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송 전습록 낭송Q 시리즈
왕양명 지음, 문성환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북드라망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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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낭송 전습록

지은이: 왕양명/ 문성환 풀어 읽음/ 고미숙 기획

   :  저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사용했던 멸칭 중에  '사문난적' 이란  표현이 있다.

사문난적(: 이 사 文: 글 문 亂: 어지러울 난 賊: 도둑 적), 지금 시대로 말하면 '쌍놈의 시키'  와  비슷한 뜻일 것 이다.

 

 

유학(儒學)은  본래 2500년전 공자(b.c 551~479) 에게서 나왔지만  당시엔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 즉 제자백가 사상들 중의 하나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방에 의해  통일된 한나라가  유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게 된 이래로 역대 중국의 왕조에서는 유학을 국가의 공식 학문, 즉  관학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공자 시대의 유학을 송나라 때 주자(1130~1200)가  재해석한 신유학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주자학이 된다.

 

 

 

주자학은 곧 고려말기 우리나라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급기야는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을 세우게 된다.

조선의 유학은 학() 이라는  배움을 넘어서 교() 의  수준으로 격상하게 되는데 이때 부터는  거의 종교와도 같은 수준으로 믿게 되어진다. 

그렇게  조선의 유교는 주자학을  신봉했고  사대부들은  주자가 해석한 유교 경전 해석외에  다른 식의 해석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주자가 달아 놓은 사서(四書)의   해석서 외에는 전부 이단이라 칭했다.

그때 그런 이단의 학설을 멸시하는 호칭이 '사문난적' 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된 <낭송 전습록>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문난적과 같은  성리학의 이단 학설 '양명학' 에 관한 책이다.

양명학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전습록은 '왕양명' 과  그의 제자들 간 서로 나눈 대화들이  기록된 책이다.

공자의 <논어>와 같은 형식이라고 볼 수있다.

논어는 공자가 저술한 게 아니고 그 제자들이  스승 공자와의  일화나 대화를 공자 사후(死後)에 엮어 편집 했듯이  전습록 또한 왕양명이 직접 저술 한 책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습록을 왜 성리학에서는 이단으로 보는 것인가?

사실 조선 시대 주자학을  종교 수준으로   신봉한 조선 사대부들의 변태 같은 믿음이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지 양명학이 탄생한  명에서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8) 의  본래 이름은 수인(守仁) 이고  자()가 양명이 된다.

양명학의 시조가 되는 왕양명을  깊이 알기  위해  나는 그의 시간과  공간을 우선 이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적으로는 15세기후반과  16세기에 걸친 명나라와 세계 상황, 공간적으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절강(浙江) 지역을  살펴 봐야 된다고 본다.(단지 내가 좀더 알기 위해서)

우선 공간적으로 보면 그의  출생지는  지금의 중국 절강성 '여요 (余姚) ()' 으로  현대 중국의 행정 구역상  영파(寧波: '닝보' 라 읽음) 시에  속한다. 이곳은  근대 국민당의  대만 총통 '장제스' (1887~1975) 태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영파 라는 지역은 지금의  상하이(上海) 하고  바다 사이를 두고 있는데 항주만 대교(杭州灣跨海大橋)가 놓여 있어  바다위에 35킬로가 넘는 다리로 연결 돼 있다.

이곳은 중국의 따뜻한  강남지역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옛 오나라 지역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산과 벌판뿐인 북방에  비해 이곳 절강 지역은   따뜻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 농사뿐 아니라 해산물도 쉽게 얻어 역사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속한다.

닝보는 중국의  동해에 위치하고 우리 나라 서해, 즉  황해와 마주보고 있다.

그래서 고대때 부터 무역을  발전 시켰고  신라시대 때에 교류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 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중국쪽 뱃사람들이   바로 이 지역 닝보 지역 사람을 말한다.

(  10년전 내가 닝보를 여행할 때 우연히  지나친 기념비속에 맹인 아비를 둔 신라에서  넘어온  여인이 아버지를  그리워 했고 그것이 심청전의 모티브가 됐다는 내용을 모고 깜짝 놀란적이 있다. )

또 이 지역 근처 주산(舟山)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은 중국 불교 4대 성지인 보타산(普陀山)  관세음보살 성지(聖地)라 불린다.

관음보살이 그곳에서 중국 동해를  보살펴 준다고 그 지역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이처럼 왕양명이  자랐던 절강지역은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지역 이였고 정신적으로는  개방적으로 교류하는 분위기의  풍토에서 양육 되었다고 보아진다.

