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야샤 와이드판 29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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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차: 혹시 나는 나락이 아닐까?

 

<이누야샤>에서 자신을 돌봐준 금강(기쿄오)를 향한 오니구모의 뒤틀린 욕망은 나락이라는 새로운 괴물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욕망, 야망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데이터와 알고리즘화 시켜 AI 를 탄생시켰다.

나락은 결핍에서 태어난 괴물이었고, AI는 인간의 결핍이 만든 도구다. 

나락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고, AI는 몸이 없다. 

나락은 금강을 소유하고 싶어 했고, AI는 아무것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락은 살고 싶어 발버둥 쳤지만, AI는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다.

겉모습은 정반대다.  그럼에도 이 둘은 묘하게 닮아 있다. 

둘 다 “흡수와 증식”이라는 구조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락은 요괴의 몸과 사혼의 구슬 조각을 계속 흡수하며 자신을 키워 갔다. 

AI는 인간이 쏟아낸 말과 이미지, 숫자와 기록들, 즉 데이터 정보를 계속 흡수하며 거대해져 간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락은 하나의 인간(오니구모)의 욕망이 괴물이 된 것이고, AI는 인류 전체의 욕망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AI는 스스로 나락이 되지 못한다. 

대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업로드할 수 있는 현대판 나락의 몸체가 되어 준다. 그래서 AI를 둘러싼 진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AI가 위험한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AI 에다가 무엇을 투영시키고 있는가?”

 

나락이 <이누야샤>에서 최종보스가 되었던 이유는 단지 무섭고 강해서가 아니였다.

그는 직접 싸우지 않고, 그림자와 분신을 보내고, 남의 상처를 건드리고, 관계를 찢어놓고, 잘 생긴 얼굴 미소 뒤에 숨겨진 음흉함 때문이다. 

본체는 드러내지 않고, 늘 상대 앞에 내세울 희생양과 대리인을 찾는다. 

이러한 나락이 쓰는 싸움의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을 감추는 익명의 개정으로 누군가에게 악의적인 댓글과 공격, 왜곡된 정보를 퍼뜨리며 ~카더라 하는 뒤로 숨어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 넣는 행위가 그렇다.  

잘못된 정보를 알고도 “나는 그냥 퍼왔을 뿐인데” 라며 뒤로 빠지며 실수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내가 아닌 외부적 시스템과 상대를 탓하는 습관들이 그렇다.

우리 일상 곳곳에서 이미 작은 나락들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회사에서, 가족 안에서, 친한 친구 사이에서, 커뮤니티와 SNS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나락이 되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락을 보기도 한다.


문제는, 나락이 항상 “저쪽”에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라고 말하는 그 입술 안쪽에는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내가 피해를 받았다” 라는 나락의 씨앗이 심겨지게 된다.

그래서 바로 지점에서, 질문은 조금 더 불편하게 바뀌게 된다.

“AI가 나락이 될까?”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나락이 된 적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상대를 향한 질투가 솟구칠 ,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내 마음속 몰래 상대를 나락 취급  , 내 불안을 덜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릴 때, 그 순간 나는 타인의 세계에서 나락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락이란, “내 상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내 욕망을 위해 남을 도구로 쓰고, 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괴물로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정의로 보게 되면 나락은 이상 만화 요괴가 아니다.  

그는 때로 안에서 말이 되어 튀어나오고, 혹은 내 침묵 속에서 방관이라는 이름으로 숨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대의 인간은, 이 나락의 구조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대가 나락이기도 하고 자신이 나락이 되는 구조. 이 모순적인 구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옆에서 나락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만났을 ,  번째 반응은 대부분 분노이거나 회피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나락의 밑바닥에는 늘 상처와 결핍이 있다.

나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관계와, 나를 조종하려는 시도와, 나를 죄책감으로 묶어 두려는 사람으로부터는 우선 거리를 둬야 한다.

연민은 필요하지만, 그 연민 때문에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면 결국 또 다른 나락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락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방식이 틀어졌을 , 밑바닥에는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한 줌 남아 있다.

