척 하며 자신을 속인 이웃 '아카이'씨에게 훔친 물건을 모두 빼앗기게 된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바다 한복판에서 연료조차 모두 바닷물로 바꿔치기 된 상황. 그간 섬에서 일해왔던 짜투리 지식으로 간신히 뭍에 닿은 그는 타인의 옷을 훔쳐 입고 도쿄로 달아나게 된다. 우연히 만난 야쿠자 똘마니 '마치이 아키오'의 도움으로 한동안 몸을 숨기던 중, 캬바레에서 일하던 '기나 사토코'와 정이 통한다. 그리고 그와 사토코는 도쿄올림픽으로 한창 활기를 띈 와중에 벌어진 <요시오 군 유괴사건>의 범인으로 몰린다. 그는 정말 진짜 범인일까?






작가는 사건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세 명의 시선을 통해 편린들만 툭툭 던져놓았다. 이야기는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보여졌기 때문에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작중 사건의 범인처럼 느껴지는 '우노 간지'의 시점은 뭉터기로 썰어놓은 듯 했다. 그 홀로 사건에서 떨어진 외딴 섬 같았다.


책을 읽을수록 간지가 범인인지 아닌지, 그가 유괴를 벌인건지, 사토코씨를 죽인 건지 궁금해졌다. 경찰의 의구심에 기대어 약간씩 추리해가며 읽어갔다. 상당히 현실적인 사건과 배경이다 보니 소설 속 경찰이 어쩐지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납치범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공중전화인지 일반전화인지에 대한 구분을 범인에게 몸값 50만엔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점이나, 몸값의 지폐 번호를 적어두지 않기도 하고, 유괴 사건이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자 대대적인 tv 홍보를 통해 1억 전 인구를 탐정으로 만들어, 강물이 바닷물을 만나 정체된 것처럼 수사의 진척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들은 아무리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시대의 얘기라도 조금 답답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요즘의, 사이다 소설들에 너무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소설에 흠뻑 빠져들다 보니 작가, 오쿠다 히데오가 보는 사회의 비판적인 면이 잘 드러나서 좋았다. 재일조선인 1세였던 미키코의 아버지는 약을 허락해주지 않은 경찰 때문에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미키코는 일본인으로 어렵사리 귀화했음에도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경찰은 야쿠자와는 뒷거래를 하지만, 노동자들의 연합회와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공을 세우기 위해 개인적인 정보망을 활용하고 혼자 수사를 하기도 했다.


계산기 38만엔. 전화기 설비비 1만엔. 컬러 텔레비전 20만엔. 미키코의 어머니가 하는 마치이 여관에 숙박하는 사람들은 하루 평균 1000엔의 일당을 받으며, 1박 200엔 짜리 방에 묵고, 잔술 하나에 30엔인 술을 마신다. 10억이 넘는 아파트와 전월세를 오가는 서민들의 삶이 보색으로 대비되어 그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내가 매일 마주하는 사회와도 맞닿아 있었다.


계부가 행한 폭력과 착취와 부정과 부패는 간지의 내면을 비틀었는데, 그 틈으로 용해된 쇳물이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는 상흔을 남겼다. 훗카이도의 레반토라는 이름 모를 작은 섬에서부터 도쿄까지,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떨어뜨린 간지의 죄 역시 꾸준히 그의 뒤를 쫓아와 마침내 그를 삼켜버렸다. 


죄라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닐까. 그것이 어둠 속에 영영 묻히지 않도록. 죄의 궤적을 쫓느라 숨가쁜 소설이었다.


* [궤적] 어떠한 일을 이루어 온 과정이나 흔적


* 은행나무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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