또한 그 지역 신앙인  관세음 보살을 믿는   불교 신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 되어진다.

물론 그가 정통 유학자를 자처 했기  때문에  불교도라고  보진 않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학파를 세우는데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 없다고 본다.

 

 

 

내가  이 책<전습록> 에서 주목한 것은 양명과 제자들과의  선불교적인 문답과 당시 자신이 느낀 불교의 한계를  유학으로 극복한다는  점이다.

그의  사상이 불교, 특히 선불교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는 확실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양명학의 무엇이  선()과  비슷하고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것은 알기에 앞서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 봐야 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양명이 살았던  시기는  15세기 말 16세기 초기로 서양에서는 한창 창발의 시대(1490~1530)라  불리는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 유럽은 신대륙 발견,  인쇄술이 보편화 되고, 전쟁의 기술이 발전하였고, 루터에  의한  종교 분쟁이  시작 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은 비교적 성군이였던  9대 성종과  개 망나니 였던 10대 연산군을 거쳐 11대 반정을 일으킨 중종 시기와 겹친다.

또 이웃 일본은 이때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센코쿠 시대, 100년 전국시대에 돌입 했다.

이때는 한마디로 유럽은 아메리카까지  세력을   확장 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조선은  그냥 우리끼리 볶닦거리며 정체 되고 있었고,  일본은 아예 나라 전체가 싸움판이 된 시기였다.

그나마  명나라는 그에 비해 큰 문제 없이 나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것 같다.

 

 

양명이 태어나고 자란 시기의 명() 왕조는  9대 황제 홍치제(재위 기간1470~1505)로 명나라 시기 몇 안되는 현군의 시대였다.

이후  10대 정덕제(재위기간 1505~1521)는  역대 중국 황제를  통털어 진짜 독특한  4차원의  사고를 가진 황제 였었다.

역대 황제중  가장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표방(豹房)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놀이터를  만들어  표범이나 호랑이를 키우고  자신은 시녀들과 놀거나, 마음이 내키면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몽고족하고 싸우러 전쟁터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여 했다고 한다.

 

원래 명이란 나라는 원()말 시기에  몽고족을  북방으로 내쫓은 탁발승 출신의 주원장(1328~1398)이 세운 나라였지만  명나라 시기 내내 몽고족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다.

() 왕조가 후에 명을 정복하기전 까지  명나라 시기에는 끊임없이  명과 몽고는 충돌 했었다.

그 세력 다툼은 한때는 명의 황제(정통제)가   몽고 부족에게 사로 잡히는 수모( 토목의 변:1449)를  당하기도 하는 등  당시의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고와 남쪽으로는  왜구들로 인해 골치가 아팠다.

 

 

 

따라서 정덕제가 전쟁터에 직접 나가서 뛸  정도로  명나라 국경은 항상 전투 대비 상태 였는데  곧 이 시기가  왕양명이 무장(武將)으로  전장(戰場) 을 떠돌 때의 시기 였던 것이다.

왕양명은  유학자 출신이지만  만명의 군사로  10만의 반란군을 진압했을 정도로  천재적 군사적 재능을 지닌 명나라의 선봉 장군이기도 했다.

 

 

정리 하자면 왕양명은 명나라 전장을 누비는  장수이긴 했지만 당시 나라 안의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로왔고  그 속에서 그의 유학은 독창적인 사상으로 발전 된 것이라 보아진다.

적당히 긴장하고 또  적당히 평화로운 분위기 라는 독특한 환경속에 그의  양명학이  완성 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의 양명학은 주자학과는 구별이 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사물과 뜻을 마음에다 바탕을 두었다.

마음 이란 것은  본래 주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양명학은 이 점에서 본질을 객관적으로   따지고 드는 주자학과 구별된다.

 

 

좀더 들어가 보면 양명학은  심학(心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명은  (), 즉 마음을 학문을 하는데 가장 바탕이  되고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바로 이치다.  심즉신(心卽身), 마음이  바로 몸이다.

그에게 마음은 어떤 의미 였는가 하면  우리가 가진 몸이 라는 것도 마음이 물질화 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분리 시키는  서양 철학과는 달리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았다.

또한 그는 더 나아가 마음에서  앎()과  뜻(), 물질(), ()이 전부 나온다고 보았고  그들 모두가 하나라고 여겼다.

이 점이 불교의  불이사상(: 둘이 아닌)  과  유사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양명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치양지( 致良知) 양능(良能) 에 대한 것이다.