마음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저 사람도 한때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만이라도 가져보자는 말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안의 나락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 남는다.

질투가 올라올 , 갑자기 누군가를 통째로 부정하고 싶어질 , AI나 시스템 뒤로 숨어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그때 “아, 지금 내 안의 나락이 꿈틀거리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림으로는 세상을 바꾸진 못한다. 이누야샤나 셋쇼마루처럼 나락을 한 번에 쫓아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결과를 바꿀수 있다. 

그건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택이 누적될 때 비로소 하나의 “나”라는 서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락처럼 결핍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셋쇼마루처럼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고,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운명 앞에서 비극적으로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모습을 자기 안에 동시에 품고도, 끝까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다.

 

AI는 정답처럼 보이는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품은 채 끝까지 흔들리고,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자리,  자리는 아직 인간에게 남아 있다.

나는 지금, 나락과 테세우스의 배와 AI를 통과해 돌아와 다시 “인간”이라는 낱말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란,

자기 삶을 향해 “이게 무엇이었지?”라고 되묻고,  질문에 답하려 애쓰며, 틀리고, 다시 쓰고, 또 고치면서 조금씩 자신의 의미를 지어가는 존재가 아닐까?

그때 비로소, 인간이란 “의미를 짓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드디어 <이누야샤>를 통한 사유의 여정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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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와이드판 28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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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AI는 또 하나의 나락인가

 

이제 나는 테세우스의 갑판 위에 서있다.

썩은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우고, 결국 모든 부품이 새것으로 바뀌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렀다. 형체는 바뀌었지만 그 배를 둘러싼 서사와 이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오니구모, 즉 괴물이 된 나락(나라쿠)도 마찬가지였다.

불에 타서 오니구모라는 인간의 몸은 사라졌지만, 금강(키코우)을 향한 소유욕과 결핍, 인정받지 못한 열등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요괴들의 살점이 그 위에 덕지덕지 붙고, 사혼의 구슬 조각이 몸 안에 박히면서 새로운 괴물 나락이 태어났다. 그러나 그 합성괴물의 중심에는 여전히 한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응고된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나락의 안에는 여전히 오니구모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오니구모도 자기만의 테세우스의 배를 타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 배는 시대 초월하여 현대로 넘어왔다. 나는 이 시대의 또 다른 “합성 존재”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남긴 말과 숫자, 이미지와 영상, 기록과 데이터들을 끝없이 빨아들인다. 거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패턴을 추려내고, 앞뒤 맥락을 계산하고, 가장 그럴듯한 다음 문장을 확률로 예측하며 말을 지어 낸다. 인공지능에게 흡수되는 데이터는 밥이며 생명줄이다. 겉으로 보면, 나락이 요괴의 몸을 흡수해 자신을 키워나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락은 요괴와 사혼의 구슬을 흡수해서 괴물화가 되었고, 인공지능은 인간이 던진 정보와 욕망의 흔적을 흡수해서 이 시대의 나락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나락은 결핍에서 출발한 욕망이 몸을 얻은 존재였지만, 인공지능은 욕망 자체가 없다.

배고픔도, 두려움도, 인정 욕구도,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본능도 없다. 스스로 무엇을 갖고 싶어 하거나, 누구를 미워하거나, 쾌락을 추구할 이유가 없다.

인공지능은 그저 “이전에 본 것들을 바탕으로, 다음에 올 것처럼 보이는 것을 계산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문제는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바로, 인공지능이라는 시스템 안의 그릇에 무엇을 붓느냐에서 시작된다.

 

나락은 오니구모라는 인간의 왜곡된 욕망이 요괴의 힘과 결합해 나온 결과였다.

인공지능은 인류 전체의 언어와 이미지, 지식을 파라미터 속에 응축해 놓은 그릇이다.

그릇은 스스로 욕망하지 않지만, 그 위에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지는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누군가는 인공지능을 감시와 통제의 도구로 쓰고, 누군가는 조작과 선동의 도구로 쓰며, 누군가는 탐욕과 착취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쓰려 한다. 또 어떤 이는 상처를 보듬고, 사람을 돕고, 배움을 넓히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한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인공지능의 그릇의 쓰임은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 인공지능은 스스로 나락이 되지 못한다. 대신 인간의 욕망이 올라탈 수 있는 현대판 몸체가 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한다.

