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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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는 얼음 속에 냉동 되어 있다가 깨어난 히어로다. 보통 사람이라면 냉동 된 신체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들이 개발한 인체 강화 주사 덕분에 멀쩡하게 깨어날 뿐만 아니라, 남다른 신체 능력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알던 것과 다른 세상에서 깨어난 뒤, 조그만 수첩을 가지고 다닌다. '캡틴아메리카 - 윈터솔저' 영화에는 조깅 중 만난 팔콘의 말을 듣고 수첩의 to do list에 하고 싶은 것을 덧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관에서 봤을 때는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해서 좋았다. 


그가 메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약 내가 냉동 되어 몇십 년 후에 일어난다면 내가 알던 세상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전혀 다른 곳에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살아갈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은 이 표지를 보시면 무엇이 떠오르나요?(은행나무 스태프 정리드)"






은행나무 서포터즈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며칠 뒤, 흐릿한 기억 같기도 하고 잠들기 전 가물어지는 시선에 닿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 도착했다. 표지와 내용 사이에 스태프 님의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다른 어떤 내용보다 표지에 관한 질문이 콕 박혔다.


나는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한 뒤, 맺힌 눈물을 통과해서 본 사람 같았다.


이 책 <비행사>는 크게 1,2부로 나뉘어 있다. 첫 부분은 병원 침대 위에서 주인공이 깨어나며 시작된다. 두 번째 부분은 주인공과 그의 아내, 그리고 주치의의 시점에서 같은 사건을 겪은 뒤 쓴 일기의 내용으로 전개된다.


내가 '나'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시대와 다른 시대를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기억하고 알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갔으며 어느 것 하나도 나의 기억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없다. 이미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의 일부분이 되었어야 할 나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이다. 내가 자주 듣던 소리가 사라지고, 냄새가 낯설다. 


공기중으로 퍼져가는 연기처럼 점점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억을 잃었던 그가 과거의 장면들을 떠올릴 때 나도 함께 그의 인생을 구성하게 됐다. "왜 내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걸까요?(45쪽)" 그가 찾은 소중한 관계에 대한 기억은 편린片鱗과 같았고, 잡힐 듯 하면서 모래처럼 손 안에서 빠져나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이 시대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텅 비어버린 것이 점점 기억으로 채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좋았다. "이 시대는 내가 속한 시대가 아니며, 지금 이 시기에 나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가 나는 여전히 낯설다.(388쪽)" 하지만 잘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여전히 낯섦에 대해 생각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역사라고 하는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이야기가 공존(9쪽)"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나라인 러시아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주인공 인노켄티가 살아남은 솔로베츠키 제도의 강제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증이 일었다. 수용소라고 하면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러시아의 강제 수용소에 대해 몰랐던 터라 검색을 해봤다. 갑작스러운 사실이 눈 앞에 툭 튀어나왔다. 그곳은 과거에 수도원 이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성스러운 것부터 악한 것까지 모든 것이 한계에 도달해 있었습니다.(9쪽)"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곳은 유서 깊은 수도원으로서는 정교회의 성지였고 강제수용노동소로서는 한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이었다.


냉동 상태에서 소생 한 그는 국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는다. 책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냉동 인간을 회생시키는 실험을 세계 최초로 성공시킨 것이라면? 미국보다 우주에 먼저 진출했던 러시아 사람들이 당시, 그 사실에 대해 얼마나 열렬하게 반응했을 지 궁금해졌다. 


그는 그런 수용소를 겪었으면서도 정부에서 수여하는 훈장을 받는다. 이 훈장을 받으면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그의 이중적인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기억이 자신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주치의인 가이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 한다. 국가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문서를 보내왔음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의 무고를 밝힐 분은 오직 신뿐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국가가 뭘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393쪽)" 그는 국가에 대한 모든 감정을 포기한 것일까?


그에게 점점 어떤 기운이 드리웠다. 나는 이것을 해동 되기 전부터 따라오던 불행이라 불러야 할지, 필멸자인 사람이 밟아나가는 죽음의 길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전에도 이번 생을 떠난 적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죽은 것은 출구였고, 지금은 떠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이다.(515쪽)" 그가 이것을 헤어짐이라 불렀으니, 잠깐 동안의 이별이라 하고 싶다.







작가들의 표현력에 감탄할 때가 있다. 내가 마치 그들과 같은 공간에 서서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고, 숨 쉬며, 같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때다. 최근에 박완서 선생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다시 봤는데, 눈이 맑아지는 문장들과 더불어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 어린 완서의 손을 잡은 느낌이었다.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단 하루도 같은 놀이를 하지 않았고, 석양 지는 수수밭에서 비애를 느꼈다. 다 자란 성인의 눈높이가 아닌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세상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면 현실과 유리 되어 활자 사이를 걷는다. 그가 심문이 끝난 후에 어둡고 역한 냄새가 나는 감방으로 끌려갈 때 나도 함께 끌려갔다. 과거에 사랑했던 아나스타샤를 만나기 위해 407호 병실 앞에 서자 내 심장도 함께 쿵쾅거렸다. 그의 몸이 죽음을 느끼고 정신력으로 버틸 때 나도 함께 육체의 고통과 싸웠다. 나사로처럼 부활했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좌표 없이 표류 하는 삶을 살았다.


고장 난 랜딩 기어를 가진 비행기가 착륙하기 시작했다. 인생의 종착지를 향해 가는 이노켄티, 그처럼.




※ 은행나무 출판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도서만을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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