치양지는 양지에 이른다는 뜻으로,   양지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양능은 배우지도 않아도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래서 양능은 양지를   활용하는 능력으로  이해 해도  될 것 같다.

 

 

양지는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없앨 수도   없는 것이고 그는 양지를  알고  따라야 된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도  양지가 있지만 욕심이  우선이고  양지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도()와는 멀어진다는 것이다.  양지가 곧 도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양명의  양지 개념은  우리가  본래  지닌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의  불성(佛性)과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양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 했는데 이것은 양지와  양능이 체현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지행일치(知行一致)라고도  한다.

알면 행 할  수 있다는 뜻인데  행 할 수 없으면 아직 진짜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앎이 곧 실천이 되야 한다. 실천이 없다면  참된 앎이 아닌 것이라 볼 수있다.

그가  강조한 실천은 주자가  학문적으로 알기 위해 파고드는 것과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는 공자로 부터 이어지는 유학의 근본이  되는  정신을  자신이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여겼다.

비록 그가 주자를 따르지 않는다는 당시  성리학자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문은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마음에서 구했는데 아니라면  비록  그  말이   공자님에게서 나왔다 해도 감히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공자를 믿는다.

주자는 무슨 이유로 공자의  문장을  개정하고 보충하고 편집하는 것인가?

도는 천하의 것인데 어찌 주자가  터득했다고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고 공자가 터득 했다고  사사로이 가질 수 있는가? 

비록 내가 주자와 논의가  다르더라도  나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다.">

이 구절,  나는 감히 소인의 마음으로  주자를 섬기지는 않았다! , 감동이다.

주자학 외엔  사문난적이라 칭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일갈을 던지는 것 같은 후련함이 느껴진다.

 

 

주자학만이 최고이며 거의 광신적으로  변해가는 성리학 풍토에서 양명학이  나온 것은 진화적으로 돌연변이 같은 일이 발생 한 것 같다.

이때 어쩌면 성리학 수준을 한단계  더 올려 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조선에서는 강화학파(江華: 강화도에  은퇴하며 연구) 라 하여 양명학을 연구했던 소수의 학자들이 있었지만  성리학에 비해 인지도는 아주 낮았다고 한다.

그렇게 양명의  사상은 이후에 까지 호응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아직도 간간히 그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 될 것 같다.

 

논어  선진편에 보면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문답이 있다.

공자가 자로, 염유, 공서화, 증점에게  각자의 품은 뜻을 말해 보라고 한다.

그러자 자로와 염유, 공서화는 각자의 포부를 공자 앞에서 밝힌다.

자신에게   3년의 시간을  주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을 교화 시킨다는 둥 제후국들의 예악(禮樂) 을 맡은 벼슬아치가 되고 싶다는 대답들을 한다.

그들의 대답에 공자는 단지 미소를 짓는다.

그때 그들 곁에 있던  증점은 홀로 비파를 타고 있다.

그들과  공자의 문답에 아랑곳 하지 않고  증점은  여여하게  비파를 탄 후 자신은 봄이 오면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대에서 바람을 쐬며 노래 한 곡조 뽑은 후 돌아오겠다고 대답한다.

이에 공자는 증점을  찬탄한다. '나도 점과 뜻을 같이 한다.'

 

전습록에도 이들의 문답에 대한  제자가  양명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증점이 노는 듯 한 대답에 공자는 왜 칭찬을 했을까그것은  무슨 의미 였을까?

그에 대한 답은 왕명이 그랬듯이 내 스스에게 묻고 내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하리라.

 

이 책<낭독 전습록>은 왕양명의  사상에 대한 입문편으로 이해 하면 아주 좋은 책인것 같다.

이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출판사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양명은  자신의 심학이 불교의 마음을 닦는 것과 다르다고  했지만 나는 그 차이를 잘 모르겠다.

앞으로 이 책과  왕양명에 관련된  책을  곁에 두고 꺼내 보며 무엇이  다른지 곰곰히 따져 볼 것 같다.

 

 

공무와 송사 처리 같은 관아의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학문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격물(格物) 공부인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학문을 강의할 수 있다. - P54

주자가 자신으로부터 먼저 절실히 수양했다면 자연히 그 밖의 것에 미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중략.....
주자는 젊은 시절부터 많은 책을 저술하였지만 만년에는 오히려 그 일들을 후회했다. - P61

광자는 비록 성인은 아닐지언정 그 자신이 품은 성인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는다. 나는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나의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웃을지라도 나의 뜻을 포기하거나 굽히지 않을 생각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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