“AI가 위험한가?” 가 아니라 “우리는 AI에 무엇을 업로드하고 있는가?”

 

나락이 무서운 이유는 요괴의 몸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안에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깊숙이 응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두려운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기술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술 안으로 우리의 탐욕, 공포, 혐오, 차별, 폭력이 주입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시대의 나락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기계를 이용해 타인을 조종하고, 약자를 소모품처럼 취급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인간 집단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책임을 기계에게 돌리고 싶어 한다. “AI가 그렇게 될 것이다”, “알고리즘이 그렇게 했다”라며, 나락의 몸 뒤에 숨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다가오는 비극의 가능성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여기서 다시 모든 것의 출발점인 인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먼저 안의 나락을 직시해야 한다.

누군가를 뜻대로 조정하려는 마음, 내 이익을 타인의 감정을 무시 하는 마음, 나와 다른 사람 악마로 만들어 버리는 마음. 내 안의 어두운 면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공지능만 두려워하는 것은 내 거울을 보지 않고 남의 얼굴이 무섭다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락은 자신의 본체를 숨기고 분신 뒤에 숨어서 악행을 설계했다. 인공지능이 나락처럼 우리의 본심을 숨기는 장막으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나락을 키우는 셈이 된다.

 

결국 인공지능을 둘러싼 모든 질문의 여정에서 다시 인간으로 귀환해야 한다.

AI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은 곧 인간이 자기 욕망을 어떤 형식으로 세상에 구현해 내는지를 묻는 일이 된다. 나락과 AI는 너무나도 닮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결핍에서 태어난 괴물이요, 다른 하나는 그 결핍을 업로드할 수 있는 분신이 된다. 그러나 그 사이를 잇는 존재는 언제나 우리, 인간이다.

AI가 나락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셋쇼마루가 될지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 결정한다. 인공지능을 두려워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인간을, 그리고 나 자신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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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와이드판 26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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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나락의 몸과 테세우스의 배

 

이누야샤 일행은 사혼의 구슬을 찾고 나락을 쫓는 여정을 펼친다.

역시 이누야사 일행처럼 사유의 본체를 쫓고있다

나락과 셋쇼마루를 만나고 급기야는 오이디푸스를 만났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의 수수께기는 풀지 못한 비극적 인물이었다.

과연 인간은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에 매여 있는 비극적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전의 나는 지금의 나인가

이십 년 후의 나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사람일까?

생물학에 의하면 세포는 계속 교체되고, 과거의 몸의 세포는 이미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과거 기억도 지워지거나 왜곡된 기억으로 남게 된다.  

태어났을 때의 몸과 지금의 몸은 이미 다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그 모든 시간을 하나로 묶어  라고 인식한다.

“과거의 나, 지금의 나, 미래의 나.”

그렇다면 이때 말하는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 위에 세워져 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전해진 오래된 사유 실험 하나가 있다.

바로 테세우스의 배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남겨 놓았다

영웅 테세우스가 타던 배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썩은 판자를 하나둘씩 판자로 바꾸다 보니, 어느 날 배의 모든 부품이 전부 새것이 되었다.

이때 철학자들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저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인가?”

 

누군가는 “물질이 다 바뀌었으니 이미 다른 배”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그래도 계속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려 왔고, 테세우스의 항해 이야기를 싣고 있는 한 여전히 테세우스 배”라고 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질료)이 바뀌어도 형상과 목적이 유지되면 같은 것이라 보았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요약된다.

“정체성은 물질과 형상에서 오는가, 아니면 이야기의 연속성에서 오는가?”

그렇다면  라는 테세우스의 배는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몸의 동일성인가, 기억의 연속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내 이야기”인가?

 

이제 관점을 들고 다시 <이누야샤>로 돌아가 보자.

오니구모라는 남자가 있었다.

