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2월8일
오늘의정진: 入深山住蘭惹 입심산주란야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르니
- 100일 정진, 45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마흔 네 번째 구절은
<自從頓悟了無生 자종돈오료무생/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 부터는
於諸榮辱何憂喜 어제영욕하우희 /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 였다.
어제 오역칠정은 인간의 오관(五官)을 통해서 만들어 진다고 했었다.
분명히 육신을 가진 인간은 오관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업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업을 짓지 않아야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데 오관을
버리고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니 깨우침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의 결과란 말인가?
실체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가 누군가의 설계라면 육도윤회는 정말로
너무도 정교한 시스템 같다.
깨우침은 그러한 육도윤회의 시스템의 버그(bug)가 아닐까?
아니면 시스템의 정점을 찍는 최고의 단계 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영화 매트릭스상의 시스템과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닮은 것 같다.
현실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모두가 가상이었다.
진짜 이데아는 분명 존재 하는가?
오늘은 마흔 다섯번 째 구절
入深山住蘭惹 (들 입, 깊을 심, 뫼 산, 머물 주, 난초 란, 이끌 야 )
입심산주란야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곳에 머무르니
岑崟幽邃長松下 (봉우리 잠, 험준할 음, 그윽할 유, 깊을 수, 길 장, 소나무 송, 아래 하
)
잠음유수장송하 / 봉우리 험준한 깊고 그윽한 낙락장송 아래로다.
이번 구절 부터는 깨닫음을 얻은
후의 다시 영가선사의 생활로 돌아간다.
육조대사를 통해 깨달음의 인가를
얻은 후 영가스님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 왔다.
깊은 산, 고요한 곳, 그곳이 본래 영가스님이 머물렀던
곳.
그 낙락장송 아래에 다시 섰구나.
깨닫기 전에 섰던 그 자리와 깨닫고
난 후 자리는 같지만 마음은 달라졌다.
<내가 깨닫기 전에는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이후 선 공부를 해보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마침내 깨닫고 보니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도다.>
(청원행사(淸原行思: 1067~1120)의 어록 중에서
<일일 소견>
보이고, 들리고, 말하는 것에 끄달리지 않으려고.
눈으로 보이는 것을 막고, 귀로 들리는 것을 막고, 입으로 말하는 것을 막는다.
진짜 공부 하려면 장님,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고 선지식들
께서는 말씀 하셨다.
그게 다 함부로 업 짓지 말라는
말씀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