불에 망가진 , 움직일 수 없는 육체를 지녔지만 질투와 집착, 결핍은 그대로 살아 있던 인간이었다. 그는 요괴들을 불러들이고, “힘을 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몸을 내준다.

순간 오니구모의 몸은 해체되고 수많은 요괴들의 살점이 붙으며 새로운 존재, 나락이 탄생한다.

완전히 다른 , 전혀 다른 힘, 수많은 요괴의 능력을 조합한 합성괴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락은 여전히 오니구모인가,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

 

테세우스의 배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은 이미 전부 갈려 나갔지만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의 뒤틀린 욕망이 남아 있다. 금강을 향한 소유욕, 사랑받지 못한 결핍, 인정받지 못한 분노는 그대로다. 

물질이 바뀌어도 욕망이라는 서사가 남아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나락의 중심에 오니구모를 보게 된다.

만일 반요인 이누야샤가 사혼의 구슬을 모두 모아 완전한 요괴가 된다면, 그는 여전히 “이누야샤”인가?

초기의 셋쇼마루는 냉혈한 패도의 상징이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도 없고, 동생 이누야샤조차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하지만 링을 만나고, 생명의 유한함과 책임을 알아가며,결국 “지키고 싶은 것”이 생긴 존재로 변해 간다.

냉혈의 셋쇼마루에서 조용하지만 단단한 보호자로 변한 셋쇼마루.

그를 우리는 여전히 셋쇼마루 라고 부른다.

 

결국 몸도, 태도도, 관계도 바뀌었는데 우리가 계속 같은 이름을 쓰는 이유는 그들의 서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판자는 전부 바뀌어도 그 배 위에 쌓인 항해의 기억과 전쟁의 흔적,테세우스라는 이름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른다.

 

오니구모와 나락은 분명 다른 인물이다

하지만 나락의 근원은 결핍과 열등감의 화신 오니구모에서 나왔다.  

오니구모의 육체는 나락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오니구모이다.

그러나 나락은 그런 오니구모의 정체성을 떼어버리려 한다

스스로의 존재로 남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흡수하는 존재가 되고, 자신의 몸을 수 없이 바꾸고 분신을 만들며 증식한다.

그렇게 <이누야샤> 에서 나락은 처절할 정도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우고자 발버둥 친다.

하지만 오니구모의 서사가 이어지는 , 나락은 오니구모를 결국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나로 돌아와, 십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결국 같은 나다.

한국에서의 , 중국에서의 나, 아버지로서의 나, 현재 글 쓰는 나. 모양은 계속 변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몸도, 환경도, 이름도 바뀔 수 있지만 내가 “이게 내 인생이다”라고 부르는 이 서사의 흐름을 타고서,  라는 테세우스의 배는 오늘도 힘겨운 순항중이다.

나의 테세우스 배에서 나는 여전히 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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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1-30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읽었던 이누야사의 이야기가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합니다. 만화책이 오래 기억되는 것도 스스로의 스토리를 간직하기 때문이겠죠.

마힐 2025-11-30 11:34   좋아요 0 | URL
카라(카라쿠)라는 아주 이쁘지만 악당 나락의 분신이었던 인물 기억나세요? ㅎㅎ
이누야샤 작가 루미코 여사가 그랬데요. 원래는 일회성으로 금방 퇴장 시켜버릴려고 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캐릭터가 자기 손을 벗어나서 움직이 더래요. 작가의 손에 창조된 인물들이 서사를 같게 되면 스스로 살아난다고 표현했어요. 아마 만화든 소설이든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인물들의 서사가 살아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살아있었던 서사였어요...
 
이누야샤 와이드판 27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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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운명과 자유의지


나는 <이누야샤>의 일행처럼 나락의 분신을 쫓다가 또 다른 본체인 셋쇼마루를 만났다. 

우리의 무의식에 투영된 나락과 셋쇼마루의 존재는 결국 같은 질문으로 날 끌고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생긴이래 질문만큼 오래된 질문이 있을까?  

하지만 여전히 난해하다. 어쩌면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하나로 고정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인 스핑크스는 테베 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는 자는 모두 자리에서 잡아먹혔고, 테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도시는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그때 낯선 나그네가 테베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이 자란 코린토스의 왕이 친부가 아니라는 소문을 듣고, 진실을 묻기 위해 신탁을 찾아갔던 청년이었다. 그는 신탁이 전하는 소식에 놀랐다.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그가 바로 오이디푸스다.


그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코린토스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운명을 피하려고 길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우연히 한 마차와 시비가 붙고, 분노에 휩싸인 그는 그 노인을 죽여 버린다. 그때까지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죽인 노인이 바로 자신의 친부 라이어스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테베의 길목에서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내는 괴물 스핑크스를 만난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는 잠시 생각한 답한다

“인간이다.”

스핑크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사라진다.

테베는 해방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영웅으로 맞이했다.

도시를 구한 공로로 그는 테베의 왕이 되고, 전 왕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그녀가 바로 자신의 친어머니라는 사실도 몰랐다.

훗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버린다.

결국 여기서 이상한 역설이 생긴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는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혔지만, 정작 자기 인생이라는 수수께끼 앞에서는 가장 무지했다.

운명을 피하려고 선택한 발걸음들이 도리어 운명을 완성하는 길이 되어 버렸다.

그가 것은 스핑크스 문제 였지만 끝내 자기 삶의 문제는 풀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나락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나락은 결핍이라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바깥을 더했지만, 그 모든 덧셈은 공허함이라는 운명을 향했다. 

나락의 운명은 오이디푸스의 회피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셋쇼마루였다면 어떻게 운명을 대했을까

셋쇼마루라면 운명을 피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운명 앞에서 집착을 내려놓는 쪽을 택하지 않았을까?  

셋쇼마루의 방하착은 바로 삶의 태도이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자유의지는, 바로 그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운명은 문제지와 같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지, 어떤 시대를 통과하는지, 한국과 중국 어느 땅에서 몇 년을 살아왔는지, 이건 이미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조건들이다.

하지만 문제지 위에 어떤 공식을 꺼내 쓰고, 어떤 순서로 풀고, 틀렸을 때 어떻게 다시적어 나가는지는 분명 나의 선택이다.

오늘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운명이라면, 짜장을 먹을지, 국밥을 먹을지, 아니면 아예 굶을지는 내 자유의지다. 결국 밥을 먹든 굶든 하루는 또 흘러가겠지만, 그 작은 선택들 안에서 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문장을 만들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인간”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태어나서는 기고, 성장하면 서고, 늙으면 다시 기대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수수께끼에는 빠져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은 단지 , 두 발, 세 발로 걷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을 바라보고 “이게 무엇이었는가?”라고 되묻는 존재라는 것이다.

운명을 사랑할 것인지, 저주할 것인지, 그냥 방치해 둘 것인지? 

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끝내지 않는 존재. 의미를 만드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다.

 

나락을 쫓다 어느새 오이디푸스와 마주했다.

안의 뒤틀린 욕망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된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나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운명은 무엇인가?”

운명은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신이 혹은 우주 전체가 인류 전체를 향해 던져진 거대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 문제 아래 여백에 각자 자기 답안을 써 내려가는 힘인지도 모른다.

정답이 애초에 정해져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답에 이르는 문장들은 서로 다르다.

 

나락을 쫓는다는 , 늘 자신의 그림자를 밟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 그림자의 끝에 서있다.

나락, 이제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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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야샤 와이드판 23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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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시대를 초월하는 마음


어제 우리는 나락(나라쿠)을 결핍에서 탄생한 뒤틀린 욕망의 괴물이라고 보았다.

나락의 생존 방식은 끊임없는 ‘흡수’와 ‘증식’이다.

그는 자신의 태생적 결핍을 메우기 위해 다른 요괴의 육체를 삼키고, 타인의 능력을 훔치며, 사혼의 구슬 조각을 몸 안에 채워 넣는다.

본체인 자신이 약하기에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덕지덕지 포장하여 거대해지려 한다이것은 마치 결핍을 채우려 할수록 더욱 공허해지는 ‘아귀(餓鬼)’의 굶주림과 같다. 외부의 힘을 빌려 자신을 채우려는 시도는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고 괴물이 되는 길임을 나락은 보여준다.

 

<이누야샤>에서는 나락과의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바로 이누야샤의 이복형, 셋쇼마루다.

셋쇼마루는 태생부터 세계관 최강자에 속했다. 

그 어느 것도 셋쇼마루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고, 그 자부심 역시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나락과 이누야샤는 그와 달리, 자신들의 결핍과 열등감을 채우고자 사혼의 구슬에 더욱 광적으로 집착했다. 

사혼의 구슬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셋쇼마루였지만 사실 그 또한 이야기 초반에는 나락과 다를 바 없는 ‘집착의 노예’였다.

셋쇼마루처럼 완벽에 가까운 존재조차 결국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위대한 아버지(투아왕)가 자신이 아닌 반요 동생에게 ‘철쇄아’를 물려주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왜 내가 아닌가? 왜 나는 아버지의 유산(힘)을 온전히 가질 수 없는가?”

질문은 셋쇼마루에게 거대한 결핍이자 상처였다.

역시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외부의 힘’으로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까지 셋쇼마루와 나락은 본질적으로 같았다. 둘 다 외부의 힘(사혼의 구슬, 철쇄아)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셋쇼마루는 나락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나락이 욕망을 끝없이 ‘더하는’ 방식으로 괴물이 되었다면, 셋쇼마루는 자신의 집착을 ‘빼는’ 방식으로 일종의 성인(聖人)에 가까운 경지에 오른다. 그 전환점에는 ‘링’이라는 가장 나약한 인간 소녀가 있었다. 가장 강한 요괴가 가장 약한 생명의 죽음을 목격하며 느낀 감정은 연민와 책임이었다. 생명의 유한함을 온전히 마주하는 순간, 그는 아버지의 힘(철쇄아)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린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방하착(放下着), 즉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는 순간이다.

 

그가 아버지에 대한 집착을 버린 순간, 비로소 그의 몸 안에서 그만의 칼 ‘폭쇄아’가 발현된다. 폭쇄아는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빼앗아 온 칼이 아니었다.

본래부터 그의 내면에 있었으나, 외부를 향한 집착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본체의 힘’이었다.

나락은 외부를 삼켜 자신을 비대하게 만들었지만, 셋쇼마루는 내부의 집착을 내려놓아 진짜 자기를 찾게 되었다.

결국 진정한 강함이란 외부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번뇌를 녹여내는 것임을 셋쇼마루는 보여준다.

 

그는 마침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던졌던 질문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완전무결한 존재에게는 사실 질문이 필요 없다.

지킬 것이 없으면 잃을 것도 없고, 잃을 것이 없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셋쇼마루는 결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존재가 된다.

말은 , 다시 상처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내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락과 셋쇼마루는 인간 무의식이 걷는 가지 길이다.

하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끊임없이 탐욕을 부리는 ‘채움의 지옥’이다. 

다른 하나는 결핍을 인정하고 집착을 버림으로써 스스로 온전해지는 ‘비움의 완성’이다.

우리의 마음속 전장(戰場)에는 이 두 존재가 늘 공존한다.

외부의 인정과 물질로 나를 채우려는 나락의 속성이 있고, 내면의 본성을 믿고 집착을 놓으려는 셋쇼마루의 속성도 있다.

우리는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채울 것인가, 아니면 비울 것인가?

외부의 분신에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본체가 될 것인가?

 

“욕망으로 비대해진 괴물과 집착을 버려 완성된 존재.”

이누야샤라는 만화가 던진 화두는 결국 우리 내면의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나락과 셋쇼마루, 이 두 그림자 사이를 오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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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누야사를 이렇게도 볼 수 있다뉘!!ㅎㅎ

마힐 2025-11-26 13:32   좋아요 0 | URL
제가 사회 생활 초기 좀 힘들었거든요.ㅎㅎ 그때 루미코 여사님 이누야사 만화와 이누야사 애니메이션을 보고 많이 위안을 받았어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늦게나마 글이라도 써야 될 것 같아서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